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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슨 꽃담이냐고 나무라지 마세요

[꽃담여행⑤] 다양한 표정을 볼 수 있는 전남 해남 대흥사 꽃담

등록 2022.10.01 20:04수정 2022.10.01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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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미 산책의 일환으로 오래된 마을의 옛담여행, 오래된 마을의 옛집 굴뚝여행에 이어 이번에 옛집 꽃담, 절집 꽃담, 서원, 정원, 누정 꽃담, 궁궐 꽃담, 근대건축물 꽃담 여행을 하고자 합니다.[기자말]
해남 대흥사(대둔사)는 임란 이후 서산대사(휴정 1520-1604)가 의발(衣鉢)을 전한 이후 전기를 마련하여 18세기 이후 사세(寺勢)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그리고 해남 서정초등학교는 신영복 선생이 서정분교에 '꿈을 담는 도서관' 글씨를 전한 것을 계기로 폐교의 위기에서 벗어나 분교의 꼬리표를 떼고 서정초등학교가 되었다.

변방에서 소리 없이 변화를 거듭한 끝에 새로운 면모를 자랑하게 되었으니 역사적 중대성에서 차이는 있지만 어쩌면 둘은 닮은 듯 보인다. 신영복 선생의 책 <변방을 찾아서>는 선생이 쓴 글씨가 있는 곳을 찾아가서 그 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풀어낸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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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담는도서관’ 글씨 도서관 입구에 있지 않고 도서관 안 시계 위 창가에 있다. 아이들이 시계를 볼 때마다 이 글씨를 보면서 “내 꿈은 어디에다 담을까?” 생각했을 듯싶다. ⓒ 김정봉

 
책은 해남 송지면 서정리에 있는 서정분교에서 시작한다. 제목에 걸맞게 변방이어야 했고 크지 않은 글씨가 있는 곳을 우선하여 택한 것이라 밝히고 있다. 선생이 글씨를 써서 보낸 때는 2007년으로 서정분교는 전교생이 5명으로 줄어 폐교 직전까지 갔던 학교였다.


지역공동체의 중심 역할을 해온 서정분교는 선생의 글씨를 시발로 폐교의 위기를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서정분교에서 서정초등학교로 거듭났다. 물론 음악인 노영심의 도움과 글씨를 부탁한 미황사의 금강스님을 비롯한 마을사람들의 헌신적 노력이 있었다. 서정초등학교는 변방의 창조 공간이 된 것이다.

임란 이후 크게 흥한 절, 대흥사

해남에서 또 다른 창조의 공간으로 탈바꿈한 공간이 대흥사다. 대흥사는 중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바다 모퉁이, 그야말로 벽재해우(僻在海隅))에 자리한 변방의 작은 절이었다. 옛날에는 한듬절로 불렸다. 한은 크다는 뜻이므로 한듬은 대듬이 되었다가 다시 대둔(大芚)으로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절 이름 또한 대듬절, 대둔사가 된 것이다.

일제 때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대둔사는 대흥사(大興寺)로 바뀌었다. 이름을 되찾은 것은 1993년이지만 현재 대둔사와 대흥사를 둘 다 쓰고 있는 형편이다. 대흥사 이름으로는 옛 이름의 자취를 더듬어볼 수 없지만 1647년에 건립된 서산대사부도와 부도비, 1823년 간행된 <대둔사지>에 '대흥사' 이름이 나오므로 대흥사 이름에 민감하게 굴 필요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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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륜산 대둔사 절집의 문은 숲에 포근히 안겨 여기서부터 대둔사라 말한다. 일주문까지 10리가량 숲길이 이어진다. 경내에 있는 일주문인 두륜산대흥사(頭輪山大興寺)와 달리 옛 절 이름인 두륜산대둔사(頭崙山大芚寺)라 되어 있어 반갑다. ⓒ 김정봉

 
서산대사의 의발이 전해진 이후 대흥사는 이름 말마따나 크게 흥하게 된다. 선과 교는 다르지 않다며 선교양종의 통합을 이뤄낸 휴정은 숭유억불 속에서 조선불교를 중흥시킨 중흥조요, 임란 때 큰 공을 세운 승병장이었으니 그의 영향력은 막대하였다.

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마지막 설법을 한 후 열반에 들면서 제자 사명당 유정과 뇌묵당 처영에게 의발(승려의 전 재산인 가사와 발우를 말함)을 두륜산 대둔사에 두라는 유지를 내렸다. 불가에서 의발을 전하는 것은 자신의 법맥을 전하는 것을 뜻한다.


