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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의 외주화'가 또 노동자 한 명을 삼켰다

[주장] 지금 여기, 조선소 다단계하청 고용을 금지하라

등록 2022.10.04 11:52수정 2022.10.04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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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중공업 크레인참사 1주기 2018년 5월 삼성중공업 크레인참사 1주기 추모 분향소 앞 ⓒ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지난 9월 5일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 한 명이 또 노동재해로 목숨을 빼앗겼다. 9월 1일 아침 7시 15분께 작업해야 할 블록 위치를 확인하러 갔다가 발이 미끄러져 이동 중이던 정반 사이에 끼이는 사고를 당한 노동자가 4일 만에 그만 돌아가신 것이다. 지난 3월 이어 대우조선해양에서 올해 두 번째로 발생한 중대재해다. 역시 하청노동자, 그 중에서도 재하청 물량팀에서 용접을 하던 여성노동자였다.

7시 15분이면 작업 시작 45분 전인데, 고인은 왜 그렇게 일찍부터 작업할 블록을 확인하러 갔을까? 작업은 8시에 시작하지만, 7시면 출근해 작업장으로 나가 일 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 대다수 하청노동자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중대재해처벌법이 시행되었지만, 하청노동자의 위험한 노동현실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고 '위험의 외주화'는 여전하다.

대우조선해양 하청노동자들은 "이대로 살 순 없지 않습니까?" 호소하며 51일 동안 파업투쟁을 했다. 파업을 통해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저임금 구조와 인력난을 세상에 알릴 수 있었으나, 핵심 목표였던 임금인상에는 실패했다. 그 결과, 조선소에서는 더 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게 된 하청노동자들이 계속 일터를 떠나고 있다.

조선소 품질보장은 하청 본공 숙련 노동자들

더욱 큰 문제는 심화되는 인력난이 그동안 한국 조선업을 떠받쳐 온 하청노동자 고용구조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리고 있다는 점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 조선업은 하청노동자가 직접 생산의 70% 이상을 차지하는 '하청중심 생산체제'였다. 그런데도 세계 제일의 품질이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른바 '본공'이라고 부르는 하청업체 상용직 노동자들이 조선소 생산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비정규직이지만 이들은 조선소에서 20~30년 일해 온 숙련노동자였다.

그러나 불황기 임금하락으로 인해 조선소에서 일해서는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렵게 된 숙련노동자들이 떠나고 있다. 현재의 저임금으로는 본공 숙련노동자를 구할 수가 없다. 그러자 원청과 하청업체는 임금을 올려줄 생각은 하지 않고, 부족해진 노동자를 물량팀, 아웃소싱 등 다단계하청 고용으로 채우고 있다.

다단계하청 고용은 노동자의 권리를 박탈한다. 다단계하청일수록 4대보험 가입률도 떨어질 수밖에 없어서 일하다 다쳐도 산재로 치료받기가 더 힘들고, 일자리를 잃어도 실업급여를 받기 어렵다. 어디 그뿐인가. 고용계약은 대부분 한 달, 두 달짜리 단기계약으로 언제든 쉽게 해고될 수 있다. 일이 없어 쉬어도 휴업수당은 언감생심, '무급대마치'가 일상이다. 하청노동자 투쟁으로 한두 달 단기계약을 최소 1년 단위 계약으로 바꾸고 휴업수당도 지급하게 만들었는데, 최근 물량팀과 아웃소싱 노동자들이 늘어나면서 노동자 권리가 다시 후퇴하고 있다.


