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9.14 07:09최종 업데이트 22.09.14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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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정굴 이야기>의 한 장면 1950년 고양 금정굴 학살 사건을 다룬 <금정굴 이야기> 중 한 장면 ⓒ 전승일

 
제19회 EBS 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이하 EIDF) 출품작인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금정굴 이야기>(감독 전승일)가 EBS 심의위원회의 '방송불가' 결정으로 방송이 취소되며 영화계 안팎으로 논란이 되고있다.

이에 <금정굴 이야기>를 연출한 전승일 감독과 영화·문화계는 연대 서명을 통해 방송불가 판정에 정면으로 항의했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박찬대·윤미향 국회의원도 EBS 측에 문제제기와 함께 <금정굴 이야기>를 지지하며 영화제가 막을 내린 지금까지도 논란이 잦아들지 않는 모양새다(관련기사: EIDF 단편 '금정굴 이야기' 방송불가 판정한 EBS http://omn.kr/20eoy).

일방적인 EBS의 방송불가 결정

1950년 고양시 금정굴 학살을 다룬 <금정굴 이야기>를 둘러싼 지금까지의 대략적인 사태 흐름은 이렇다. <금정굴 이야기는> 18분가량의 단편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으로 지난 8월 22일부터 28일까지 개최된 제19회 EIDF의 단편 화첩(Shorts Letters) 섹션에 출품되었다. 애초 <금정굴 이야기>는 8월 26일 EIDF 상영관 상영과 8월 28일 22시 50분 EBS 1을 통해 방송될 예정이었다.

그런데 EIDF 측은 8월 18일 EIDF 홈페이지 공지사항을 통해 일말의 설명도 없이 '방송사의 사정'으로 8월 28일 <금정굴 이야기>의 방송이 취소되고 다른 출품작인 <#체인지더네임>이 방송된다고 공지했다. 
 

EIDF 방송 편성 공지사항 EBS는 공지사항에서 <금정굴 이야기>의 방송이 취소되고 다른 출품작인 <#체인지더네임>으로 방송이 대체되었다고 발표했다. ⓒ EIDF

 
이후 8월 23일 전승일 감독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금정굴 이야기>가 EBS 심의위원회로부터 '방송불가' 결정을 받은 사실을 알렸고 다음 날인 8월 24일 방송불가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을 공개했다.

이 성명에 따르면 '방송불가'의 핵심적인 이유는 영화 전반부의 "한국의 군대와 경찰은 1950년 7월부터 10월까지 최소 10만 명의 민간인을 아무런 재판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학살했으며, 미군은 이를 묵인·방조했다"라는 자막이 있는 장면 때문이었다고 한다.
 

<금정굴 이야기> 방송불가에 대한 EBS의 입장문 EBS측은 <금정굴 이야기>가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와 제14조(객관성)를 충족하지 못해 방송이 불가하다는 입장을 공개했다. ⓒ EBS


이후 EBS 측은 8월 24일 심의 결과를 요약한 입장문을 공개했다. 입장문에는 <금정굴 이야기>가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와 제14조(객관성)를 충족하지 못해 방송이 불가하다는 내용이 짧게 설명되어 있다.

방송으로 대중과 만나기로 약속된 한 작품의 방송 편성을 전면 취소하는 중대한 판단의 사유라고 보기에 EBS의 입장문은 지나치게 주관적이고 두루뭉술했다. 현재까지 EBS는 <금정굴 이야기> 측의 성명 및 연대서명과 사회 각계의 비판에 대해 별도의 추가 입장을 내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EBS에 심의 관련 정보공개청구

정보공개센터는 EBS가 <금정굴 이야기>의 방송을 취소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를 확인하기 위해 EBS에 <금정굴 이야기>를 심의한 심의위원회 명단과 <금정굴 이야기>의 방송불가 결정이 있었던 심의 의결서 및 회의록을 정보공개청구 했다.

EBS 측은 이에 대해 지난 9월 8일 EBS 심의·시청자실 심의위원회 명단과 '특별합동심의결과'를 공개했다.
 

EBS 심의·시청자실 심의위원 명단 EBS측은 정보공개센터의 정보공개청구에 따라 <금정굴 이야기>를 심의한 심의위원 명단을 공개했다. ⓒ EBS


EBS가 공개한 심의위원 명단에 따르면 현재 EBS 심의위원회는 위원 전원이 25년 이상 EBS에서 근무한 내부 임원급 직원들이었다.

<지식채널e> <시대의 초상> <명의> 등을 제작했던 PD 출신 김현 심의·시청자실 실장, <세계테마기행> CP를 담당했던 김민 PD, 올해 EBS 사장 후보로 출마했고 EBS 콘텐츠기획센터장·콘텐츠사업단장·EIDF 집행위원장을 지냈던 류현위 위원, <생방송 60분 부모> <세상보기> 등을 연출했던 손복희 PD, EBS 미디어 상무이사를 지낸 송선자 위원, <다문화 고부열전>을 기획한 유무영 CP, 최혜경 전 방송제작본부 본부장 등 EBS의 주요 프로그램과 요직을 담당했던 인사들이 현재 심의위원이었다.


