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2.20 11:34최종 업데이트 23.02.20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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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 외교부 장관이 18일(현지시간) 독일 뮌헨 안보회의가 열리는 바이어리셔 호프 호텔에서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추정되는 장거리탄도미사일을 발사한 것과 관련 긴급회동에서 발언하고 있다. 옆에는 하야시 요시마사 일본 외무상. 2023.2.19 ⓒ 연합뉴스

 
현지 시각 18일 독일 뮌헨에서 하야시 요시마사 외무대신과 회담한 박진 외교부 장관이 정치적 결단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회담 뒤 그는 자신이 일본 측을 상대로 성의 있는 호응을 위한 정치적 결단을 촉구했다고 밝혔다. 

<산케이신문> 온라인판인 19일 자 <산케이뉴스>에 실린 "징용공 문제, 한국 외상 '일본은 정치적 결단을'(徴用工問題 韓国外相 日本は政治的決断を)"이라는 기사에 따르면, 박 장관은 일본뿐 아니라 한국의 정치적 결단도 언급했다. 이 기사의 제목만 보면 그가 일본 총리의 결단만 촉구한 것처럼 보이지만, 기사 본문에 이런 대목이 있다. 괄호 속은 <산케이뉴스> 원문 그대로다.
 
박씨는 '쌍방의 입장은 이해되고 있고, 지금은 (일·한) 모두 정치적 결단만이 필요한 상황이다'라고 강조.
 
이에 따르면, 박 장관은 한·일 양측의 정치적 결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의 발언은 사과 표명 및 기금 형성과 관련된 일본의 정치적 결단을 촉구한 것이기보다는, 이 문제 마무리를 위해 양국 정상이 최종적으로 나서야 할 필요성을 강조한 것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 사안을 종결 국면으로 이행하려는 의중을 표시했다고 볼 수 있다.

지난달 30일 서울에서 후나코시 다케히로 외무성 아시아대양주국장과 협의한 서민정 외교부 아시아태평양국장은 "저와 후나코시 국장은 앞으로도 고위급을 포함한 다양한 레벨에서 외교당국 간 긴밀한 소통을 지속해 나가기로 하였습니다"라고 브리핑했다. 그는 쌍방의 인식 차이가 아직 남아 있다면서 상급 수준의 협상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 뒤, 외교부 국장급보다 상위 레벨에서 협의가 신속히 진행됐다. 이달 13일에는 조현동 외교부 제1차관과 모리 다케오 외무성 사무차관이 워싱턴에서 협의했다. 양국 외교부는 여기서 결론이 도출되지 못했다면서 닷새 뒤 뮌헨에서 외교장관 협의를 했다. 여기서도 결론이 도출되지 못했다면서 이제는 양국 정상들의 결단을 촉구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1965년 한일협정 때와 유사한 상황

외교부가 강제징용(강제동원) 피해자와 유족들을 찾아다니고 외교부 장관이 피해자 이춘식에게 큰절(2022.9.2)을 올리는 등의 일부 장면을 제외하면, 지금 상황은 1965년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 협정(통칭 한일협정) 때와 유사한 측면이 많다.

한국 정부가 사과·배상에 대한 요구 없이 관계정상화만을 추구하는 굴욕적인 장면이 연출되는 것도 그렇고, 미국이 신속한 해결을 촉구하면서 양국을 재촉하는 장면이나 한·미·일 3국 협의들이 뒤엉킨 가운데 한·일 외교라인이 분주히 움직이는 장면도 그렇다.

또 일본 정부가 한국의 막판 분발을 독려하고자 한일정상회담 카드를 활용하는 모습도 비슷하다. '한국이 징용 문제를 해결하면 윤 대통령을 5월에 열릴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에 초청하겠다'는 말이 일본에서 계속 나오는 것과 비슷하게, 1965년에는 사토 에이사쿠 총리가 박정희 대통령의 분발을 촉구하고자 '5월에 미국을 방문하는 길에 혹은 미국 방문 뒤 돌아가는 길에 일본에 들러달라'고 요청했다.

하지만, 이 방일은 한일협정에 대한 반대 여론 때문에 무산됐다. 그 뒤로도 박정희는 방일을 계속 시도했지만, 1979년 10·26사태 때까지 번번이 무산됐다. 1964년과 1965년의 거국적 반일 시위를 목격한 것이 그의 발목을 매번 붙들었다고 볼 수 있다.

위와 같은 장면들에 더해, 지금과 1965년에 공통되는 또 다른 장면이 있다. 양국 정부가 한국인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협상을 진행하다가 최종 국면에 진입하는 단계에서 '정치적 결단의 필요성'을 부각하는 장면이 그것이다. 박진 외교부 장관이 결단의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양국 정부 수반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과 유사한 양상이 1965년 6월 22일 한일협정 정식 조인에 앞서 가조인(2.20)이 임박한 시점부터 두드러졌다.

