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도록 일하시게, 세상에 공짜는 없다네"

[박도의 치악산 일기] 제70화 가을비 오는 10월 어느 하루 이야기

등록 2022.10.10 12:33수정 2022.10.10 1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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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뉴욕 허드슨 강변에서 만난 제자 가족과 함께 (2004) ⓒ 박도

 
반갑고 고마운 일

이제 저 세상에 가도 조금도 서럽지 않은 이즈음이다. 나는 팔자가 드센 탓인지, 최근 따라 부쩍 바쁘다. 엊그제는 외장 하드에 2년 째 잠자고 있던 원고를 어느 출판사가 출판을 해주겠다고 해 서울로 가서 계약을 체결했다. 어제오늘 그 원고를 송고 전 마무리 퇴고로 정신이 없이 원고를 다듬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졸업한지 40년이 지난 제자가 부인을 모시고 내가 사는 원주 치악산 밑 동네까지 오겠단다.

<논어> 제1권 제1장 '학이' (學而)편 첫 머리다.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하지만 이즈음 내 벗들 가운데는 이미 북망산에 갔거나 요양원 등에 가 있는 친구들이 많다. 이 조락의 계절에 40년 전 제자가 부인과 함께 먼 곳을 찾아오겠다니 얼마나 반갑고 고마운 일인가.

내 지난 인생을 때때로 뒤돌아보면 후회투성이로 성능 좋은 지우개로 죄다 지워버리고 싶을 때가 많다. 하지만 그 가운데 33년의 교사생활만큼은 무척 잘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교사초기 때, 교직은 인기가 바닥이었다. 하지만 그 시절을 잘 참고 지낸 탓으로 늘그막에는 남에게 아쉬운 말 하지 않고 매달 또박또박 나오는 연금으로 입에 풀칠은 하며 지내고 있다.

그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나는 교단을 떠난 뒤 제자들의 도움을 엄청 많이 받고 있다. 내가 이제까지 작가로, 기자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국내외에 흩어져 사는 수많은 제자들이 내 작품과 기사를 열독해 주기 때문이다. 

한 제자가 졸업한 뒤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그는 고교 졸업 20년 만에 모교로 찾아와서 나에게 미국 뉴욕 허드슨 강변의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하지만 영어로 "화장실이 어디입니까?"도 말할 줄 모르는 국어교사가 어떻게 그 청을 받아들일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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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만난 제자들과 함께(2004) ⓒ 박도

 
그런데 '한 치 앞을 모르는 인생'이라는 말을 증명이라도 한 듯, 그 몇 해 후 미국 워싱턴D.C.에 가서 40여 일을 머물게 됐다. 주말은 내가 주중에 매일 출퇴근했던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이 휴관이라 무료해 그때 주소를 교무수첩에 적어준 그 제자에게 전화를 하자 'Welcome'이라는 반가운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뉴욕 허드슨 강변의 그의 집을 찾아가자 상다리가 휘어지게 차려놓고 고국의 와룡선생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제자 덕분으로 강원도 산골의 꾀죄죄한 훈장이 어린 시절 동경했던 뉴욕 맨해튼의 엠파이어스테트 빌딩이며, 유엔본부며, 그 유명한 9.11 테러 현장도 두루 살펴볼 수 있었다. 그날 이국에서 극적으로 만난 사제의 모습에 감동한 재미동포 박유종(사학자 박은식 선생 막내손자) 선생은 나의 현대사 사진 수집에 애써 자원 봉사해 주셨다. 그래서 영어에 눈이 어두운 나는 그분 덕분에 한국현대사 관련 사진 2500여 점을 NARA에서 수집해 올 수 있었다.


그런 뒤 메릴랜드 주 락빌에 사는 제자도, LA에 사는 제자들도 다투어 고국에서 간 와룡선생을 초대하여 맹자의 '인생삼락(人生三樂)'의 기쁨을 한껏 누리게 했다. 정말 해외에서 제자와의 만남은 눈물이 왈칵 쏟아지도록 반가운 만남이요, 큰 보람을 느꼈던 순간들이었다. 그밖에 전 민화협 대표로 있었던 한 제자의 덕분으로 휴전선 너머 금강산도, 일본 관광진흥회에 근무하는 한 제자 안내로 일본기행도 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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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릴랜드 주 락빌에서 만난 제자 가족과 함께(2007) ⓒ 박도

 
세상에 공짜는 없다

가을비가 질금질금 내리는 날(10.9.) 이대부고 22기 졸업생 장원호 군은 예쁜 배우자를 옆자리에 모시고 치악산 밑 내 집으로 찾아오셨다. 우리는 가까운 산채나물 밥집에서 마음의 점을 찍었다. 그런 다음 거기서 가까운 카페로 가서 차를 마시는데, 그가 굳이 이 우중에 찾아온 연유를 애기했다.

사연인즉, 자기네 동기들이 지난 8월 말, 졸업 40주년 기념 모임을 가졌다. 그날 논의하기로는 생존 은사를 찾아뵙고 약소한 선물을 전달키로 했단다. 그런데 내 집을 아는 그가 나를 맡게 돼, 이번 연휴에 시간을 내 찾아왔단다. 그러면서 'Gift Card' 봉투를 떨어뜨리고는 훌쩍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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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비가 오는 날 내 집을 찾아준 제자 부부(2022) ⓒ 박도

 
아내는 나에게 이제 빚을 지면 앞으로 갚을 날이 없다고 아무에게도 빚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는데, 어물쩍 나는 그만 또 신세를 졌다. 장원호군의 말이다.
 
"그날 저희 졸업생들의 말을 그대로전합니다. 선생님은  열정적인 삶으로 저희가 어떻게 늙어가야 할지를 몸소 가르쳐 주십니다. 부디 앞으로도 건강히 좋은 작품 많이 남겨서 저희들이 많이 배울 수 있게 해주십시오."
 
내가 그들 부부에게 한 말은 두 마디였다.

"늙도록 일하시게. 세상에 공짜는 없다네."

나는 집 앞에서 멀리 떠나는 그들 부부를 향해 오래도록 손을 흔들었다.
#제자의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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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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