대사는 '두륜산은 벽재해우에 있어 명산은 아니나 만만세 동안 훼손되지 않을 지역이고 종통(宗統)이 돌아갈 곳'이라 하며 의발을 전하라 했다. 이와 같은 내용이 <보장록(寶藏錄)>에 기록되어 전하는데 '대둔사는 종통이 돌아갈 곳'이라는 데에 방점이 찍혀있다 하겠다.

대흥사 현창 운동은 18세기 말에 본격화된다. 계홍과 천묵스님, 대흥사 승려들은 1788년에 <보장록> 내용을 근거로 서산대사를 기리는 표충사를 건립하고 사당의 편액을 내려달라 조정에 요청하였다. 1789년 조정은 사당을 건립하고 정조는 친필편액을 써서 내려주었다.

표충사 건립에 앞서 1667년 북원을 중심으로 중창불사가 이루어고 그 다음 1811년 남원영역의 천불전이 건립됨으로써 대흥사의 윤곽이 잡혔다. 서산대사의 유의를 강조하며 선과 교의 종원(宗院)임을 표방한 대흥사는 순천 송광사와 겨루며 13종사와 13강사를 배출하기에 이르러 명실 공히 호남을 대표하는 절이 되었다.

다양한 표정의 부도밭 꽃담

'한국의 절들은 산에 붙어 자라는 숲과 같다'고 했던가. 구림리 장춘동의 숲은 절이 되고 절은 숲이 되었다. 얼추 숲 물이 빠질 즈음 다다른 곳은 선사들의 공동묘지, 부도밭이다. 서산대사부도와 초의선사의 초의탑까지 50여기의 부도와 14기의 부도비가 있다. 휴정에 대한 대흥사의 대접은 남다르다. 휴정과 법손(法孫)들을 대접하듯 부도밭 둘레를 꽃담으로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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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밭과 꽃담 부도밭은 서산대사를 비롯한 대사 법손들의 부도와 부도비가 빼곡하여 하나의 밭을 이룬다. 대사의 부도는 특별히 화려하게 치장하였다 부도밭을 감싼 담마저 꽃담으로 쌓아 대사를 극진히 대접하였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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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밭 꽃담 세부 식물문양과 사람얼굴문양을 번갈아 내고 사이에 선으로 기하학무늬를 놓아 빈 공백을 채웠다. 사람모양은 팔자눈썹을 하고 있으며 침묵하고 때로는 함박웃음을 짓고 있어 재미를 준다. ⓒ 김정봉

사각으로 다듬은 돌로 2단 쌓고 그 위에 면회하여 하얀 바탕에 꽃담을 기획하였다. 암키와와 평기와를 눕히거나 세워,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이는 여러 가지 모양을 자유자재로 연출하였다. 무시무종,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무늬가 반복하여 나타난다. 식물 문양과 사람 얼굴의 표정으로 변화를 주었으나 이 변화마저 영속한다.

북원(北院)의 순박한 꽃담

피안교와 일주문, 반야교를 지나면 해탈문이다. 다리-문-다리-문을 지나게 되는 경로인데 이제 다리를 건너야 할 차례인가. 발은 자연스레 두륜산에서 흘러온 금당천을 향한다. 거기에 북원영역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다리 심진교가 있다. 북원에는 심진교와 침계루, 대웅보전이 남북으로 나란히 배치되고 명부전, 응진전, 산신각, 백설당, 대향각이 안마당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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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영역 정경 대흥사는 절을 가로지르는 금당천을 사이에 두고 북원과 남원으로 나뉜다. 북원은 대웅보전이 있는 대흥사의 중심영역이다. 대웅보전은 1899년 소실된 후 1900년에 왕실의 도움을 받아 새로 지었다. ⓒ 김정봉

 
조선시대는 억불숭유로 사찰경제가 그리 넉넉지 못하였다. 꽃담을 쌓는데도 그 한계를 드러내 와편과 돌멩이를 재료로 사용했다. 돌멩이라 해봤자 다듬지 않은 천연그대로의 돌로 거친돌이 필요할 때는 산돌을, 맨질맨질한 돌을 원할 때는 강돌을 사용했다.

