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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 내놓고도 "사회에 갚으라"는 김장하 어른

[리뷰] 다큐 <어른 김장하>

23.01.26 16:36최종업데이트23.02.0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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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어른 김장하> ⓒ MBC경남

 
[기사수정 : 1월 26일 오후 10시]

알음알음 화제가 되고 있는 다큐가 있다. 지난해 말 경남 MBC를 통해 방영되었고 유튜브를 통해 전편이 공개된 다큐 <어른 김장하>. 눈밝은 이들이 찾아 서로서로 소개하며 꼭 보라 당부하는 작품이다. 

김장하, 어른의 자리 

2022년 5월 말 김장하 어른이 운영해온 진주 남성당 한약방이 문을 닫았다. 그의 나이 79세, 미성년자라 한 해를 기다려 19살에 받은 한약업자 자격증과 함께 해온 세월이 막을 내렸다. 그와 함께 지난 30년간 운영되어오던 남성문화재단을 해산하고 34억원 가량의 기금을 경상 국립대에 기증했다. 한약방이 문을 닫고, 남성문화재단이 해산되었지만 이대로 이 어른의 자취를 사리지게 할 수 없어 허락을 기다리지 않고 카메라를 돌렸다. 도대체 김장하라는 분이 누구길래? 

방송을 위해 찾아간 피디의 눈에 김장하 어른 양복의 실오라기가 눈에 띄었다. 양복 안감이 다 헤어졌다. 한 눈에 보기에도 오래된 3층 약방 건물에는 아직도 그 약방만큼이나 오래된 '금성' 에어컨이 달려있다. 자가용도 없다. 집으로 오가는 길, 이제는 나이들어 보폭조차 좁아진 종종 걸음만이 그의 이동수단이다. 예전에 집이 멀 때는 자전거를 이용했다고 한다. 검소하다는 말로는 설명하기가 버겁다.

그가 문을 연 남성당 한약방은 예전 새벽 첫 차가 다닐 무렵부터 손님으로 붐볐던 곳이다. 다른 곳보다 약값이 싸다고 소문난 한약방, 하지만 어디 그뿐일까? 하도 손님이 많아서 약을 못지어 주변 다른 약방으로 갈 정도였단다. 하루 800제까지도 약을 지어 새벽 3시까지 약을 만들어야 했던 곳, 한 달 순이익이 줄잡아 1억 안팍 정도를 헤아렸다. 그렇게 100억을 만들었다. 

김장하 어른은 그렇게 번 돈으로 무엇을 했을까? 다르게 벌었다면 호의호식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프고 괴로운 이들을 상대로 돈을 벌었으니 허투루 쓸 수가 없었다. 그렇게 어른은 말한다. 그 허투루 쓸 수 없는 돈으로 겨우 나이 마흔에 명신고등학교를 지었다.  
 
大學之道 在明明德 在親民 在止於至善(대학지도 재명명덕 재친민 재지어지선)대학의 도는 밝은 덕을 밝히는데 있으며. 백성을 새롭게 하는데 있으며, 나아가 선에 이르는 것이다.  -대학 1-경수장

어디 학교 뿐인가, 많은 인재들이 그의 도움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이른바 김장하 키즈들이다. 서울대 이준호 교수는 석사를 마칠 때까지 김장하 어른의 도움을 받았다. 일본 사이타마대학 경제학 교수로 있는 우종원씨 역시 운동권으로 감옥을 다녀와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어른의 도움을 받았다. 석 달에 한 번 어른을 찾아뵙고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 말씀드리면 들어주시고 생활비까지 넉넉하게 얹어 학자금을 주셨다고 한다. 
 
후원자를 넘어 사회운동가로 
 

다큐 <어른 김장하>의 한 장면. ⓒ 경남 mbc

 
그런 어른의 생각은 진주 사회 운동 전반에 미친 그의 영향력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형평 운동, 아마도 독립 운동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이름부터 생소한 운동일 것이다. 바로 '공평은 사회의 근본'을 주장하며 일제시대 최초로 사회운동을 벌인 백정들의 인권운동, 그 대표적 인물인 강상호의 묘가 진주 한 동산에 방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 독지가로 인해 묘지 주변이 다듬어지고 묘석까지 번듯하게 세워졌는데, 제작진이 추적하니 그 독지가가 바로 김장하 어른이었다. 

