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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미카제 특공 직전 '대기명령'... 96세 노인의 간절한 바람

[일본史람] '조국 위해' 의미는 뭐였나... 니와츠키노씨 "인재들이 허망하게... 전쟁만은 안 돼"

등록 2022.09.03 11:42수정 2022.09.0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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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와츠키노 히데키(96) 씨 인터뷰를 마친 뒤 자택 정원에서 ⓒ 박광홍

 
니와츠키노 히데키(庭月野英樹, 96)씨는 한국인 기자의 방문을 반겼다. 한일관계에 대해서도 먼저 말을 꺼낸 것은 니와츠키노씨였다.

"일본인의 조상들은 중국과 한반도에서 건너왔습니다. 그러니 우리 입장에서 한국은 선조의 나라인 셈입니다."

분위기는 무척 화기애애했다. 한국인이라는 사실만으로 환대를 받으니 되레 필자가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이야기가 전쟁 체험에 관한 내용으로 접어들면서 니와츠키노씨의 밝은 표정도 금세 어두워졌다. 해군항공대 파일럿으로 아시아 태평양 전쟁에 참전했던 그는 전쟁 말기에 가미카제 특공을 명령받았다.

"지나사변(중일전쟁)이 일어났을 때도 똑똑히 기억합니다. 동네에서 출정병사가 나갈 때면 일장기를 흔들며 환송했습니다."

니와츠키노씨가 유년기였던 시절부터 그의 조국 일본은 전쟁 중이었다. 학교에서는 교육칙어 봉독을 비롯한 천황숭배 교육이 이뤄졌고, 중학교에 들어가서부터는 교련이 실시됐다. 학교에서 총검술을 배우며, 니와츠키노씨는 언젠가는 자신도 전쟁에 나가게 되리라 여겼다.

애국이라는 것, 충성이라는 것

그리고 1941년 12월, 제국 일본은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하는 전면전에 돌입했다. 거듭되는 승전보에도 불구하고 니와츠키노씨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과연 미국과 같은 큰 나라를 상대로 이길 수 있을까. 이 전쟁의 결과에 따라 일본인들이 모두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깊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애국과 충성은 그가 전 생애를 걸쳐 내면화해온 최고의 미덕이었다. 그는 일본민족이 전멸하느냐 마느냐의 싸움에 자신도 힘을 보태야 한다고 생각했다. 육군조병창에서 일하던 그는 어렵사리 1943년 4월 나가사키 항공기승원양성소(長崎航空機乗員養成所)에 13기 조종생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의 나이 17살 때의 일이었다. '결전의 대공으로'라는 선전문구에 설레곤 하던 니와츠키노씨는 드디어 자신이 나라를 위해 비행기를 몰고 전쟁에 나갈 수 있게 됐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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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와츠키노씨와 동기들 나가사키승원양성소에 입교한 1943년 4월에 촬영된 사진. 가장 오른쪽 아래에 앉아있는 것이 니와츠키노씨다. 사진에 점이 찍혀있는 동기들은 전쟁 중 전사했다. ⓒ 박광홍

 
그러나 환상과 현실은 달랐다. 나가사키 항공기승원양성소 시기의 기억은 구타로 점철된 것으로 남게 됐다. 니와츠키노씨와 그의 동기들은 온갖 구실로 '빠따'를 맞았다. 매일 반복되는 매질은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심지어는 비행 연습 중인 상공에서까지 매가 날아들었다. 당시의 구타를 회상하는 니와츠키노씨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모두가 맞는 생활이었으므로 불만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고 그는 말한다. 군인을 천황의 '신하' '수족'으로 규정하고 복종과 헌신을 요구하는 '군인칙유'(軍人勅諭)를 암송하며, 니와츠키노씨는 군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굳혀갔다. 오직 사명감만으로 10개월 간의 험난한 교육과정을 수료한 그는 1944년 2월 정식으로 파일럿이 돼 히메지해군항공대(姫路海軍航空隊)로 배치됐다.

곧이어 두 달 뒤 오키나와해군항공대로 전출된 그는 아름다운 절경과 맛있는 음식들을 즐기며 들뜨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제국 일본의 전쟁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각지에서 전해져오는 '옥쇄' 소식을 들으며, 니와츠키노씨는 스스로의 비극적 운명을 직감했다고 한다. 오키나와에 대한 미군의 대규모 공습이 이뤄져도 일본군이 여기에 제대로 대항조차 못하던 현실은 그 운명을 방증하고 있었다.

"영영 이별이겠지..." 

1945년 3월, 니와츠키노씨는 또다시 전출명령을 받았다. 오키나와를 떠나는 길, 친하게 지내던 전우 하나다의 배웅을 받았던 기억을 떠올리는 니와츠키노씨의 목소리는 무겁게 내려앉았다.

"동기 하나다가 공항까지 배웅해줬는데요. '그동안 서로 참 많이 신세를 졌구나. 아마 이것으로 영영 이별이겠지'라고 말하더군요. 참 좋은 녀석이었는데......"

니와츠키노씨가 오키나와를 떠난 직후, 미군은 오키나와에 상륙했다. 처절한 전투 속에서 오키나와해군항공대는 전멸했다. 동기 하나다의 말대로 그날의 작별은 영원한 이별이 됐다. 그러나, 니와츠키노씨는 오키나와 옥쇄 소식을 들으면서도 전우들의 죽음을 슬퍼할 여유조차 없었다고 말한다.

