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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약자를 위해 방 한 칸 기꺼이 내주는 시인

강경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맨발의 꽃잎들>을 읽고

등록 2022.10.04 12:16수정 2022.10.04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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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의 꽃잎들> 강경아 시인의 시는 "생의 어긋난 통점들이 / 불쑥불쑥 얼굴을 내"밀고 있는 이 세상에서 하루하루를 움켜쥐고 살아내는 사람들 속으로 뿌리내리고 있다. ⓒ 시와에세이


연탄재

남산동 연등천 다리를 오르내리며 놀았던
철없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질척질척한 펄 바닥으로 기어 나오는 어둠들
구멍 칸칸마다 넉넉한 셋방살이 인심으로
우리에게도 잠깐 환해질 때가 있었다
민물과 바닷물이 서로에게 젖어드는 밤이면
엄마가 불러주던 자장가가 밀물처럼 차올랐다

더 이상 태울 수 없는 밤은
얼마나 고요한가

진창 같은 바닥에서
술잔 부딪히는 소리는
또 얼마나 맑고 투명한가

생의 난간 끝에 서 있는 소리는
얼마나 또 간절한가

다 타고 쏟아내 버린 적막 한 채
이 눅눅하고 습한 단칸방에
깜박깜박거리는 불빛 하나
- 강경아, <맨발의 꽃잎들>, 시와에세이, 2022년, 100~101쪽


시는 무엇을 위해야 하나

강경아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맨발의 꽃잎들>을 두 번 연거푸 읽었다. 그러는 동안 찾고 찾다가 드디어 찾아낸 시다. 나는 무얼 찾고자 했을까? 자기 서정, 자기 이야기다. 이 시도 시인 자신의 서정이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은 않아 보인다.

시는 무엇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가? 물론 이에 대한 대답을 다양할 수 있겠다. 다만 강경아 시인의 신간 시집을 두 번 연거푸 정독하고 난 뒤에 내가 느낀 것을 비유적으로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강 시인에게는 시의 방이 여러 개가 있었는데 자기가 쓸 방조차 슬픈 세상과 아픈 이웃들에게 내어주어 정작 자신은 기거할 방이 없다는 것! 물론 이는 자아의 확장이나 시의 확장으로 해석함이 온당할 것이다. 앞에서 인용한 시로 돌아가 보자.

"더 이상 태울 수 없는 밤은 얼마나 고요한가"

연탄재는 이미 다 태워서 더 이상은 태울 것이 없다. 그 끝은 고요다. 서정 시인으로서 응당 갖고 싶었을 자기 방조차 "생의 어긋난 통점들이/불쑥불쑥 얼굴을 내"밀고 있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아프고 상한 타자들에게, 맨발의 꽃잎들에게 내어준 시인이 다름 아닌 "다 타고 쏟아내 버린 적막 한 채"의 고요에 이른 연탄재가 아닐까. 나만의 생각은 아닌 듯하다.

"강 시인의 시들은 뿌리가 깊고 단단해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을 뿐만 아니라 많은 가지를 키워 올려 다른 사람들의 손을 잡는다. 마늘까기의 달인이자 무한 인심을 기부하는 이웃 노인은 물론이고 전태일, 노숙자, 세월호 참사 희생자, 아르바이트 청년들, 사라진 공구장인들, 코로나19로 무너진 자영업자와 노동자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맹문재 시인)

역사 속으로 당당히 들어가는 시인의 시집

강경아 시인은 "변방의 아랫목처럼 깊고 푸른" 곳, 여수 출신이다. 지금도 여수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고 있다. 강 시인은 한때 여수작가회의 사무국장으로 일하면서 국가 권력의 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한 여순 유가족들의 아픔을 위무하고 진실을 규명하는 일에도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쓴 시편들도 시집에 상당수 수록되어 있다.

누가 너희에게 즉결처분의 권한을 주었느냐
여덟 명의 식솔을 거느리는 가장에게
흙을 일구는 가장 외롭고 가난한 농부에게
살뜰했던 윗마을 아랫마을 평화로운 이웃에게
누가 너희에게 손가락총을 겨누게 하였느냐
좌우로 줄을 세우도록 하였느냐
- 시 <여순의 푸른 눈동자> 중에서, 78쪽

눈을 가리고, 입을 막고
동포를 잃고 역사를 지우고
창백한 폐허가 되어버린 심해 속으로
손발 꽁꽁 묶어 수장해버렸구나
- 시 <애기섬> 중에서, 80쪽


강 시인은 자신의 지역문제뿐만 아니라 제주 4.3 항쟁, 5.18 민주화 운동, 미얀마 민주화 운동 등의 역사 속으로 당당히 들어간다. 그 과정에서 쓴 시편들도 문학적 성과를 인정받고 있다. 지면 관계상 한 편만 소개하는 아쉬움이 크다.

발길 닿는 모든 곳이 통점(痛點)이다
매캐한 연기가 뼛속까지 파고드는데
뒤틀리는 비명 소리 돌담을 넘고
부릅뜬 눈과 입들은 둘레는 이룬다
커다란 돌덩이는 비석이 되고
더 깊은 어둠으로 막아버렸다
달이 환하게 비추는 다랑쉬마을
잊혀진 사람들, 묻어버린 진실
속숨허라, 속숨허라
손톱자국이 핏빛으로 스며드는 길
제주의 사월이다
- 시, '다랑쉬굴' 전문


"변방이라 말했지만 그가 짚어내는 통점은 한국의 근대사를 꿰뚫고 지나간(혹은 지나가는) 것이라는 점에서 여수라는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 보편성과 공감대를 획득하고 있다. 시인은 이 시집에서 잊혀진 사람들. 묻혀버린 진실들을 찾아 그것을 오늘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복효근 시인)

"검불로 피운 연기를 동굴로 들여보낸 후 그 입구를 커다란 돌덩이로 막아 동굴 안에서 주민들을 질식사하게 만든 국가권력의 폭력에 의해 잊혀진 제주인들과 그 때문에 속숨허라, 속숨허라, 곧 말해봤자 소용없으니 조용히 하라는 현대판 전승에 묻혀버린 진실이 마치 살갗을 깊게 파고드는 손톱자국처럼 자신의 아픔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임동확 시인)


강 시인은 아픔과 절망만을 노래하지는 않는다. 바닥을 노래하면서도 "바닥은 바닥이 알아보는 법/바닥이 서로 기대고 맞대어/서서히 몸을 일으킨다"면서 바닥의 힘을 긍정하고 응원한다. 바닥은 "고집 센 졸음들이 모여 사는 곳"이다. "낙오의 시간이 딱딱하게 벗겨진 자리"이기도 하다. 하지만 "바짝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는 저 악착들" 속에서 시인은 기어이 "누군가 씹다 버린 껌들도/여기 저기 웅성웅성 꽃을 피"우는 것을 발견해낸다.

<시인의 말>에서 "고목에서 다시 피어나는 목련꽃 한 송이처럼 길 잃은 발들의 조문객이 되고 싶었다"고 말하고 있는 강경아 시인은 원광대학교 사범대 국어교육학과를 졸업하고 2013년 '시애'로 등단했다. 첫 시집 <푸른 독방>을 상재한 뒤 이번에 두 번째 시집을 펴냈다. 강 시인의 두 번째 시집 상재를 진심으로 축하드린다.

맨발의 꽃잎들

강경아 (지은이),
시와에세이,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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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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