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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술집, 기념관까지... '노조' 이름 가진 호주 동네

[캐러밴으로 돌아보는 호주 31] 호주 노동당의 산실 바칼딘(Barcaldine)

등록 2022.08.10 13:54수정 2022.08.10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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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여운 캥거루 가족이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 이강진

 
볼거리도 많고 자부심도 강한 작은 동네 윈톤(Winton)을 떠난다. 또다시 지평선이 펼쳐지는 도로가 계속된다. 산이 많은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풍경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다. 숲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가축 사육과 밀 농사를 위해 인위적으로 조성한 초목이다. 끝이 보이지 않도록 넓은 지역을 개간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지평선을 가로지르며 두어 시간 운전해 롱리치(Longreach)라 불리는 도시에 도착했다. 시내 한복판에는 주차할 장소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사람으로 붐빈다. 높은 빌딩이 보이지 않는 것만 제외하면 여느 대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는 전형적인 도시 풍경이다. 사람으로 북적이는 도시에서 지내고 싶지 않다. 이곳에서 지낼 생각을 포기하고 가까운 다음 동네로 향한다.


시내를 빠져나오는데 활주로가 보인다. 대형 비행기도 이착륙이 가능한 큰 비행장이다. 비행장에는 콴타스 항공사 전시장도 있다. 잠시 구경하고 싶으나 캐러밴을 끌고 들어가기에는 주차장이 비좁다. 천천히 지나치면서 전시장을 바라본다. 제법 많은 관광객이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실 윈톤이 콴타스 항공사의 고향이지만 항공사 전시장은 사람이 많은 도시에 마련한 것이다.

내가 캥거루를 보는지, 캥거루가 나를 보는지

또 다시 지평선을 가로질러 아담한 동네, 바칼딘(Barcaldine)에 도착했다. 이곳에서는 큰 야영장 대신 아담하고 작은 곳을 택했다. 야영장에 도착하니 서너 마리의 말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담장 너머로 고개를 내밀고 기웃거리는 말들이 정겹다.

야영장에서는 식당도 운영한다. 식당 이름(Rose and Things)이 예쁘고 정감이 간다. 이름에 걸맞게 장미와 다양한 꽃으로 둘러싸인 야외 식당에는 손님이 많다. 대부분 곱게 차려입은 동네 할머니들이다. 할아버지는 보이지 않는다. 분위기 있는 정원에서 테이블 하나 차지했다. 늦은 점심을 주문한다. 젊은 부부가 최근에 야영장과 식당을 시작한 모양이다. 주인 여자가 동네 이야기도 해주며 매우 반긴다.

식사를 끝내고 근처에 있는 관광안내소에 가 보았다. 안내소에 들어서니 관광객은 보이지 않고 직원 두 명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직원이 반갑게 맞이한다. 필요 이상으로 많은 안내서를 건네주며 마을 자랑이 끝나지 않는다. 내일은 동네에서 경마 대회가 열린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도박이라고 생각하며 멀리했던 경마를 호주 사람들은 무척 즐긴다.


내륙 한복판에 있는 동네다. 낮에는 햇볕이 강하고 덥다. 야영장에서 말을 쓰다듬기도 하며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대낮의 열기가 어느 정도 수그러든 오후, 근처에 있는 산책로를 찾았다. 산책로가 시작되는 입구에는 놀이터를 비롯한 운동 시설이 설치되어 있다.

그중에 시선을 끄는 것은 자전거도로다. 이곳에는 실제 도로에서 만날 수 있는 교통표지판들이 줄지어 있다. 횡단보도, 정지 그리고 기차 표지판까지 보인다. 교통안전 교육을 위해 조성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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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에게 교통 안전에 대한 관심을 갖게하는 축소하며 만든 도로. ⓒ 이강진


산책로를 걷는다. 산책로를 따라 강이 흐른다. 하지만 수량은 많지 않다. 우기가 시작되지 않아서일 것이다. 물가에 두루미처럼 생긴 크고 하얀 새 한 마리가 서성이고 있다. 캥거루도 많다. 대부분의 캥거루는 나를 흘깃 본 후 숲으로 뛰어간다. 그런데 한 캥거루 가족은 움직이지 않고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엄마와 함께 있는 캥거루와 시선을 마주친다. 내가 캥거루를 구경하는 것인지, 캥거루가 사람을 구경하는 것인지 헷갈린다.

