22.06.27 15:28최종 업데이트 22.06.27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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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10월 15일 자 <경향신문> 기사 '황무지의 수확, 유산 4억 원' ⓒ 경향신문

 
충남 공주에 김갑순(1872~1960)이라는 갑부가 있었다. 어느 정도 갑부였는지는, 죽은 뒤에 상속세가 납부되는 방법을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사망 2년 뒤에 발행된 1962년 10월 15일자 <경향신문> 기사 '황무지의 수확, 유산 4억 원'에 따르면, 사망 당시 자손들에게 부과된 상속세는 2400만 원이었다. 상속인들은 이만한 돈을 만들 길이 없어 현물 납부를 선택했다. 이때 상속인들이 납부하게 된 현물 내역을 살펴보면, 1960년 당시의 2400만 원이 어느 정도 거액이었는지를 추산할 수 있다. 위 기사는 이렇게 보도했다.
 
"상속세로서 현금 대신 제공할 현물만도 대지 7천 평, 밭 2천 7백 평, 논 1천 3백 평, 임야 1백 82만 6천 평과, 서울·대전 지방에 있는 주택 7백 21동이라고 한다."
 
김갑순의 변신

김갑순은 청년 시절만 해도 형편이 어려웠다. 위 기사는 "어렸을 때 가세가 곤란하여 그의 모친은 공주장터에서 해장국 장사를 했었다 한다"고 전한다. 돈이 없어 나이 20이 넘도록 결혼을 못했으며, 큰돈을 벌고 싶은 욕망에 노름판에도 기웃거렸다고 한다. 그랬던 사람이 대전과 서울 등지에 대규모 부동산을 소유하는 갑부로 변신했던 것이다.


그가 대한제국 때 군수급을 지내며 부정 축재한 것들이 재산 축적의 밑바탕이 되긴 했지만, 그보다 더 근원적인 계기로 작용한 것이 있다. 지금의 충남도청인 공주감영에서 사환으로 근무할 때 묘령의 여성을 우연히 알게 된 것이 출발점이 됐다. 공주감영이 도박 범죄자 체포 작전을 벌일 때 현장에서 만난 여성이 그의 인생에 전환점 같은 계기로 작용했다.

1993년 발행된 <친일파 99인> 제2권에 박천우 장안전문대 교수의 '김갑순: 역대 조선총독 열전각을 건축한 공주 갑부'라는 글이 실려 있다. 이 글은 그가 그 여성을 만나는 과정을 "노름꾼을 잡으러 어떤 곳에 갔다가 묘령의 미인을 만났다"고 한 뒤 "이것이 그의 출세에 행운을 가져왔다"고 설명한다.
 
"김갑순은 그 여자와 의남매를 맺고 그 여자를 충청감사의 소첩으로 중매하였다. 그로부터 그에게는 출세의 길이 열렸고, 의남매를 맺은 여자의 도움으로 총순(總巡)으로부터 충남 각지의 군수를 역임하기에 이르렀다."
 
그 여성의 물밑 지원으로 중하위직 경찰관인 총순이 되고, 뒤이어 황제 자문기구인 대한제국 중추원의 의관(의원)이 됐다. 그런 다음, 곳곳에서 군수직을 역임했다. 부여군수·노성군수·임천군수·공주군수·김화군수를 거쳤고, 국권 침탈 이듬해인 1911년에 아산군수직을 사임했다. 이 시기에 축적한 부정한 재산들은 일제강점기 때 만석꾼으로 올라서는 발판으로 작용했다.

단군을 팔아넘기다
 

연대미상의 김갑순의 모습. 복장으로 봐서는 그가 군수자리에 있던 1911년이나 그 이전으로 보인다. ⓒ <동우수집>

 
김갑순은 일제강점 하에서도 공직 혹은 관변 직책을 역임했다. <친일인명사전> 제1권에 정리된 바에 따르면, 충남 참사, 충남 지방토지조사위원,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충남지국장, 지방의회 격인 충남 도평의회의 의원, 총독부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참의 등을 지냈다.

또 일제 침략전쟁이 격화된 1937년 이후에는 전쟁 지원 단체들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2010년에 펴낸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는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평의원,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 국민총력조선연맹 평의원, 흥아보국단 충청남도 준비위원, 조선임전보국단 이사" 등의 경력을 소개한다.

