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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발로 변한 아버지, 너무 놀라 숨어버린 딸

[납북귀환어부 이야기] 동림호 선원 고 최형도씨 자녀 최길심씨

등록 2022.12.08 14:59수정 2022.12.08 1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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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길심 씨와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했다. ⓒ 변상철

 
최길심씨는 북한에 납북되었다가 1972년 5월 10일 귀환한 동림호 선원 고 최형도씨의 딸이다. 여수에서 지내는 최씨는 오전은 일찍 일을 시작해야 해 오후에나 인터뷰 시간이 된다고 했다. 용역업체를 통해 일을 구할 수 있기에 본인 스스로 시간을 내는 것이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인터뷰가 끝날 때쯤 되니 밖이 어두워지기 시작할 정도로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최씨는 아버지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만 생각하면 여전히 마음이 아프다고 했다. 

부친 최형도씨가 납북될 때 최씨의 나이는 고작 10살이었다. 여수 적금리에서 부친이 배를 타며 생활할 때의 형제가 3남 3녀였고, 그 중 큰 오빠를 제외하면 부친의 일을 가장 잘 기억하는 사람이 본인이라고 했다. 너무 어려서 부친의 납북사실을 자세히 알지는 못했으나 어머니가 울며 아버지가 북한에 잡혀갔다고 걱정한 것은 또렷이 기억한다고 했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납북자 명단에 부친의 이름이 포함되어 있었고, 어머니는 울며 걱정하다 곧장 선주가 있는 여수로 나갔다고 한다. 당시 동림호에 탔던 동네 지인 가족들도 여럿 있었기에 함께 여수로 나갔다고 한다. 그러나 부친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경제생활을 책임지던 부친의 부재로 남은 가족들끼리 어렵게 생계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20대 나이로 비교적 젊었던 어머니는, 갑작스러운 남편의 실종으로 정신이 반 쯤 나간 상태로 젖먹이 동생을 키우며 생활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돈을 벌려고 남의 집 일을 나갔지만, 매일 밥 대신 막걸리로 슬픔을 달래며 실성한 사람처럼 지냈다고 한다. 가족의 고통을 분담하려고 최씨 또한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아버지가 납북되고 초등학교 2학년 1학기 때 중퇴를 했다가 72년 아버지가 귀환하고 3년 정도 뒤에 초등학교를 다시 다녀서 졸업을 했어요. 아버지가 납북되고 나서 학교를 다닐 때 막내 갓난아기를 업고 학교에 오다보니 아이가 똥을 지리기라도 하면 교실 전체에 냄새가 나서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가 없더라고요.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서 빨래, 청소, 식사하고 물질해서 밥 해먹고 하면서 지내야 했어요.

그때는 쌀밥이 있나요. 주로 고구마나 삶아서 먹거나 보리밥을 먹고는 했지요. 큰집이 있어도 도와줄 형편은 못 되었어요. 내가 동생들 돌보고 어머니는 남의 집 일을 해주며 살았어요. 엄마가 사는 게 사는 게 아니었어요. 섬이라 별로 할 것도 없어서 옆집 어장 일을 도와주러 가면, 나는 여동생 젖먹일 시간에 맞춰서 엄마에게 데려갔다 오고했어요.

부친의 생사를 알지 못하며 그렇게 1년여간 생활하던 최씨 가족에게 드디어 부친의 귀환 소식이 전해졌다. 어머니는 남편을 만날 생각에 의복을 챙겨 최씨와 젖먹이 여동생을 데리고 여수를 거쳐 순천교도소로 향했다. 순천교도소에서 1년여 만에 만난 아버지는 확연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파란 옷에 수인표를 붙이고 나온 아버지는 머리가 하얀 백발이 되어 마치 1년 만에 할아버지가 되어 버린 듯 했다고 한다. 최씨는 부친의 모습을 보고 너무 놀라 어머니 뒤로 숨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백발로 변한 남편의 몰골을 보며 속상해 하며 울던 어머니는 최씨의 등을 떠밀며 아버지에게 인사를 하라고 했다. 그런 딸 최씨를 보던 아버지 최씨는 '뭐라고 여기 왔냐'며 오히려 가족에게 미안해했다고 한다.

1년여 만에 교도소에서 출소한 아버지는 집에서 몸져누워있으며 항상 머리가 아프다고 호소했다. 또 무릎이 아프다며 한여름에도 아기 천 기저귀 같은 것으로 무릎과 다리를 묶고 지내야 했다. 최씨의 아버지는 그렇게 5년간 집에서 누워 생활하다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5년간 집에서 겨우 화장실 가는 정도만 움직일 수 있는 폐인의 상태가 되었다고 한다.

