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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기 짧은 옛 몽골의 수도, 그래도 방문하는 이유

[몽골여행기 19] 몽골 최초의 불교사원, 한때 승려 천 명이 거주했던 곳

등록 2022.09.13 13:54수정 2022.09.13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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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론으로 촬영한 에르덴조 사원과 카라코룸 시가지 모습. 에르덴조사원은 몽골 최초의 불교사원이다. ⓒ 신익재



고비사막을 돌아본 고조선유적답사단이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돌아가던 중 들른 곳은 카라코룸(하르허른). 13세기 세계 최대 제국을 세운 몽골의 옛 수도 인지라 대단한 모습일 거라는 추측 속에 도착한 카라코룸의 도시 모습은 실망스러웠다. 크기와 규모뿐만 아니라 남아있는 유적도 생각만큼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이 소비에트 시절에 세워진 카라코룸을 방문하는 이유가 있다. 16세기 유적인 에르덴조 사원과 박물관을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전망이 멋진 계곡 주변에 승마 트레킹 코스와 나이망호, 오르홍 후르흐레 폭포, 몽골 엘스로 알려진 모래 언덕이 있어 짧은 여행의 베이스캠프로 삼기 때문이기도 하다.

카라코룸의 역사

13세기 중반, 카라코룸은 활기찬 곳이었다. 1220년 칭기즈칸이 수도를 건설하라는 명령으로 세워진 카라코룸은 오고타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몽골 수도 건설로 카라코룸은 아시아 전역과 유럽의 상인, 고위 관리, 기술자들이 모여 사는 활기찬 도시였다. 카라코룸은 행정, 교역, 문화 중심지였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를 연결하는 접점이기도 했다.

40년간 번영을 누렸던 카라코룸이 저물기 시작한 시기는 쿠빌라이가 수도를 베이징으로 이전하면서부터다. 수도가 베이징으로 바뀌고 몽골제국이 몰락하면서 카라코룸은 버려졌고 1388년 복수심에 불탄 만주 군인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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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덴조사원 내에 있는 건물로 어디서 많이 본듯한 건축양식이다. 몽골의 건축은 한반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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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덴조 사원에 관광온 몽골인들이 전통복장을 입고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몽골전통 복장은 신분과 다양한 출신뿐만 아니라 계절과 라이프 스타일을 나타내기도 한다. ⓒ 오문수


카라코룸은 역사가 짧아 크게 번영할 수 없었다. 재미있게도 몽골인들은 카라코룸에 거의 살지 않았고 대부분 수 킬로미터 떨어진 스텝 지대의 게르에 사는 걸 선호했다. 때문에 이 도시에는 주로 장인, 학자, 종교지도자와 외국인 포로들이 살았다.

카라코룸의 특징은 4개의 성문이 있는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성문마다 시장이 있어서 동쪽에는 곡식, 서쪽에는 염소, 남쪽에는 황소와 사륜마차, 북쪽에서는 말을 팔았다. 몽골제국은 종교적 관용으로 유명하다.


몽골의 칸들이 모든 종교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던 도시에는 12개의 종교가 공존했다. 모스크, 불교사원,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교회가 몽골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경쟁했다. 심지어 오고타이의 아내와 쿠빌라이의 어머니 같은 권력자도 네스토리우스 기독교 신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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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덴조 사원 북서쪽 300m쯤에 있는 거북바위로 고대 카라코룸의 경계를 표사하며 시의 수호자 역할을 했다. 몽골에서 거북은 영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 ⓒ 오문수


에르덴조 사원 북문으로 나가 북서쪽으로 300m쯤 걸어가면 거북 바위가 있다. 예전에는 돌 거북 네 개가 고대 카라코룸의 경계를 표시하며 시의 수호자 역할을 했었다. 거북은 영원의 상징으로 여겨진 동물로 거북 등에는 비문이 새겨진 석비가 수직으로 세워져 있었다.

몽골 최초의 불교사원 에르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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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덴조 사원의 담벼락 모습. 15m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108개의 사리탑이 세워져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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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덴조사원 내에는 몇 개의 스투파가 있었다. ⓒ 오문수

 
1586년 알타이칸이 세운 에르덴조 사원은 몽골 최초의 불교 사원이다. 사원은 방치와 번영을 반복하다 1937년 스탈린의 숙청 시기에 완전히 문을 닫게 되었다. 에르덴조 사원은 비록 과거의 그림자만 남아있다 할지라도 아직도 많은 이가 찾는 중요한 사원이다.

경내에 60~100여 채의 사찰과 약 300채의 게르가 있었으며 전성기에는 승려가 1000명까지 거주했다. 사찰 건물은 단 3채를 제외하고 모두 파괴되었으며 수많은 승려가 죽임을 당하거나 시베리아 강제노동 수용소로 보내졌다.

주요 사찰 건물은 16세기에 지어졌다. 벽화, 탕카, 참 가면 등 공예품 대부분은 18세기에 만들어졌다. 사원은 벽을 따라 15m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108개의 사리탑이 서있다. 108은 불교에서 성스러운 숫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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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덴조사원 내에 있는 유적 모습. 전성기에는 60~100여 채의 사찰과 약 300여 채의 게르가 있었으며 승려가 1000명까지 거주했지만 스탈린의 탄압으로 거의 파괴되고 수많은 승려가 죽임을 당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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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덴조 사원 내에 있는 청동솥으로 라마승들에게 음식과 차를 끓였다고 한다. 가까이 있는 솥은 지름 178센티미터, 높이 68센티미터이고 두 번째 솥은 지름 198센티미터, 높이 62센티미터로 솥 겉면에는 상서로운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솥 겉면에는 꽃과 몽골문자가 새겨져 있었다. ⓒ 오문수


탕카는 탱화를 의미하며 티베트어로 '춤추다'라는 어원을 지니고 있는 종교가면극 '참'은 신에게 제사 지내고 재앙을 쫓는 종교 법회로 라마와 승려들에 의해 행해지는 불교 의식 무용이다.

1930년대에 파괴되지 않은 경내의 세 사찰인 부처조(Zuu of Buddha), 존 조(Zunn Zuu), 바롱 조(Baruun Zuu)는 각각 부처의 유년기, 청소년기, 성인기에 헌정한 것이다.

스탈린의 숙청으로 1937년에 완전히 문을 닫았던 사원은 1965년부터 종교적 숭배 장소가 아니라 박물관으로 전용되었다. 이후 1990년 공산주의가 붕괴되자 종교의 자유를 찾아 사원도 활기를 되찾았다.
덧붙이는 글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카라코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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