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듣기

PT 트레이너는 최고급 보충제만 먹는 줄 알았다

자취생에게는 모두 그들만의 생활이 있는 법

등록 2022.12.19 15:41수정 2022.12.19 16:43
0
원고료로 응원
【오마이뉴스는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생활글도 뉴스로 채택하고 있습니다. 개인의 경험을 통해 뉴스를 좀더 생생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PT 선생님이 내 더러워진 러닝화를 보고 물었다.


"신발 세탁은 어떻게 하고 있어요?"
"그냥 코인 세탁기에 돌려요. 운동화 전용으로 있는 거요."

 
a

더러워진 운동화 ⓒ 정누리

 
선생님이 고개를 젓는다. 수업을 하다 말고 카운터에 간다. 그리곤 무언가를 들고 온다. 검은색 김장 봉투다.

"기능성 신발은 그렇게 세탁하면 안 돼요. 여기다 신발 2, 3개 정도 넣고 물 가득 붓고요. 세제 넣고 막 흔들어요. 그리고 봉지 째로 하루 불려 놓으세요. 다음날 구정물 버리고 새 물로 헹구면 때 다 빠져요."

어째 말하는 것이 살림꾼이다.

"이거(봉투) 집에 엄청 많으니까요. 필요할 때 말씀하세요."

아. 잊고 있었다. 그는 프로 자취생이다. 헬스 트레이너들은 특별한 식단을 먹을 거라 생각했다. 그 근육질 몸을 유지하려면 최고급 보충제를 먹지 않을까 싶었다. "제가 뭘 먹는지 궁금하신가요?" 선생님은 또 카운터에 간다. 갑자기 초록색 풀때기를 들고 온다. 뭐지? 미나리? 부추? 그는 대답했다. "생파슬리입니다."


오오, 이것이 바로 식단의 비결. "이걸 먹으면 살이 빠지나요?" "아뇨. 그냥 파스타에 뿌려 먹으면 맛있습니다." 자기는 3주째 파스타를 먹고 있다고 말한다. 언제 질리나 실험 중이란다. 유감이다.

"단백질은요?" "단백질은 그냥 대충 계란 볶아서 먹죠." "다른 건 없어요? 고기는요?" "아, 저 고기 안 좋아해요. 정 먹어야 되면 그냥 닭가슴살 대충 전자레인지에 돌려 먹죠." 설거지 생기는 것도 귀찮다는 듯한 말투다.
 
a

파슬리 닭가슴살 파스타 ⓒ 정누리

 
집에 돌아가서 혼자 파스타를 해먹어봤다. 대충 배달 음식을 시켜먹고 싶었지만, 탁자에 놓인 풀때기를 외면할 수 없다. 오, 진짜 생파슬리를 넣으니까 시원하고 개운하다. 어째 트레이너의 자취 생활이 옮는 기분이다.

반대로 내가 그에게 알려준 것도 있었다. 대표적인 것은 '케이크'다. 그는 직업 특성인지, 자취를 하기 때문인지 바깥 음식에 대해 잘 몰랐다. 알고 계신 건 카레, 파스타, 장어가 전부였다. 오히려 난 자취를 하기 때문에 밖에서 친구들과 간단히 밥을 해결했고, 또 여행을 자주 다녀 음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한 날은 "도지마롤 모르세요? 도지마롤. 한동안 엄청 유행한 롤케이크인데."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이다. 그리곤 다음 수업 때 별안간, "회원님. 도지마롤? 그 케이크 엄청 맛있던데요"라며 상기된 얼굴로 말한다. 그렇게 빛나는 눈은 처음이다. 당 충전된 저 표정을 보라.

헬스 트레이너에게 디저트를 소개 시켜준 것이 약간 맘에 걸리지만, 저렇게 기뻐하시는데. 뭐. 난 그날 내가 알고 있는 모든 디저트 정보를 다 쏟아부었다. 선생님이 근육의 모든 정보를 알려주듯이. 도지마롤, 르타오 프로마쥬, 한스케이크, 아띠제 등등등…. 때문에 우리의 대화방은 운동이 아닌 '음식 정보'만 가득하다.

당연한 사실을 이번에 또 깨닫는다. 자취를 하는 사람들은 다들 '자취생'이라는 단어에 묶여 있지만, 그 안에는 백이면 백 다른 생활 방식이 있다는 것을. 곧 6~7개월 간의 PT 수업이 마무리된다. 마지막 수업 땐 생 파슬리의 보답으로 조각 케이크를 사다 드려야겠다.
#자취 #헬스 #PT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반갑습니다. 정누리입니다. snflsnfl835@naver.com

AD

AD

AD

인기기사

  1. 1 천연영양제 벌꿀, 이렇게 먹으면 아무 소용 없어요
  2. 2 61세, 평생 일만 한 그가 퇴직 후 곧바로 가입한 곳
  3. 3 버스 앞자리 할머니가 뒤돌아 나에게 건넨 말
  4. 4 "김건희 여사 라인, '박영선·양정철' 검토"...특정 비서관은 누구?
  5. 5 죽어라 택시 운전해서 월 780만원... 엄청난 반전이 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