아버지가 늘 집에 누워있는 산 송장같은 생활을 했지만, 경찰은 그런 아버지를 집요하게 감시했다고 한다. 집 주위나 담벼락에 사복경찰들이 자주 와 서 있었고, 아버지는 경찰 감시를 눈치 채면 '으흠'하는 기침소리를 냈다고 한다. 아버지의 기침 소리는 경찰이 감시한다는 신호이자 가족 모두 집 안으로 피신하라는 신호이기도 했다. 고구마를 먹다가도, 마당에서 놀다가도, 일을 하다가도 아버지의 기침 소리가 들리면 가족들은 모두 방으로 들어와야 했다. 파란 잠바를 입고 선글라스를 끼고 감시하던 경찰들은 수시로 바뀌었고, 그런 감시로 인해 여수같은 외지로 나가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밖에 나가지도 않고 의욕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생활했어요. 머리와 다리가 아프니까 일도 못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큰오빠가 먹고 살기 위해 낙지 잡는 배를 타고 일했던 것이 기억나요. 어머니도 밭일을 해야 하니 먹고 살기가 많이 힘들었어요. 아버님이 한 5년 정도 누워만 있고 일을 하지 못하니 결국 우리가 일을 많이 해야 했어요. 저도 결국 16살 되던 해에 먹고 살려고 서울 어느 집으로 식모살이를 하러 갔어요. 거기서 6년 넘게 아버지 초상 치르는  날만 빼고는 쉬지도 않고 일을 했어요.

아버지는 최씨가 식모살이를 가던 그 해 5월에 돌아가셨다. 초상을 치르고 다시 서울로 올라간 그녀는 한달에 7천 원 급여를 받고 식모살이를 했다. 새벽 3시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기 시작해 밤 10시가 넘어서야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렇게 힘들게 모은 식모 월급은 모두 집에 보내주었다. 6년간의 식모살이를 그만두고 그녀는 공장에 취업했다고 한다.

묘 이장하다가 알게 된 사실

최씨는 23살 되던 해에 중매결혼을 했다. 그리고 몇 해 뒤 어머니는 최씨를 남겨두고 적금리를 떠나 서울로 올라가 생활했다고 한다. 한번씩 서울에 사는 어머니 집에 가보면, 그곳에서 생활하는 동생들의 몰골이 너무도 비참했다고 한다.
 
"서울 동생들도 먹고 살기 힘드니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나 봐요. 가끔 서울에 올라가보면 동생들은 학교에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 형편도 되지 않으니 돈을 모은다고 지하철을 떠돌더라고요. 긴 줄에 자석을 달아서 전철 선로에 떨어져 있는 동전을 주워 모아 도시락 반찬을 산다는 거예요. 그렇게 지하철 선로를 다니니 얼굴이며 입 주위며  옷이며, 손이며 새까맣게 되었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는 저도 속상한데 엄마는 얼마나 속상했겠어요."

최씨는 부친이 고문 때문에 사망했다고 굳게 믿고 있다. 생전에 부친이 두통 등을 호소하던 것과는 별개로 최씨 본인이 직접 목격한 사실 때문이라고 한다.
 
몇 해 전에 아버지 묘를 이장한다고 묘를 팠는데, 이장을 하던 사람이 우리보고 와보라고 하더라고요. 가서 보니 아버지 머리 뼈 중 왼쪽 두개골 뼈가 없더라고요. 아버지가 생전에 항상 머리가 아프다고 하더니 결국 경찰에게 맞아서 그렇게 된 것 같아요. 살아계실 때 한 번은 아버지가 엄마한테 '내가 오래 못 살 것 같다. 너무 맞아서 골이 흔들흔들해서 머리가 너무 아프다'고 하는 소리를 들었거든요. 전기 뭐라고도 했는데 어려서 자세히 못 들었어요.

여수 병원에 가보자고 해도 절대 여수 쪽에는 안 가려고 했어요. 그런 일을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고문으로 돌아가신 게  맞다고 생각해요. 납치된 사람이 고문으로 스스로 북한에 간 것처럼 되었으니 돌아가시면서도 눈을 옳게 감으셨겠어요?
    
최씨는 아버지가 계시면 따뜻한 쌀밥 한 그릇 해드리고 싶다고 했다. 쌀밥 한 그릇도 제대로 못 드시고 돌아가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세상에 태어나 고생만 하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가 너무도 안타깝고 불쌍하다고 했다. 재심에서 무죄가 되는 날, 아버지의 억울함이 풀리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신 곳으로 찾아가 따뜻한 쌀밥 한 그릇을 대접하고 싶다며 이야기를 마쳤다.

최씨가 탑승했던 동림호 수사기록에 따르면 어로저지선 부근에서 조업 중이던 동림호는 '선단미가입'(조업을 위해서는 어느 지역에서 조업하겠다고 해경에 미리 신고해야 하는데 그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해경의 심문을 받은 내용이 확인된다. 그러나 이 사실은 귀환 뒤 조사 과정에서 경찰과 검찰에 의해 '어로저지선'을 월선한 것으로 뒤바뀌게 된다. 다시말해 '단순 조업' 중 북에 납치된 사건이 '월선' '월북'한 사건으로 조작된 것이다. 

월북이라는 단어가 한국에서는 누군가를 낙인찍을 수 있는 부정적 의미로 사용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살펴본 납북귀환 어부의 피해 사실을 볼 때 어부들을 고의 월선, 월북으로 조작한 것이 명백하다. 검찰 등 공안기관은 억울한 월북 몰이로 고통 받는 60~70년대 납북귀환 어부들의 이 같은 멍에를 벗겨 잘못된 과거 앞에 겸허히 고개 숙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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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살아가는 세상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변화시켜 나가기 위해서 활동합니다. 억울한 이들을 돕기 위해 활동하는 'Fighting chance'라고 하는 공익법률지원센터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문두드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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