침계루벽체 꽃담은 맨 위의 부분은 직선으로 네모바탕을 구획하고 그 안은 와편으로 4줄 점선무늬를 내었다. 하단에는 작은 막돌을 모양에 구애받지 않고 면회하여 쌓았다. 백토를 고의로 돌 위에까지 덧칠을 하여 투박하게 보이는데 오히려 그게 더 멋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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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계루 꽃담 돌과 와편으로 꾸민 수수한 꽃담이다.(꽃담이 가려서 2006년 사진을 사용함)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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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진전 꽃담 작고 둥글둥글한 강돌로 물방울무늬를 낸 순박한 꽃담이다. ⓒ 김정봉

 
북원영역의 두 번째 꽃담은 응진전의 벽체 꽃담이다. 개울에서 캐낸 동글동글한 돌을 가지런히 쌓아 물방울무늬를 낸 후 두텁게 백토사벽질을 하여 미감을 살렸다. 꽃담을 흉내 낸 꽃담 같지 않은 꽃담이라든가, 이게 무슨 꽃담이냐며 나무랄 이도 있겠으나 요새 지어진 돈 자랑하는 천박한 꽃담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내핍의 순박미가 있는 것이다.

남원(南院)의 평온한 꽃담

남원의 중심 전각은 천불전이다. 천불전은 천분의 부처님을 모시는 전각으로 뒤뜰에는 꽃담, 앞에는 꽃문에 꽃문양을 새겨 놓았다. 뒷담은 밑에 네모난 큰 돌을 쌓고 위에 둥글둥글한 돌을 골라 쌓은 뒤 백토로 두텁게 덧칠을 하여 입체감을 살렸다. 꽃은 모두 네 송이, 부드러운 돌 사이에 암키와 일곱 개만을 가지고 수놓은 꽃문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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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불전 꽃담 꽃담에 새겨진 세 잎은 천지인을 상징하는 것으로 서로 잘 어울려 모순되거나 어긋나지 않는 삼재미(三才美)를 표현한 것이다. ⓒ 김정봉

 
대상에 대한 무한한 믿음, 긴장감 하나 없는 평온한 모습이다. 이 꽃은 무슨 꽃인가에 관심은 없다. 베풀거나 대접하기에 최상의 것, 인간의 미의식 중에 가장 미적심리를 자극하는 대상물이 꽃이라 여기며 사실적인 요소는 모두 생략한 채 군더더기 없이 천지인(天地人)을 상징하는 세 개의 꽃잎을 새겨 놓았다. 완벽한 조형미와 조화미를 갖추었다.

별원(別院)의 다채로운 꽃담

남원의 오른편에는 서산대사의 사우인 표충사와 대광명전이 있는 별원영역이다. 표충사는 절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유교 형식의 건축물이다. 서산대사 화상과 정조의 어서(御書)가 있는 공간은 함부로 할 수 없었는지 꽃담을 쌓아 대접했다.

형태는 부도전의 꽃담과 비슷하다. 크기가 비슷한 돌을 두 켜쌓아 올리고 그 위에 직선으로 테를 둘러 무늬를 넣을 공간을 확보한 뒤 뽀얗게 면회한 바탕에 무늬를 빈 공간 없이 빼곡히 연출하였다. 주로 풀과 꽃, 꽃망울 모양을 재구성하여 장식적인 면을 피하고 단순화 과정을 거쳐 표현하였다. 이들 식물문양은 생명에 대한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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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 꽃담 꽃담의 전개방식은 부도밭 꽃담과 비슷해 보이나 부(富)자와 수(壽)자 무늬가 있다는 점이 다르다. 이는 표충사가 사찰 내에 있는 유교형식의 전각이기 때문이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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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충사 꽃담 이 꽃담에는 식물문양이 많다. 식물은 인간에게 베풀어 주는 생명 같은 존재로 꽃담에 좋은 소재로 쓰였다. 특히 꽃모양은 인간의 미적감성을 자극하는 대표적인 대상물로 꽃 종류와 무관하게 많이 쓰였다. ⓒ 김정봉

 
표충사 꽃담이 부도전 꽃담과 다른 것은 유교에서 말하는 다섯 가지 복 중에 부(富)와 수(壽)자로 된 문자 문양이 있다는 것이다. 장수를 기원하는 수와 물질적인 풍요를 바라는 부자문은 유교사상에 영향을 받은 무늬로서 얼핏 절집의 꽃담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표충사가 유교 형식의 사당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할 수 있다.
덧붙이는 글 *대흥사 이름에 대해서는 <해남(海南) 대흥사청허휴정의 부도와 석비에 대한 고찰, 이수경, 임성춘, 김다빈, 호남학 학술지정보, 2017년>를 참고함
*대둔사 현창운동은 <조선후기 대둔사 현창 운동과 그 의미, 이종수, 동국사학, 2011년>을 참고함
#대흥사꽃담 #대둔사꽃담 #서산대사 #표충사 #천불전꽃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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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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