문제는 EBS 심의위원 명단이 아니라 다른 데 있었다. 심의위원들이 심의를 하긴 했으나 심의 결과물인 의결서나 회의록이 없었다. 입장문과 거의 유사한 내용과 수준의 '특별합동심의' 결과서만 있었다.

의결서나 회의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다. 심의위원별로 심의 대상에 대해 어떤 의견을 냈고 어떤 의견이 오고 갔는지, 심의실장을 포함한 8명의 심의위원들 중 몇 명이 방송불가 의견을 냈고 몇 명이 방송불가에 반대했는지 등의 정보가 기록되지 않았다. 심의 결과에 대해 신뢰가 의심 받는 상황에서 정상적으로 심의가 이뤄졌는지 확인하기 어렵다. 
 

EBS 특별합동심의 결과서 EBS측이 공개한 특별합동심의 결과서. 앞서 8월 24일에 공개한 입장문과 별반 큰 차이가 없었다. ⓒ EBS

 
EBS 측이 공개한 특별합동심의 결과서에 따르면 "일부 영상 구성이나 자막에 있어서 연출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고, 학살 이유나 배경 설명이 거의 없어 시청자들이 역사적 사실에 대한 객관적 이해가 어려운 점"과 "시대적 배경 및 내용을 설명하는 데 있어 필요한 객관적 자료 제시나 데이터에 대한 출처 표시 등이 부족한 점으로 인해 시청자들이 프로그램을 객관적으로 이해하는데 불충분한 점"이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제9조(공정성)와 제14조(객관성)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EBS의 특별합동심의 결과서에서 지적하는 내용은 EBS의 자체 제작 프로그램이 아닌 영화제 출품작들이 온전하게 충족시키기에는 애초에 무리가 있어 보인다. 영화제에 출품하는 작품들은 방송프로그램이 아니고 작가들이 주제 의식을 가지고 독창적으로 제작하는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금정굴 이야기>는 상영시간이 18분 안팎의 짧은 단편 작품이며 일반적인 다큐멘터리와 달리 기존의 금정굴 학살에 대한 기록영상들과 애니메이션 기법들을 혼합해 독창적인 이미지로 구성한 영화다. 이런 특징이 있는 <금정굴 이야기>가 심의위원회가 요구하는 기준을 충족하고 자료 출처와 정보를 영화에 넣으려면 결국 작품 형식과 개성을 포기해야 한다.

이번 <금정굴 이야기> 방송불가 결정은 EBS 심의위원회가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자체를 지나치게 형식적이고 협소하게 적용한 것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든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 협소하게 적용한 EBS 

또한 특별합동심의 결과서의 지적이 구체적이지 않은 것도 문제다. 방송하기에 부적합한 부분이 명확하게 존재한다면 해당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지적한 부분의 문제점을 방송 편성자와 제작자들이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자세하게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이번 특별합동심의 결과서는 이런 설명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지 않고 있다. 

이런 식의 심의 지적에 순순히 방송불가 처분을 납득할 창작자가 있을지 의문이다. <금정굴 이야기>를 연출한 전승일 감독과 영화·문화계가 영화제가 끝났는데도 계속해서 EBS 심의 결과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도 결국 이번 심의 처분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한국 사회는 해방 이후 한국 전쟁과 군부 독재를 거치며 문화·예술에 대한 사전 검열이 장시간 지속되었고 또 그만큼 긴 시간 표현의 자유가 억눌렸던 사회적 트라우마가 있다. 영화가 검열에서 벗어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이런 트라우마가 겨우 옅어질 무렵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이 리스트에 오른 인사들이 유무형의 압력과 불이익을 당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런 사회 맥락에서 납득할 수 없는 표현의 자유 제한은 결국 한국 사회와 예술인들이 겪었던 검열을, 블랙리스트의 존재를 거의 자동반사적으로 떠올리게 만든다.

표현의 자유를 다루는 EBS와 심의위원들이 이런 역사를 이해하고 있다면 최소한 방송불가 결정을 내릴 때는 그 표현의 자유가 방송에서 허용되지 않는 합리적인 이유를 무겁게 판단하고 모든 국민이 납득할 수 있도록 최대한 상세하게 설명해야 했다.

EBS 심의위원회의 방송불가 결정이 무색하게 <금정굴 이야기>는 여러 영화제와 페스티벌에서 크고 작은 상을 받고 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국제 영화제와 인도 카루크리트(Karukrit)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 단편 다큐멘터리 상을 수상했으며 LA 독립 단편 영화제에서는 최우수 웹 & 뉴미디어 부문에서 수상했다.

인도 뭄바이 국제 영화제에서는 애니메이션 부문 심사위원 특별상을, 체코 프라하 국제 영화제에서는 최우수 단편 다큐멘터리상을 수상했다. 또 지난 8월 18일부터 26일까지 개최된 제22회 서울국제대안영상예술페스티벌에서는 한국 작품상을 수상했다.

EBS는 이번 사태에 대해 제기된 사회 각계의 비판을 진지하게 검토하고 지금이라도 <금정굴 이야기> 측과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해명을 제시해야 한다. 또 종래의 심의 절차 또한 표현의 자유를 폭넓게 수용할 수 있도록 개선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정보공개센터 홈페이지에도 게시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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