일례로, 그해 1월 12일 자 <동아일보> 기사 '정치적인 결단 단계'는 "한일 두 나라는 14년째로 접어든 한일 현안문제에 '정치적인 결단'을 내리게 될 것이라고 12일 아침 이동원 외무부 장관이 말했다"라며 "한·일 두 나라는 동 결단을 위한 몇 차례의 정치회담을 갖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같은 신문 2월 2일 자 기사인 '2월 중순 서울에서 한일외상회담'은 "추명(시이나) 일본 외상의 서울 방문으로 이동원 외무장관과의 사이에 열릴 한일외상회담의 중요 과제는 국교정상화를 위한 기본 관계를 해결하는 방법과 실무교섭에서 교착 상태에 빠져 있는 어업협상을 위한 고차적인 정치 타결 시도에 놓여 있다는 관측이다"라고 보도했다.

같은 신문 4월 5일 자 '정치 절충 아직 남아'는 한국 정부가 정치적 타결을 모색하고 있다면서 "아마 박 대통령의 방미를 전후하여 많은 수뇌급의 내왕이 있으므로 끝에 가서 마지막으로 정치 협상이 또 한번 있지 않나 보는 측이 많다"라고 전했다.

박정희의 5월 방일이 무산된 뒤인 6월 3일에도 정치적 결단의 필요성이 강조됐다. 이번에도 이동원 외무장관이 입을 열었다.

이날 발행된 <경향신문> '한·일 현안 20일께 정식 조인'은 "이 장관은 추명 일본 외상으로부터 한일회담 촉진에 대한 서한을 받았다는 점을 시인하고, 일본 측이 양국 외상 간의 정치 절충을 통해 미해결 문제를 타결짓자는 제의를 해왔다고 말했다"라는 사실을 보도했다. 일본에 가기 힘들어진 한국 대통령을 대신해 외교장관이 일본 카운터파트와 만나 정치적 타결을 모색해야 한다는 요구가 일본에서 나왔던 것이다.

강제징용·위안부·강제징병 등에 대한 사과 및 배상 없이 양국 관계를 정상화하는 문제에 관한 박정희 정권과 일본 간의 정치적 결단은 1961년 11월 12일 박정희-이케다 회담 때 이미 내려졌다고 볼 수 있다. 대통령이 아니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인데도 "국빈에 상응한 대우"(동아일보 1961.11.8)를 받고 도쿄로 날아간 박정희는 '일본에 대한 청구권을 행사할 의향이 없다'는 점을 명확히 표명해서 일본 정·재계에 충격과 감동을 주었다.

한국인이 마음의 준비 하도록

이렇게 이미 1961년에 내려진 정치적 결단에 따라 한·일 외교부가 움직였다. 그런데도 1965년 상반기에 양국 정부는 결단의 필요성을 자주 강조했다. 박정희의 결단이 일본 측에 이미 전달된 상태였으므로, 1965년 상반기에 외무부 장관이 이를 강조한 것은 양국 정상의 정치적 결단을 끌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국인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해석될 여지가 크다. 최종 마무리가 임박했음을 예고해서 국민의 충격과 반발을 사전에 완충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풀이될 수 있다.

박 정권이 그런 의도가 있었다는 점은 결단의 필요성을 명분으로 야당을 움직이려 한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이동원 장관의 '정치적 결단' 발언을 보도한 위의 1965년 1월 12일 자 <동아일보>에 따르면, 이 장관은 결단이 임박했다고 말한 뒤 야당의 협조를 주문했다. "그는 또한 한·일 문제 해결을 위한 야당의 대안에 언급, 금주 중으로 여야 대표자 회의를 마련해서 이견을 조정하기를 희망했다"라고 기사는 보도했다.

결단을 운운한 외무부 장관이 엉뚱하게도 야당을 상대로 이견 조정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여당 당직자가 아닌 외무부 장관이 야당에 그런 주문을 했다. 그가 정치적 결단을 운운하면서 야당을 겨냥한 것은 협정 반대 세력이 심리적 준비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고 볼 수 있다.

작년 5월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의 한·일 협상은, 일본은 그 자리에 가만히 있는데 한국만 일본 쪽으로 움직이는 양상으로 전개돼왔다. 일본은 '사과·배상은 없다'는 입장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은 반면, 한국은 그런 일본의 입장을 향해 계속 '동진'했다.

그래서 지금 한국의 입장은 일본과 거의 비슷하다. 피해자에 대한 금전 지급은 한국 정부 산하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처리하고 전범기업과 일본 정부의 사과를 요구하지 않는 쪽으로 한국 정부의 입장이 굳어져 있다. 과거의 사과 담화를 계승한다는 의지를 표명해주면 사과 받은 것으로 대신하겠다는 입장도 현저해져 있다. 다만, '배상은 하지 않더라도 약간의 기부로 성의 표시는 해줘야 하지 않나'라고 주문하고 있는 점만 일본의 입장과 다르다.

한국의 입장이 일본과 거의 유사한 것은 윤 정부가 이미 정치적 결단을 내린 상태에서 이 문제에 임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협상은 일본의 요구를 대폭 수용하는 선에서 개시됐다. 이는 윤 정권의 정치적 결단이 외교부의 대일 협상을 이미 지배해왔음을 의미한다.

이렇게 이미 정치적 결단에 따라 대일 협의를 전개해온 윤석열 정부가 이제 와서 정치적 결단의 필요성을 운운하는 것은 1965년 상반기의 굴욕적 상황을 되새기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윤석열 정부는 1965년을 거의 그대로 재현하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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