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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농담'을 남기고 안락사 선택하신 허 선생님께

[스위스 안락사 현장 동행기①] 잊을 수 없는 마지막 이메일

등록 2022.09.19 10:04수정 2022.09.19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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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란 책을 낸 후 못다한 이야기, 고인과의 추억, 소회 등을 나누고자 합니다. [기자말]
보고 계신가요, 허 선생님?

죽어서 유명해지는 생전의 무명 배우처럼, 선생님의 일생에서 스쳐 지난 적도 없던 이들조차 선생님을 애도하고 있네요. 조력사 현장에서 던진 선생님의 마지막 농담으로 인해 더욱.  (관련기사 :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서 내가 들은 기막힌 농담 http://omn.kr/20nq3)


지난해 8월 26일, 스위스 바젤에서 조력사 하신 선생님과 저의 이야기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가 한국 사회에 충격 어린, 그럼에도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마침 선생님의 1주기에 맞춰 책이 나와 그 의미가 더하네요.

한국인으로 세 번째 조력사 선택한 허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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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안락사 현장의 담당자조차 그곳에서 생을 마친 사람들 중에 선생님처럼 의연한 분은 처음 봤다고 하더라고요. ⓒ elements.envato

 
돌아가시던 날의 그 긴장감, 그 절박함, 그 두려움, 그 안타까움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게 된 것에 저는 안도합니다. 만약 제가 책을 내지 않았다면 평생 그 짐을 혼자 지고 가야했을 테니까요.

제가 선생님과 스위스에 동행한다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우려하며 말린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지요. 평생 그 기억을 가지고 살아야 할텐데 그걸 감당할 수 있겠냐는 거였지요. 가족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인도 아닌, 얼굴 한 번 본 적 없던 사람의 죽음길에 왜 신아연 작가가 동반해야 하냐며. 

선생님은 한국인으로서 세 번째 조력사를 택한 분이지만, 앞의 두 분에 대해서는 알려진 게 거의 없으니 세상에 드러나기는 선생님이 처음이라고 해도 아주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스위스 안락사 현장의 담당자조차 그곳에서 생을 마친 사람들 중에 선생님처럼 의연한 분은 처음 봤다고 하더라고요. 막상 거기까지 와서도 10명 중 6, 7명은 마음을 바꾸거나, 결행을 한다 해도 수 차례의 머뭇거림으로 두려움과 공포심을 감추지 못한다니, 선생님은 스위스에서도 특별한 사람으로 기억되실 것 같습니다.


스스로의 인생을 '아무리 재미있어도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책'에 비유하신 선생님, 그러나 정작 선생님은 이제 많은 이들의 가슴에 한 권의 책으로 남았습니다. 잊힐까, 아무도 그리워하지 않을까 안타까워 하신 선생님, 이제 그런 염려는 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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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8월 26일, 스위스에서 조력사한 세 번째 한국인과 동행한 저자의 체험기록 ⓒ Kim Ayoun

 
선생님은 한 권의 책이 되었으니까요. 육신은 수목장공원에 한 줌 재로 묻혀 있지만, 책이 된 영혼은 어디든지 자유로이 가실 수 있으니까요. 또한 선생님이란 책은 다시 읽고 싶지 않은 책이 아닌 '영원히 읽고 싶은 책'이 될 테니까요.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란 말의 의미를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조력사를 앞두고 있는 저 또한, 내일 죽는다고 해도 오늘 평소와 다른 무엇을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올릴 수가 없네요. 그저 하던 대로의 일상 그 이상은 없더군요.

어느 책에서 살 날이 며칠 남지 않은 시한부의 젊은 주부 이야기를 읽었는데, 죽기 전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것을 묻자, 가족을 위해 밥상을 차려주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그 소망을 이루고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주부로 살면서 밥하고 살림하는 일이 기쁘고 즐겁기만 했을 리는 없을텐데, 그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어쩌면 지겹기조차한 그 일상이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 된다는 것에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생각하게 됩니다.

저 또한 아침 일찍 사무실에 나와서 주변을 청소하고, 일과를 마친 저녁에는 각종 꽃과 나무, 채소를 보살피며 하루하루 자라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큰 기쁨이고 행복입니다. 건강하다면, 살 수만 있다면, 오래오래 이 일을 하고 싶습니다."

 
돌아올 수 없는 여행을 떠나기 전, 선생님이 제게 보내신 마지막 이메일을 다시 열어보며, 제게는 글 쓰는 일상, 그 이상의 소중한 것이 없음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선생님 또한 지금 계신 곳에서 새로운 일상을 만들고 계시겠지요?
#스위스 안락사 #조력사 #존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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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생. 이화여대 철학과 졸업. 저서 『스위스 안락사 현장에 다녀왔습니다』 『좋아지지도 놓아지지도 않는』 『강치의 바다』 『사임당의 비밀편지』 『내 안에 개있다』 등 11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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