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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안 들으면 너도 저렇게 된다'... 여인숙에서 느낀 공포

[납북귀환어부 이야기] 해부호 선원 이종만씨

등록 2022.11.24 04:53수정 2022.11.24 0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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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만씨는 함경남도 함주군 선덕면 하도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 당시 하도라는 마을에 있던 비행장 공습으로 가족 대부분이 몰살당했다고 한다. 산달이 가까웠던 어머니와 동생은 북에 남겨두고 부친과 이씨만 남한으로 피난 내려와야 했다. 결국 그 길로 어머니와 동생은 끝내 만나지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경주 감포에서 피난 생활하며 그곳에서 부친은 오징어 배 선원으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전쟁이 끝나고 강원도 주문진으로 이사했지만 얼마 되지 않아 부친은 돌아가셨다. 이씨 나이 10살때였다. 이후 이씨는 속초에 있는 친척 집에 들어가 생활했다. 어린 나이였지만 공부는 꿈도 꾸지 못한 채 그저 생계에만 몰두해야 했다.

17살 때 속초에 있던 원산조선소, 제일조선소, 동해조선소, 동명조선소 등에서 페인트공으로 일을 시작했다. 목선에 페인트칠하는 것이었는데 그곳에서 배를 건조하다가 18살 때부터 배를 탔다. 배를 타는 것이 돈을 더 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21살 되던 해에 지금의 아내를 만나 결혼했다.

이씨는 1968년 8월 군에 입대해 1971년 8월에 만기 제대했다. 대부분의 군에 다녀온 남자들처럼 공병대에 있으면서 진부령 공사나 한계령 확장공사에 동원되어 그 길을 닦았다며 군 생활의 기억을 자랑스러워했다.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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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북귀환어부 이종만씨와 자료를 보며 인터뷰하고 있다. ⓒ 변상철


이종만씨는 군에서 제대한 뒤 아내와 딸을 먹여 살리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고, 결국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오징어 배를 타기로 했다. 1971년 8월 납북될 당시의 상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해부호를 타고 하루 작업을 나갔는데 고기가 없어서 거의 잡질 못했어요. 빈손으로 돌아오자 선장이 '내일은 이틀 식량을 싸가지고 오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틀 작업치 도시락을 싸서 다시 출항을 했죠. 그런데 그렇게 작업을 하러 나가자마자 납북되었어요. 납북될 때 날씨가 아주 좋지 않았어요. 파도가 심했고 비가 와서 시야가 좋질 않았거든요."

선원들은 파도가 심해 조업을 중단하고 선실에 들어가 있었다. 이씨 역시 선실에 누워 있던 있었는데, 갑자기 배가 앞뒤로 크게 요동쳤다. 놀란 선원들이 선실 밖으로 나와 보니 커다란 북한 함대가 떠 있었다고 한다. 급한 마음에 이씨는 가지고 있던 주민등록증에 구멍을 뚫고 낚시 추에 주민등록증을 매달아 바다로 던졌다.

신원이 노출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감과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에 잡히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고 한다. 다행히 납치 당시에는 강압적인 분위기 외에 별다른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곧바로 북한으로 끌려가 석암휴양소라는 곳에 1년여간 억류됐다.

언제 살아 돌아갈지 모르는 상황은 이씨를 포함해 납북어부들을 매우 초조하게 만들었다. 특히나 두 번의 귀환 예정이 모두 미뤄지면서 남한에 처자식을 두고 온 이씨로서는 자신들을 억류하고 있는 북한 정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결국 이씨는 참지 못하고 북한 사람들에게 저항했다.
 
"두 번 내보내 준다고 했다가 두 번 다 취소가 된 거예요. 그러니 마음이 얼마나 상했겠어요. 한 번은 술을 주더라고요. 그래서 그 술을 받아먹고 술김에 평양을 가겠다고 했어요. 그리고 곧장 석암휴양소를 나와서 한참 걸어갔죠. 가다 보니까 군인 지프차가 와서 내 앞에서 서더니 나를 잡으려고 해요. 그래서 나도 연필 깎는 칼을 꺼내서 '나 잡으면 죽여버릴 거야' 하며 한참 실랑이를 벌였어요.


그렇게 저항하니 결국 북한 군인이 권총을 꺼내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쏴' 하고 소리쳤죠. 그러다가 결국 붙잡혀서 지프차에 실려 왔어요. 잡혀 오는 길에 '왜 쏘지 안 쐈느냐'고 했더니 총알이 아까워서 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날 이후로 나는 단식을 하면서 버텼어요. 강제로 밥을 먹이려고 해도 먹지 않고 며칠을 버텼어요."