오늘은 관광안내소에서 받은 지도를 들고 동네를 둘러본다. 많은 캐러밴과 여행객이 오가는 도로는 관광객의 시선을 사로잡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 동네를 자랑하는 동상과 벽화가 도로변에 즐비하다. 오래된 카페 건물 앞에는 오래된 피아노도 있다. 두들겨 보니 음정은 정확하지 않다. 그러나 소리는 난다. 카페 분위기가 피아노 때문에 살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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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자랑하는 모자이크 건물 ⓒ 이강진


동네에는 오래된 건물도 많다. 골목으로 들어가면 큼지막한 표지판이 세워져 있는 건물이 줄지어 있다. 건물을 소개하는 표지판이다. 대부분의 건물은 1800년 초에 건축한 것이다. 무성 영화를 상영했다는 극장, 외관을 모자이크처럼 처리한 빌딩 등 특이한 빌딩이 줄지어 있다. 지금은 문화유산으로 보존하고 있는 건물들이다.

사거리에 있는 오래된 시계탑에 가본다. 시계탑 아래에는 1차 세계대전에 참석했던 동네 사람들의 이름이 빼곡히 쓰여 있다. 전쟁에서 희생된 군인을 추모하는 탐이다. 시계탑 뒤로 1917년도에 만들었다는 풍차(wind mill)가 늠름한 모습을 자랑한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대형 프로펠러는 천천히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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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한복판에 세워져 있는 시계탑. 그 뒤로 풍차가 보인다. ⓒ 이강진


죽은 나무를 동네 한복판에 모시는 이유

기차 정거장도 보인다. 대륙을 달리는 기차가 쉬어가는 정거장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정거장 앞에 있는 죽은 나무다. 초라한 나무와 어울리지 않게 나무 주위를 웅장하게 장식해 놓았다. 바닥은 대리석이 깔려있다. 지붕에는 수많은 나무 조각이 매달려 있다. 천장 높이가 18m라고 한다. 나무 조각은 바람에 흔들리며 소리를 낸다. 깊은 산속 절에서 나는 풍경소리를 연상하게 한다. 관광객들은 카메라를 들고 나무 주위를 둘러보고 있다. 

무슨 이유로 이 나무를 신성하게 모시고 있을까. 설명서를 읽어본다. 오래전 1800년대 말, 이곳에서 양털 깎는 노동자를 중심으로 노조를 형성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나무 아래 모여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런데 누군가 독을 풀어 나무를 죽였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나무의 상징성을 포기하지 않고 이곳으로 옮겨 당시를 기억하고 있다.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다 체포된 18명 지도자 이름도 동판에 새겨 이곳에서 기념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동네에는 노조(Australia Workers Union) 기념관도 있다. 호주 사람들의 사랑방이라 할 수 있는 술집(Pub)에도 노조(Union)라는 이름이 들어가 있을 정도다. 호주의 대표적인 정당, 노동당(The Labour Party) 창당에 이 작은 마을이 기여했다는 자부심이 어느 정도 강한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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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네의 최대 자랑거리 지혜의 나무. ⓒ 이강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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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 이름에도 노조(Union)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동네. ⓒ 이강진


호주에 처음 왔을 때 호주는 노동자의 천국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노동자에 대한 처우가 좋기 때문이다. 처우가 좋은 이유는 다방면으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호주에서는 교사와 경찰도 파업하면서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나라다. 호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던 나도 파업에 동참한 경험이 있다.

지금 정권을 잡은 여당은 노조 출신이 많은 노동당이다. 호주 총리 중에는 노조 위원장(Australian Council of Trade Union-ACTU)출신도 있다.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기 때문이다. 엉뚱한 생각이 떠오른다. 한국에서 노조 위원장이 노동자의 권리를 대변하겠다며 대통령에 출마한다면, 아직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노동자의 천국은 주어진 것이 아니다. 많은 어려움을 이겨낸 노력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어디선가 들은 말이 떠오른다. 천 번 생각하는 것보다 한 번의 실천이 중요하다는 말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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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벽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 ⓒ 이강진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호주 동포 신문 '한호일보'에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호주 #퀸즐랜드 #BARCALD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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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서 300km 정도 북쪽에 있는 바닷가 마을에서 은퇴 생활하고 있습니다. 호주 여행과 시골 삶을 독자와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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