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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데나 선 긋는 건 참 몹쓸 일

[완독 일기] 라우라 비스뵈크 지음 '내 안의 차별주의자'

등록 2022.09.30 08:17수정 2022.09.30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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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소값이 많이 올랐다. 장바구니에 넣었다 뺐다 하기를 여러 차례. 결국 식탁에 오르는 반찬은 그나마 가격이 만만한 콩나물, 팽이버섯, 두부 정도다. 이 밖에 채소는 추석 전에 비해 가격이 거의 두 배 정도 올랐다.

어디에서 사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내가 애용하는 곳에서는 그렇다. 장바구니에 물건을 담으면서 생각한다. 돈이 많으면 이런 고민을 하지 않겠지. 파프리카가 한 개에 3천 원이든 4천 원이든 그냥 먹겠지. 참고로 내가 파프리카를 사는 기준은 한 개에 2천 원을 넘지 않아야 한다.

이제 우유와 달걀을 고른다. 우유는 무조건 유기농이어야 하고, 달걀은 유기농에 동물복지 인증 마크도 있어야 한다. 가격은 따지지 않는다.

고기를 산다. 때로는 무항생제 국내산, 때로는 그냥 싼 거. 무항생제 고기를 살 때는 마음이 편하다. 저렴한 수입 냉동고기를 살 때는 불편하다. 경제 상황에 따라 마음이 편했다가 불편했다가 한다.

나의 장보기 패턴은 쉽게 말하면 선택과 집중이다. 한정된 자원으로 요리조리 골라서, 최대한 내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 장보기. 왜 우유와 달걀은 비싼 유기농을 고집하면서 파프리카는 그냥 싼 걸 사냐고 묻는다면 당연히 대답은 '돈이 없으니까'다. 그러니까 우유와 달걀은 친환경 식품에 대해 내가 쳐놓은 마지노선인 셈이다.

유기농 우유와 관련해서 두고두고 이불 킥을 하게 되는 경험이 있다.

"다른 건 몰라도 우유랑 달걀은 진짜 유기농을 먹어야 해. 일반 제품은 항생제가 얼마나 많이 들었겠어."

별생각 없이 이 말을 할 때만 해도 이게 얼마나 부끄러운 말인지 인식하지 못했다. 며칠이 지나 그 자리에 있던 지인의 집에 아이를 데리고 간 날, 아이가 우유를 마시고 싶다고 했다. 지인은 머뭇거리며 말했다.  

"유기농 우유는 없고 일반 우유밖에 없는 데 어쩌지? 주스 줄까?"

다시 떠올려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집에 유기농 우유가 없던 이유가 단순히 경제 상황이 아니라 다른 것일 수도 있다. 그 집은 우유가 아니라 친환경 양배추에 거금을 쓰는지도 모른다. 4천 원짜리 파프리카를 덥석덥석 집어 장바구니에 넣는지도 모른다.

내가 얼굴이 뜨거워졌던 이유는 내 속에 잠재돼 있던 경계 짓기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던 것 같다. 유기농 우유와 달걀 정도는 먹어줘야 건강식을 실천하는 사람이지. 여기에 우유와 달걀 정도는 좋은 걸 먹을 수 있다는 중산층(?) 같은 마인드가 숨겨져 있는 거였다면, 그건 정말, 땅굴을 파고 들어가야 할 일이다.

내가 쳐놓은 마지노선이 누군가에게는 저 멀리 까마득한 곳에 있는 것일 수 있다. 유기농 우유는커녕 우유 한 잔을 사기도 버거운 사람들이 있다. 또 다른 쪽에서는 친환경 매장에서만 장을 보는 사람들도 있다. 형편에 따라, 가치관에 따라 선택하고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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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안의 차별주의자 / 라우라 비스뵈크 / 심플라이프 ⓒ 김희연

 
<내 안의 차별주의자>에서는 경계 짓기의 기본이 '문을 걸어 잠그고 도덕적 우월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한다. 지구를 살리는 소비를 하자는 메시지는 의미 있지만 정작 그것을 실천하는 것은 교육 및 수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윤리적으로 정직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그에 앞서 '물질적 차이나 교육 수준의 차이가 도덕적 불평등'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정치에 대한 관심과도 연결된다. '나는 정치에 관심 없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특권이라는 것. 성별, 인종, 재산 등에서 일정 수준의 지위를 누려야 가능한 말이라는 것.
 
' 차별이나 억압 같은 무거운 주제들이 계속해서 현안으로 대두되면 따분하고 피곤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그 우는 소리 좀 그만 들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그들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안전을 위해 투쟁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본문 235p)     

나와 타인 사이의 경계 짓기는 불안감 때문에 생기기도 한다. 저자는 이민자를 예로 든다. 뉴스에서 이민자들의 범행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이라면 어떤 생각을 할 것인가. 누군가는 이민자들이 사회에 불안감을 조성하니 강력히 처벌하는 법이 필요하다고 말할 것이다. 또 다른 사람은 그들이 사회에 동화될 수 있도록 차별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할 것이다.

이민자들을 강력히 처벌한다고 해서 사회가 안전해질까? 그렇지 않다. 그들과 선을 그음으로써 자신은 그들이 아님을 확인하려는 욕망의 표현에 가깝다. 그 욕망의 근저에는 그들처럼 될까 불안한 마음이 깔려 있다. 실업 문제를 시스템적인 차원에서 보려 하지 않고 실업자들을 게으름뱅이라고 욕하는 데 열을 올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책은 일(Job), 성(Gender), 이주(immigration), 빈부 격차, 범죄, 소비, 관심, 정치 8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스스로를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생각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 날카로운 시선을 들이댄다.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독선에 일침을 놓는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를 가르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 우리의 도덕적 가치다.' 책을 다 읽은 지금의 내 모습은 책상에 선을 죽죽 그었다가 선생님에게 야단맞은 학생 꼴이다. 풀이 좀 죽어 있기도 하다. 이제 책상에 그어 놓은 선을 지우는 숙제를 해야 한다. 아무 데나 선 긋는 일, 참 몹쓸 일이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https://brunch.co.kr/@dd973cd3393846c)에 게재한 글입니다

내 안의 차별주의자 - 보통 사람들의 욕망에 숨어든 차별적 시선

라우라 비스뵈크 (지은이), 장혜경 (옮긴이),
심플라이프,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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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안 보일까봐 가끔 안경을 끼고 잡니다. 글자를 좋아합니다. 특히 남이 쓴 글자를 좋아합니다. 묘비에 '나 여기 없다'라고 쓸까, '책에 파묻혀 죽다'라고 쓸까 고민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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