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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독립 투쟁' 조선어학회 사건

조선어학회 사건 80돌을 맞아... 나라가 없던 시기, 목숨 걸고 지킨 우리 말

등록 2022.10.04 15:39수정 2022.10.04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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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은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난 지 80주년이 되는 해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1942년 10월 1일에 발생했다. 조선어학회 사건 80돌을 맞이해 그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한다.

일제는 조선 강점 초기부터 일본어를 조선인에게 보급해 일본인으로 만들고자 하였다. 1938년에는 조선어 교과목을 학교에서 폐지했다. 일본어 상용 정책을 통해 조선 민족을 말살하고자 했다. 그런데 일어 상용의 노선을 충실히 따르지 않는 반일 성향을 지닌 민족주의 학술단체가 조선어학회(1931)였다.

조선어학회는 조선 민중의 지지를 받아가며 민족어 3대 규범집(<한글 맞춤법 통일안(조선어 철자법 통일안)>(1933),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 <외래어표기법 통일안>(1941)을 완성했다. 3대 규범집은 다가올 민족국가 즉 독립국가에서 곧바로 국어 규범으로 쓸 수 있기 때문에 항일 투쟁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더구나 조선어학회는 민족어 규범으로 된 <조선어대사전>을 기어코 출판하고자 하였다. 사전 편찬은 민족어를 영구히 유지하는 효과를 가져 오고, 더 나아가 이를 통해 민족정신을 앙양하기 때문에 항일 투쟁의 성격을 지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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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큰사전> 조선어학회, <조선말 큰사전>2권, 을유문화사, 1949. ⓒ 박용규

 
이렇게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은 우리 말글이 침략자들에 의해 말살되는 것을 보고 목숨을 걸고 항쟁했다. 이러한 조선어학회의 사업은 일제의 조선 통치에 반하는 행위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의 회원들을 검거하기 이전인 10여 년 동안,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민족주의자들의 소굴'로 파악하고 있었다. 1938년에 이미 일제는 조선어학회를 '요주의단체'로 규정하고 있었다.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이 언어 독립 투쟁임을 간파한 일제는 1942년 10월 1일 조선어학회 사건을 일으켰다. 조선어학회의 사무실을 여섯 내지 일곱 차례나 철저히 수색했고, 급기야 조선어학회의 회원 33명을 검거하여 탄압했던 것이다.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인사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처벌했다.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조선어 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과 고문치사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일제에 검거된 조선어학회의 인사 가운데 이극로는 징역 6년형을 언도받기에 이르렀다. 이윤재와 한징은 함흥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여기에서 '일제가 왜 33인만을 검거하여 탄압을 했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여기에는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과 숫자를 맞추려는 일제의 의도가 작용했다고 본다. 그만큼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을 주시했고, 그 관련자 33인을 반일 인사로 판단해 탄압하고자 했던 것이다.

요컨대 조선어학회 33인은 일제의 조선어 말살 정책에 맞서 언어 독립 투쟁을 전개하였기 때문에 일제로부터 탄압받았던 것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에 대한 기존의 주장은 일제가 독립운동에 무관한 조선어학회에 대해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조작해 탄압한 사건으로 봐왔다. 기존의 주장은 잘못된 것이었다. 종래의 주장대로라면 조선어학회가 독립운동과 무관한 데도 일제의 억지 조작 때문에 무고하게 조선어학회와 그 인사들이 탄압을 받은 꼴이 되는 셈이다.

조선어학회 사건은 일제의 조작과 날조 때문에 조선어학회의 관련 인사들이 탄압을 받은 사건이 아니라, 조선어학회의 관련 인사들이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건이었다.

조선어학회 사건에서 가장 많이 고문을 당한 이극로는 일제가 이 사건을 '조작'했다고 기술하지 않고, 조선 말글을 말살하려는 일제의 식민지 동화정책 때문에 이 사건을 일으켜 탄압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그는 자신들이 전개한 한글운동이 '조선 독립운동의 근본'이어서 조선어학회 사건이 발생했다고 기술했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조선어학회가 일본 제국의 통치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에, 집요하게 조선어학회의 언어투쟁에 대해 분석했고 가혹한 탄압과 처벌을 하기로 결정했다. 그래서 이들은 조선어학자들에 대한 가혹한 고문과 고문치사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따라서 일제는 조선어학회의 한글운동을 탄압할 수밖에 없었고, 조선어학회는 일제의 탄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이 남긴 의미는 첫째 일제가 조선민족 말살정책의 구체적 실천을 보여줬다는 점, 둘째 조선어학회가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반증했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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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어학회 사건으로 탄압을 받은 인사들이 조직한 십일회 회원들의 모습 (앞줄 왼쪽부터 김윤경, 정세권, 안재홍, 최현배, 이중화, 장지영, 김양수, 신윤국. 가운데 줄 왼쪽부터 김선기, 백낙준, 장현식, 이병기, 정열모, 방종현, 김법린, 권승욱, 이강래. 뒷줄 왼쪽부터 민영욱, 임혁규, 정인승, 정태진, 이석린. 총 22명 촬영. 1949년 6월 12일에 첫 모임을 갖고 찍은 사진으로 판단됨. 사진은 권한솔 님이 제공.) ⓒ 권한솔

 
분단 때문에 독립 유공 포상이 이뤄지지 못한 채 북한에서 생애를 마친 3명(이극로, 이만규, 정열모)을 제외하더라도, 2022년 현재까지 대한민국 정부는 조선어학회 선열 33인 가운데 25명을 독립 유공자로 포상했다. 이를 보더라도 조선어학회 인사들의 언어 독립 투쟁은 혁혁했다.

나라가 없는 시기에, 조선어학회 선열들은 우리말과 한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언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광복 이후 우리말인 한국어는 국어로, 한글은 국문으로 그 위상을 확보했다.

올해 조선어학회 사건 80돌을 맞아 우리 국민 모두가 우리말과 한글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인식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한글학회가 발행하는 <한글새소식>(2022, 10.)에 게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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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대 한국사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민족문제연구소 연구위원과 우리말로 학문하기 모임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고려대 한국사연구소 연구교수와 한글학회 연구위원을 역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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