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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만 틀면 영부인이 나오던 정권... 그 결과는 이랬다

[역사로 보는 오늘의 이슈] '영부인' 이순자, 육영수 사례로 보는 견제 받지 않는 권력의 문제점

등록 2022.06.29 13:50수정 2022.06.29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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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선거는 '대통령 부부'를 뽑는 이벤트가 아니므로, 대통령 영부인의 국정 개입은 원칙상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관행상 혹은 사실상 용인되고 있고, 대통령 부인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욕을 먹을 수도 있다.

영부인의 역할은 헌법 규정과 별개로 사실상의 영역에서 용인되고 있지만, 그럴지라도 최소한의 가이드라인은 지켜져야 한다. 영부인의 위상이나 활동이 과도해져 '1명의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의 조직 체계에 영향을 주지 말아야 함은 물론이다.

대통령 부인의 단독 활동이나 공적 활동이 지나치게 되면 사람과 돈이 영부인 쪽으로 몰릴 수 있다는 점은 전두환 정권 때의 이순자 사례에서 잘 나타났다. 이순자씨 친정 사람들은 부정부패 사건에 이름이 오르내린 바 있다.

<중앙일보>가 1988년 4월 24일에 보도한 '이순자 여사 친척, 민주(당에)서 부정 공개' 기사에 따르면, 아버지 이규동, 작은아버지 이규광, 남동생 이창석, 제부 홍순두는 이순자와 전두환의 비호 아래 거액의 재부를 축적한 혐의를 받았다. '단군 이래 최대 어음사기 사건'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장영자도 이규광의 처제였다. 이순자 일가의 일탈이 전두환 정권을 더욱 부패시켰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 같은 영부인 리스크는 육영수 사례에서도 나타났다. 육영수는 특유의 헤어스타일과 얼굴 인상에 더해 1974년 8·15 피격이라는 비극적 사건과 결합돼 있어 이순자와 동떨어진 이미지로 것처럼 비쳐질 수도 있지만, 실상은 이순자 못지않은 측면도 있었다.

'단독 활동'을 가장 많이 한 영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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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12월 12일 양택식 서울시장이 영동(강남) 지역 시민회관 준공테이프를 끊은 후 육영수 여사를 안내하며 새 주택을 둘러보고 있다. ⓒ 연합뉴스

 
육영수가 공적 활동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는 <대한뉴스>의 등장 빈도에서도 나타난다. 1990년대까지의 극장용 대한뉴스와 2000년대 이후의 텔레비전용 KTV를 소재로 한 박종민 경희대 교수와 이세영 경희대 석사의 공동논문에서 그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방송통신연구> 2020년 겨울호에 실린 '대한뉴스와 KTV의 70년 분석을 통해 본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의 인상관리와 리더십'이라는 이 논문에 따르면, 화면에 가장 많이 등장한 영부인은 육영수였다. 논문은 "영부인의 이름을 키워드로 검색을 진행한 결과, 프란체스카 49건, 공덕귀 0건, 육영수 207건(전기 156건, 후기 51건), 홍기 3건, 이순자 65건, 김옥숙 1건, 손명순 1건으로 총 326건이 전체 분석에 포함되었다"고 말한다.


육영수가 등장한 방송은 207건으로 가장 많았다. 1974년 8월 15일 세상을 떠났으므로 1972년 12월 27일 이후의 제4공화국 하에서 1년 8개월밖에 살지 못했지만, 제4공화국 하에서도 그는 51회나 화면에 등장했다. 그의 경우에는, 남편과 함께 등장하기보다는 단독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논문에 따르면, 자신이 등장한 대한뉴스 화면의 70.5%를 혼자 채웠을 정도다.

육영수는 극장 화면뿐 아니라 신문 지면도 홀로 채우는 일이 많았다. 2008년에 <미디어, 젠더&문화> 제10호에 실린 박재영·윤영민 고려대 교수의 논문 '한국의 영부인 -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의 40년간 보도 분석'에 따르면, 역대 영부인 중에서 대통령과 별도의 단독 활동을 가장 많이 한 인물은 육영수였다.

이 논문은 1965년부터 2007년까지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에 보도된 대통령 부인의 활동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논문은 영부인의 공식 활동에 관한 2161건의 언론 기사 중에서 부인과 대통령이 함께 등장하는 기사는 52.5%이고 영부인만 등장하는 기사는 47.5%였다고 설명한다. 부부동반과 단독 활동이 거의 비슷하지만, 전자가 약간 많았다는 것이다.

육영수는 그런 평균으로부터 크게 벗어났다. 그의 경우에는 단독 활동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위 논문은 이렇게 설명한다.