이와 같은 선원들의 소동은 비단 이씨뿐만 아니라 납북되었던 선원 여러 명의 증언을 통해 확인되었다. 특히나 장기간 억류되었던 선원들의 경우에 그 저항이 더욱 심했다고 한다.

그렇게 기약 없던 귀환은 1년가량 지난 1972년 9월 7일 갑작스럽고 신속하게 이뤄졌다. 어느 항구였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항구에 정박해 있는 해부호에 승선하고 잡혀 올 때 입었던 옷으로 환복한 뒤 북한 담배 등을 선물로 받아 귀환했다고 한다.

완전히 겁에 질려버렸다

속초항에 들어서자 대기하고 있던 버스에 승차하고 속초시청으로 이동했다고 한다. 백여 명 넘는 선원들은 그곳에서 일주일 이상 조사를 받았고, 추석 전날 즈음에 한 무리는 석방되었고 한 무리는 구속되었다고 한다. 이종만씨는 구속된 무리에 속해 속초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되었다.

이씨 역시 속초시청에서 조사받을 때 다른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속초시청 건너편의 여인숙에서 조사를 받았다. 조사는 둘째 날부터 시작되었다. 형사가 선원 몇 명을 호출하면 따라가게 되는데 장소는 시청 건너편 여인숙이었다. 방이 마당을 중심으로 양쪽으로 늘어진 구조의 여인숙으로, 여인숙 방 입구마다 장작이 쌓여있었다.

형사를 따라가는 동안 방문이 열린 여인숙방을 보게 되었는데, 얼굴에 수건이 씌워진 채 누워있는 사람에게 주전자로 물을 들이붓고 있는 장면을 보았다고 한다. 그리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에게 장작으로 구타까지 했다고 한다. 동행하던 형사가 그런 장면을 보는 이씨에게 '봤지? 말 안 들으면 너도 저렇게 된다'고 겁을 주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고문소리, 비명소리가 들리는 곳을 지나가는 이씨는 완전히 겁에 질려버렸다고 한다.
 
"(여인숙에 들어서자) 지령받은 걸 얘기하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 미치겠더라고요. 뭘 알아야 자백을 하죠. 차라리 두들겨 패고 들어가 하면 맘은 편하잖아요. 가지지도 못한 아이를 낳으라고 하는 꼴이잖아요. 모른다고 했더니 수사관이 똑바로 안 할래 하면서 겁을 주더라고요.

나는 그렇게 고문당하지 않았지만 선장 기관장들은 시청 강당에 들어올 때 기어들어왔어요. 우리가 군사분계선이 어딘지 어떻게 알고 넘었는지 어떻게 알아요. 바다에 부표 표시도 없어요. 우리가 월선했는지도 모르는데 경찰에서 하도 겁을 주고 다른 사람들 고문하는 것 보니까 수사관들이 인정하라는 대로 인정한 거죠."

이씨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석방되었다. 이씨는 한동안 오징어 배를 탔지만 언제 다시 납북되거나 수사기관에 잡혀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결국 1979년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로 올라왔지만 공안 수사관들의 감시는 그곳까지 미쳤다고 한다. 집에 찾아온 수사관은 근황을 물어보며 주변을 감시했다. 한 달에 한 번씩 직장으로 찾아오는 수사관 때문에 직장 동료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몇 년간의 감시에 아내와 가족들의 상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고 한다.
 
"납북귀환어부라는 것 때문에 피해를 엄청 봤어요. 일단 내가 납북되고 나서 조사받고 풀려나올 때까지 아내가 아이들 먹여 살리려고 생선 팔고 옷 팔러 다니고 했다고 해요. 내가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죄인 아닌 죄인 같더라고요. 아기 업고 생선 들고 다니면서 팔면서, 길가에서 아이들 젖먹이며 장사했다는 소리를 들으니 억장이 무너지더라고요.

죄 없는 사람 유치장에 가두고 우리 가족을 왜 고통받게 했습니까. 고통받게 한 사람은 한 사람도 처벌받지 않고 우리 가족만 고통받는다면 너무 억울한 것 아닙니까?"

이씨는 여전히 연좌제가 폐지되지 않고 살아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자신의 전과 경력이 아들 딸뿐만 아니라 손자들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걱정에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라고 한다. 이씨가 간절히 바라는 대로 진실규명이 되어 마음 편히 잠을 이룰 수 있는 날이 언제가 될지 막막하기만 하다.
#평화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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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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