다단계하청 고용은 위험의 외주화를 심화한다. 물량팀, 아웃소싱 노동자일수록 돈과 직결되는 작업량이 안전보다 우선될 수밖에 없다. 1차 하청인 본공 노동자들이 그나마 법이 정한 월 2시간 안전교육을 받을 때도, 물량팀 노동자는 교육에 참석하지 않고 계속 일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무엇보다 다단계하청 노동자는 원청의 안전시스템은 물론이고 하청업체의 안전관리 영향권 밖에 존재한다. 원청이 아무리 수백억 원의 예산을 안전에 투여해도, 하청업체 안전관리를 강화해도 중대재해가 줄어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단계하청 고용이 만드는 악순환의 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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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속노동자(iLabor)에 실린 사진 금속노조 경남지부 거통고 조선하청지회 조합원 일곱 명이 6월 24일 오후 경남 거제 대우조선해양 1 도크 선박에 올라 농성을 벌이고 있다. 변백선 ⓒ 변백선

 
다단계하청 고용은 선박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물량팀, 아웃소싱 노동자라고 해서 본공 노동자에 비해 숙련이 많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다단계하청 노동자가 놓인 조건이 품질을 고려할 수 없게 만든다.

실제로 지난 5월 18일 대우조선해양 탑재업체 A기업에서는 자격증도 없는 아웃소싱 노동자를 고용해 용접작업을 해서 문제가 되었다. 용접은 선박 품질의 핵심이기 때문에 대우조선해양 등 대형 조선소에서 용접 작업을 하려면 해당 조선소가 발급한 용접자격증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A기업은 용접작업증이 없는 아웃소싱 노동자들을 다른사람 용접작업증이 붙은 안전모를 착용하게 한 뒤 작업을 시켰고, 그 결과 다수의 작업 불량이 발생했다.

그럼에도 A기업과 원청은 불량난 블록을 그대로 공정 진행시켰고, 노동조합에서 문제제기하고 나서야 다시 검사를 하고 불량난 부분을 재작업했다. 다단계하청 고용 확대로 이 같은 품질결함이 계속되고 있어도, 생산 일정에 쫓겨 이같은 일이 묵인된다면 결국 더 큰 위기를 불러올 것이다. 한국 조선소에서 만든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멈춰 서는 일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하청노동자와 노동조합이 투쟁을 통해 브레이크를 걸지 않는 한, 더욱 심각해지는 조선소 인력난에 대해 자본은 하청노동자 임금인상이 아닌 다단계하청 고용 확대로 대응할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몇 년 동안의 조선업 호황기에 다단계하청 고용이 확대되어 기존의 하청업체 본공 중심의 고용구조가 무너진다면, 그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적인 변화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이야말로 하청노동자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무법천지 조선소를 바꾸기 위해 다단계하청 고용을 법으로 금지할 때이다. 2017년 삼성중공업과 STX조선해양에서 발생한 연이은 대형 사망사고 이후 만들어진 '조선업 중대재해 국민참여 조사위원회' 보고서에서도 다단계하청 고용 금지를 가장 중요한 해결책으로 제언한 바 있으나 정부는 이를 철저히 외면하고 묵살했다. 정부의 태도는 지금도 마찬가지이고, 이에 맞서 다단계하청 금지법을 추진할 하청노동자의 힘은 미약하다.

그렇다고 포기하거나 먼 훗날의 일로 미루어둘 수 없다. 고 김용균 노동자의 죽음이 중대재해처벌법을 제정하게 만들었고, 대우조선하청노동자 51일 파업투쟁이 손배가압류를 금지하는 노란봉투법 제정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지금부터 준비하고 추진해야 조선업에서 다단계 하도급 금지법을 현실화시킬 수 있다.

금속노조와 울산, 거제, 목포의 조선하청지회가 앞장설 것이다. 지금 여기, 조선소 다단계하청 고용을 법으로 금지하기 위한 첫발을 내딛자.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김용균재단 회원이자 금속노조 거제통영고성 조선하청지회 사무장입니다.
#김용균재단 #다단계하청 #위험의 외주화 #조선소 고용구조 #이김춘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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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0월 26일 출범한 사단법인 김용균재단입니다. 비정규직없는 세상, 노동자가 건강하게 일하는 세상을 일구기 위하여 고 김용균노동자의 투쟁을 이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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