"영부인 별로 보면, 육영수는 단독 활동 기사가 무려 82.5%로 타 영부인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다. 김옥숙(21.2%)은 단독 활동 기사가 가장 적었고, 권양숙(28.8%)도 매우 적었다. 손명순과 이순자도 단독 활동 기사보다 동반 활동 기사가 더 많았으며, 이희호는 단독 활동 기사와 동반 활동 기사가 거의 같았다."

육영수의 공식 활동은 사회적 약자와의 접촉을 통해 이들에 대한 국가적 관심을 촉구하는 긍정적 측면도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의 독재 이미지 희석화에 기여하는 측면이 컸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정치학자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그녀는 '청와대 안의 야당'이라고 불리기도 했으나, 사실은 박정희가 자신의 생각과 방식대로 행동할 수 있도록 극진한 내조를 펼쳤다"고 평가한다.

그런데 그의 공적 활동이 남편을 돕는 데만 그친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는 그 자신의 우상화 혹은 신격화에도 기여한 측면이 컸다.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 중 하나가 '영부인배 쟁탈' 체육대회였다.

영부인배를 쟁탈하는 사회

육영수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대통령영부인배 쟁탈 여자탁구대회, 대통령영부인배 전국여자테니스대회, 대통령배 및 대통령영부인배 쟁탈 전국남녀배구대회 같은 체육 이벤트들이 많았다. 일례로, 1973년 9월 20일 자 <조선일보> 8면 상단에는 대통령영부인배 테니스대회에 출연해 하얀 원피스와 하얀 구두 차림으로 라켓을 들고 시구하는 육영수의 사진을 발견할 수 있다.

영부인배 스포츠 이벤트에 대한 추억은 박근혜 전 대통령의 <나의 어머니 육영수>에도 묻어 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한 달 엿새가 지난 그날은 제4회 영부인배 쟁탈 어머니 배구대회가 장충체육관에서 열리던 날이었습니다"라며 "이날 저는 상장(喪章)을 달고 참석했었습니다"라고 회고하는 부분 뒤에 이런 대목이 이어진다.

"개회식순에 따라 이 대회를 창설하신 어머니를 애도하는 조가가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고인에 대한 생각으로 장충체육관을 메운 관중과 전국 각지에서 모인 어머니 배구 선수들이 숙연해졌습니다. 그러다가 정렬해 있던 선수 중 누군가 흐느끼기 시작하였고, 그 흐느낌이 전 선수들에게 번져 급기야는 체육관 전체가 울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육영수 우상화 내지 신격화는 그 주변에 권력이 몰리게 됐음을 의미한다. 이 점은 그에게 별도의 비자금이 모여든 사실로도 알 수 있다.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국제기구소위원회가 1978년에 펴낸 <한미관계 보고서>에도 언급됐을 정도로 그는 상당한 액수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었다.

도널드 프레이저 소위원장의 이름을 따서 <프레이저 보고서>로도 불리며 '악당들의 시대'라는 부제목도 붙은 이 책은 "1970년경에는 이후락·김성곤·김형욱이 각각 축적한 개인 재산이 1억 달러에 달한다고 어느 청와대 고위급 관리가 주장했다"면서 이런 사실을 알려준다.

"본 소위 청문회에서 선서를 거친 증언에서 김형욱은 김성곤이 걷은 정치자금 가운데 75만 달러를 개인적 용도로 보관했다고 진술했다. 그는 박 대통령과 박의 부인, 정일권, 이후락, 박종규 등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비슷하게 제공된 자금들도 김성곤이 보관했다고 증언했다."

여기 언급된 1억 달러(약 1283억 원)나 75만 달러(9억6247만 원)는 1970년대 화폐 가치다. 50년 전의 이야기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미국 의회가 파악한 바에 따르면, "박의 부인"에게도 개인적 용도로 쓰이는 상당 규모의 비자금 통로가 있었다. 정일권·이후락·박종규가 보유한 것과 비슷한 규모의 비자금을 육영수가 갖고 있었다는 것은, 국민들의 눈에 비쳐지지 않는 곳에서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막강했음을 의미한다고 볼 수밖에 없다.

대통령 부인은 대통령의 후광을 배경으로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영부인이 과도한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되면, 단순히 관심을 끄는 차원에 그치지 않고 돈과 사람들까지도 몰릴 가능성이 커진다. 이것이 과해지면 영부인이 초헌법적인 권력을 갖게 될 여지도 많아진다.

대통령에 대한 견제 수단은 헌법에 규정돼 있지만, 영부인과 관련해서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영부인이 공적 영역에 과도하게 침투하게 되면, 견제받지 않는 권력 행사의 가능성이 그만큼 많아질 수밖에 없다. 한국이 한때 '영부인배를 쟁탈하는 사회'였던 것은 영부인의 공적 활동이 과도하게 많아지고 그로 인해 돈과 사람이 그 주변에 모여든 결과였다고 평할 수 있다.
#김건희 #대통령 부인 #대통령 영부인 #영부인 리스크 #육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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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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