김장하 어른은 공평은 사회의 근본이라 주창한 형평운동이 차별 철폐운동으로 승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그리고 그 생각에 따라 진주의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아낌없이 지원하셨다. 형평 운동의 산역사를 연극으로 옮긴 극단 현장 역시 김장하 어른이 지원이 아니었다면 살아남아 공연을 계속해 나갈 수 없었을 것이다. 

형평의 취지를 되살리고자 하는 어른의 생각은 차별의 곳곳에 지원으로 이어졌다. 아직 '여성의 인권'을 말하는 것조차 어려운 사회 분위기 속에서 가정 폭력 피해자를 외면하지 않았으며, 피해자들과 피해자 자녀들의 재활을 위한 '진주 내일을 여는 집' 지원에도 앞장섰다. 

1990년 시민 700명의 뜻을 모아 탄생한 <진주신문>의 창간 주주였던 김장하 어른은 신문이 폐간될 때까지 매달 1000만 원 안팍의 적자폭을 메워왔었다. 대안문화예술 공간 책마을을 위해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다큐를 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느낄 것이다. 진주라는 지역의 사회문화 운동에 있어 김장하 어른의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무주상보시의 삶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의 한 장면. ⓒ MBC 경남

 
하지만 김장하 어른을 이 시대의 존경할 만한 어른이라 할 수 있는 건 비단 그가 자신이 번 것들을 기꺼이 다른 이들을 위해 썼다는 사실때문만은 아니다. 김장하 어른의 오랜 친구는 김장하 어른의 삶을 '무주상보시(無主相布施)'라 정의한다. 내가 내 것을 누구한테 주었다는 생각조차 버리는 상태를 뜻하는 불교 용어이다. 

그가 세운 재단에는 교사 채용 관련 몇 가지 원칙이 있었다. 1. 친척은 안 된다. 2. 돈을 받아서도 안 된다. 3. 권력의 입김을 받아서도 안 된다.

국회의원 지인이 교사로 채용된 걸 안 어른이 대번에 무효화하는 바람에 교육부 감사를 받기도 했었다. 어디 감사뿐일까, 오로지 한약방 하나, 그의 말처럼 깨끗하게 살아온 그의 이력이 그런 권력의 서슬을 피하게 도왔다. 

하지만 그렇게 애를 써서 키운 재단도, 본궤도에 오르면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처음 자신의 뜻에 따라 1991년 국가에 헌납했다. 말이 학교 헌납이지, 그의 한약방 건물을 제외한 학교 건물과 부속재산까지 합쳐서 전재산 110억 원 상당을 그대로 넘긴 것이다. 

사회 운동을 하다 어려워 어른을 찾으면 마치 준비라도 해놓은 것처럼 하얀 봉투를 기꺼이 내주셨다고 한다. 얼마나 많은 이들을 도왔는지 기억할 이유조차 없어 보이는 김장하 어른, 때로 장학금을 주셨는데 특별한 사람이 못 돼서 죄송하다는 이들에게 어른은 말한다.

우리 사회는 바로 그 평범한 이들로 이루어진 곳이라고, 이 사회에 있는 것을 너한테 주었으니 갚아야 된다고 생각하면 이 사회에 갚으라고.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는 덕분에 김장하라는 이름조차 우리에게 생소한 분, 뒤늦게라도 퍼져나가는 어른의 존재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안긴다. 
 
바로 잡습니다
애초 기사에 사실관계가 다른 부분이 있어 바로 잡습니다. 다큐 <어른 김장하>는 지난 23일, 24일 MBC를 통해 2부로 나뉘어 방송된 바 있습니다. 또한 김장하 선생은 명신중·고등학교가 아닌 명신고등학교를 세웠으며, 학교법인은 명신재단이 아닌 아호(남성, 南星)를 딴 '남성학숙'입니다. 그리고 장학사업과 문화예술지원을 위해 남성문화재단을 설립했습니다. 잘못된 내용으로 인해 김장하 선생을 비롯한 관계자 여러분과 독자들에게 혼선을 드려 죄송합니다. 
어른 김장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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