그는 토지조사사업에 협력하고 위로금을 받거나 중추원 참의로 근무하고 연봉을 받는 한편, 침략전쟁 지원을 위해 국방헌금을 납부했다. 이 같은 일반적 패턴의 친일 행위 외에, 눈길을 당기는 김갑순만의 특색 있는 행적도 있다. 단군 할아버지를 팔아넘긴 일이 거기에 해당한다. 위의 <친일파 99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일제에 대한 충성을 과시하기 위하여 당시 조국 광복을 위하여 투쟁하던 금강도교의 비밀을 염탐하여 왜경에 밀고하였다. 이에 교두 이하 각 간부들이 투옥되었으며, 왜경의 후원 하에 금강도교 소유인 단군성전을 압수하여 제멋대로 역대 총독 열전각이라는 해괴한 건물을 건축하여 역대 조선총독의 사진을 안치하고 강제로 이에 참배케 하였던 것이다. 그때 피검된 교도 63명 중 7명은 악독한 고문에 못 이겨 무참하게 옥사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일제와 관련을 맺고 친일 행적을 이어가는 가운데, 그가 최우선적 중점을 둔 분야는 부동산 투기였다. 공직 활동을 통해 알게 된 노하우를 기초로 부동산 재테크에서도 비상한 수완을 발휘했다. 위의 <경향신문> 기사는 공주·대전 등을 비롯한 곳곳의 부동산들로 인해 그가 만석꾼 반열에 올랐다고 설명한다.

<친일재산 조사 4년의 발자취>에 따르면,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가 국가 귀속 대상으로 지정한 김갑순 재산은 충남 공주시 우성면 방흥리 등에 있는 116필지로 공시지가 2억 8천만 원 정도다.

부동산 투기의 방식

그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하고 받은 연봉은 만석꾼이 될 만한 금액은 당연히 아니었다. 그 자신이 부동산 투기를 해서 거부를 축적했으므로, 재산 대부분과 친일행위가 직접적 관련성이 없어 보일 수도 있다.

<경향신문> 기사에 따르면, 그에게는 딸 넷과 아들 다섯에 더해 80여 명의 손자가 있었다. 그가 죽기 전에 태어난 직계혈육은 약 90명이다. 이들에게 돌아갔을 김갑순 재산의 대부분 그 자신의 부동산 투기 결과물이다. 그러나 그가 가장 크게 돈을 번 계기가 무엇이었나를 음미해보면 판단이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김갑순의 재산 가치가 비약적으로 상승한 시점은 1930년대 초반이다. 이전에도 이미 부자였지만 만석꾼 소리를 듣게 된 것은 이 시기였다. 대전 땅에 미리 사둔 부동산들이 큰 폭으로 폭등하면서 생겨난 결과였다. <경향신문> 기사에 이런 대목이 있다.
 
"1931년(소화 6년)에 새로운 또 하나의 행운이 닥쳤다. 공주에서 도청이 대전으로 이전하게 되자, 대전에 사두었던 그의 대지 위에 지어졌다. 그렇게 되니 그의 논과 밭은 전부 대지로 변해버렸다. 그것이 현재 대전시 대흥동과 은행동, 선화동 그리고 역전 일대이다. 그는 계속해서 땅을 사들여 드디어는 2만석군이 되고 경기도와 충청도, 그리고 경상도를 통하는 국내 최초의 여객운수사업을 시작했다. 또한 유성호텔을 매입·보수하는 한편 관광호텔로 갖추었다. 그리하여 일정 말엽엔 충남 제1의 재벌이 되었다."

그가 미리 사둔 땅 위에 충남도청이 세워지고 대전 시가지가 조성되는 등의 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식민당국이 새로운 도청 부지를 결정할 때 그의 입김이 개입된 결과였다.

<친일파 99인>은 "김갑순은 일제 관료들과 결탁하여 충남도청을 대전으로 이전시키도록 했다"고 설명한다. 그런 뒤 "1932년 도청이 공주에서 대전으로 옮겨오자 평당 15전 내외에 불과했던 땅이 평당 수백 원으로 폭등하여 거액의 폭리를 획득할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대전 시가지가 될 땅의 40% 정도를 김갑순이 미리 소유하고 있었다고 하니, 충남도청 이전이 그의 치부에 결정적 계기가 됐음을 알 수 있다.

처벌받지 않은 친일파
 

공주시내에 남아 있던 김갑순의 옛집으로 1998년 찍은 사진이다. 주인도 바뀌고 집터도 분할돼 옛 '영화'를 찾을 수 없다. ⓒ 오마이뉴스


깁갑순은 일제와 친분을 쌓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단군성전을 역대 총독 열전각으로 개조해주는 정도에 그치지 않고 금은보물까지 동원해 그들의 환심을 샀다. 위 책은 "총독부 고관이 공주에 오면 으레 집으로 데려와 대접했고, 꼭 만나야 할 고관이 안 만나주면 순금 명함갑이나 순금 화병 한 쌍씩을 뇌물로 건네는 방법까지 서슴지 않았다"고 말한다.

그런 로비를 통해 충남도청과 시가지를 자기 부동산 위에 유치하고 이를 발판으로 만석꾼 반열에 들어섰다. 이 정도면 그의 재산 대부분이 친일행위의 결과물이었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김갑순은 여타 친일파들처럼 처벌을 받지 않았다. 해방은 그의 재산 규모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그의 친일재산은 일제 패망 뒤에도, 그의 사망 뒤에도 그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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