전쟁지도부는 패전으로 치닫는 현실 속에서 일선 장병들의 끝없는 헌신만을 요구할 뿐이었다. 그 속에서 개인적인 희로애락은 사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폐허가 된 일본 국토를 내려다보며 니와츠키노씨는 일본을 구해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니와츠키노씨가 가미카제 특공대로 처음 배치된 것은 1945년 5월의 일이었다. 특공대 배치는 지원이 아닌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니와츠키노씨는 열악한 성능의 연습기가 특공기로 투입되는 것에 당혹감을 느꼈으나, 그럼에도 동요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특공에 나가는 것이 일본 전 국민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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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함께 (1944년 9월) 니와츠키노 씨는 6남매의 장남이었다. ⓒ 박광홍

 
1945년 8월 15일 '특공' 투입 명령, 그리고...

6남매의 장남이었던 니와츠키노씨는 어린 동생들을 생각했고, 그들과 같은 또래의 일본의 어린이들을 생각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게 되면 그 아이들이 모두 죽고 만다는 생각이 특공대 투입을 수긍하게 만들었다. 자기 자신의 몸을 던져서라도 그는 일본에 닥쳐올 파멸을 막고 싶었다. 동기가 특공에 출격해서 미군 구축함을 들이받고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그는 자기 자신도 특공에 성공할 수 있기를 염원했다.

다시 배치된 부대에서는 신형 정찰기 사이운(彩雲)을 몰게 됐지만 특공대원 신분은 변하지 않았다. 전우들이 차례로 특공 출격하는 것을 지켜보며 니와츠키노씨는 곧 자신의 차례가 오리라 여겼다. 그리고 1945년 8월 14일, 그는 다음날 특공에 나갈 것을 명령받았다.

8월 15일 운명의 날이 밝았다. 타고나갈 특공기를 살펴보는 그의 마음은 백지에 가까웠다. 심지어는 남겨질 부모님에 대한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고 한다. 모두를 위해 반드시 특공에 성공해야 한다는 강박감은 그의 의식을 완전히 잠식했다. 그렇게 홀려있던 그에게 갑작스럽게 대기 명령이 떨어졌다. '천황 폐하'의 '중대발표'가 예정되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영문도 모른 채 부대원들과 함께 라디오 앞에 선 니와츠키노씨는 생전 처음으로 천황의 목소리를 들었다. 천황은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기 어려운 것을 견디며"라고 말했다. 잡음이 심했던 탓에 내용 전체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천황이 항복을 선언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했다.

모든 것이 뒤집어졌다. 장병들 역시 혼란의 도가니에 빠졌다. "우리끼리라도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는 강경론자마저 있었다. 결국 니와츠키노씨에게 내려진 특공명령은 보류만 된 채로 끝내 취소되지 않았다. 그렇게 8일 간의 혼돈을 감내한 끝에, 비로소 부대는 해산됐다. "조국 부흥에 힘쓰라"는, 그동안의 비극적인 전쟁체험을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간결하고 무책임한 상관의 한마디를 끝으로 그의 전쟁은 끝났다. 그의 나이 19살이었다.

니와츠키노씨는 지금도 전우들이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생각한다. 그 부채의식 때문일까. 그는 전후에 조직된 자위대에 투신해 청춘을 다 보냈다. 그는 전우들의 몫까지 나라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일본은 폐허와 궁핍의 시대를 지나 고도경제성장기를 맞았다.

"맛있는 걸 먹을 때도 항상 생각합니다"

전쟁, 그리고 특공. 과연 니와츠키노씨와 전우들이 감당해야 했던 멍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일본이 누리게 된 평화와 번영이 전사한 전우들의 덕이라고 믿는 것으로, 니와츠키노씨는 절망과 허무를 누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필자와 함께 과일을 먹던 중, 갑자기 눈시울을 붉히며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맛있는 것을 먹을 때도 항상 생각합니다. 죽어간 전우들도 이 맛을 볼 수 있다면 좋을텐데. 정말 우수한 인재들이, 정말 좋은 사람들이 죽어갔습니다. 일본을 위해, 세계를 위해 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전쟁으로 인해 허망하게 죽고 말았습니다. 전쟁만은, 전쟁만은 절대로 다시는 해서는 안 됩니다."

두 번 다시 전쟁은 안 된다는 니와츠키노씨의 희망은 과연 지켜질 수 있을까. 인터뷰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요동치는 세계 질서와 동북아 정세를 떠올리며, 나는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을 느꼈다.

[관련 기사]
"충성 빛나리"... 자국민 죽음 내몬 일본의 끔찍 '신화' http://omn.kr/1vg2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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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공항 근처의 일본군 엄폐호 앞에서 필자와 함께 현재 니와츠키노씨가 거주하고 있는 미야자키시 역시 전쟁 당시 특공대가 출격하던 곳이었다. ⓒ 박광홍

#일본군 #가미카제 #특공 #전쟁체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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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영논리에 함몰된 사측에 실망하여 오마이뉴스 공간에서는 절필합니다. 그동안 부족한 글 사랑해주신 많은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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