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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층 있는 삶' 빼앗는 국가... 이게 차별이 아니라고?"

'대형건물만 장애인 이동 편의시설 설치' 시행령 위법 소송... 2심에서 장애인들 패소

등록 2022.10.06 16:02수정 2022.10.0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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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단체가 6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법원종합청사 앞 삼거리에서 국가배상소송 2심판결 선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소송 당사자인 김영학 노들야학 교장이 발언하고 있다. ⓒ 손가영

 
카페, 편의점, 빵집, 미용실, 고깃집, 호텔, 약국... 비장애인은 아무 불편 없이 드나드는 가게들은 장애인들에겐 문 앞까지 찾아가도 건너갈 수 없는 '그림의 떡'이다. 2022년 현재도 문턱, 협소한 통로 등 휠체어나 전동차가 지나갈 수 없는 진입로이 있는 가게가 대부분이다.

각종 생활시설에 경사로, 휠체어리프트 등 장애인 편의시설을 의무화한 시행령은 1999년에 제정됐는데, 왜 현재까지 이럴까. 건물 면적이 300㎡(91평), 500㎡(151평), 1000㎡(302평) 등 일정 규모 이상일 경우만 의무로 규정하면서, '골목상권'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중·소규모 가게에는 23년 동안 의무를 면제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부는 지난 5월 뒤늦게서야 '새로 짓는 50㎡(약 15평) 이상의 소규모 식당·카페 등 근린생활시설'에도 경사로 등 편의시설을 의무화하는 내용으로 장애인등편의법(장애인·노인·임산부 등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 시행령을 개정했다. 그러나 장애인들은 바닥 면적 제한 기준을 두는 것 자체가 이동권과 행동자유권을 훼손한다며 강력 반발했다.

장애인들은 "잘못된 법안으로 23년간 이동권, 행동자유권, 행복추구권이 박탈됐다"며 "국가가 장애인들로부터 1층이 있는 삶을 빼앗았다"고 줄곧 비판해왔다. 결국 "국가가 장애인에게만 접근불가구역을 만드는 건 명백한 차별행위"라며 지난 2018년 4월, 대한민국을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법적 싸움을 시작했다.

결과는 패소. 이 사건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등법원 민사5부(재판장 설범식, 배석 이준영·최성보)는 6일 오전 열린 선고기일에서 "원고 항소를 기각한다"라고 밝혔다. 해당 시행령 제·개정은 차별에 해당하지 않고 정부가 편의시설 설치 대상 범위를 단계적으로 지정하는 등의 재량권을 갖고 있으며, 설령 시행령 내용이 불법이라 해도 그 과정에 정부의 고의·과실이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이유다.

선고 후 판결 요지를 간략히 밝힌 설범식 판사는 "국가는 장애인·노인·임산부 편의증진 보장법과 함께 사회경제적 부담을 고려하고, 장애 유형 및 대상 시설에 요구되는 편의시설 종류, 이용수요 예상에 따른 편의 시설 설치 필요성, 그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분석해 탄력적으로 대상시설 범위를 지정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다만 "소송의 특성을 고려해 민사소송법 99조에 따라 소송비용은 각자 부담한다"고 밝혔다. 민사소송법 99조는 특정 조건에선 승소한 쪽에도 소송비용을 부담시킬 수 있다는 내용으로, 패소한 자가 소송비용을 부담하는 원칙의 예외 조항이다.


"23년 간 기본권 박탈하는 법령, 누구 책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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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등 단체가 6일 오전 11시 서울 서초구 법원종합청사 앞 삼거리에서 국가배상소송 2심판결 선고 기자회견을 열었다. 사진은 회견 참가자가 피켓을 들고 있는 모습. ⓒ 손가영

  
소송 대응에 참여한 9개 장애인권 단체 및 법무법인들은 선고 직후 기자회견을 열고 "오래도록 차별 시정을 촉구했으나 국가가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서 소송까지 온 것"이라며 "법원은 결국 정부 손을 들어줬다. 국가가 장애인의 권리를 외면해도 된다는 면죄부 결과로 깊은 유감을 표한다"고 비판했다.

원고 대리인 정다혜 변호사(사단법인 두루)는 "국가의 장애인 이동권의 보장 의무는 장애인차별금지법(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장애인등편의법, 헌법에서 도출되는 것"이라며 "편의 시설 설치 대상 건물에 대한 기술·재정 지원 의무가 법률에 규정돼 있음에도 해태(행동이 느리고 일하기 싫어함)한 점에서, 정부의 고의·과실이 인정된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또 "정부는 이미 2014년 바닥 면적 기준과 관련해 유엔장애인권리위원회로부터 강력한 시정 권고를 받았고, 얼마나 많은 시설이 의무에서 면제됐는지 통계도 파악했다"며 "그럼에도 8년이 지난 시점에도 개정하지 않았다. 정부의 고의·과실이 인정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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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8월 장애인 이동권 문제를 크게 이슈화 시켰던 버스점거투쟁. ⓒ 다큐인

 
나아가 정 변호사는 지난 7월 대법원이 선고한 교정시설 불법행위에 대한 국가손해배상 책임 인정 판례를 꺼내들었다. 그는 "법원은 '수용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침해됐다면 그 수용행위는 공무원의 법령을 위반한 가해행위로 볼 수 있다'고 인정했다"고 상기시켰다. 1인당 2㎡ 미만 면적에 수용자를 수용한 교정시설의 행위는 인간존엄을 해쳐 위법하므로 국가배상책임을 인정한 판례다.

정 변호사는 "국가배상책임에서 '공무원의 가해행위'는 엄격한 의미의 법 위반뿐 아니라 인권존중, 권력남용금지, 신의성실과 같이 공무원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규범을 지키지 않는 경우도 포함한다"고 설명했다.

박김영희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상임대표는 "1984년 '거리의 턱을 없애 달라'는 장문의 유서를 남기고 김순석씨가 돌아가셨다. 그때는 죽음으로 저항했지만 이젠 법으로 저항하고, 법에서도 안 되면 길거리에서라도 저항하며 세상을 바꿔나가겠다"며 "법의 한계 안에서 장애인의 권리를 보장하지 않고, 일상에서의 이동권조차 보장하지 않는 대한민국 법에도 강력히 저항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박 대표는 "우리가 '1층이 있는 삶'을 보장하라는 이유는 우리도 가고 싶은 곳에 가고, 먹고 싶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일상을 원하기 때문"이라며 "국가 책임을 부인한 오늘 판결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들은 상고 여부를 추후 논의해 결정하겠다고 밝혔다. 
#장애인이동권 #국가배상 패소 #1층 있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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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영 기자입니다. 제보 young@ohmynews.com / 카카오톡 rockyrkd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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