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9.19 11:28최종 업데이트 23.09.1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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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0일 동성 부부로는 최초로 임신 사실을 공개한 김규진·김세연 부부가 딸을 출산한 사실이 알려졌습니다. 수많은 축하의 목소리 속에서도 종종 '악플'이 달리는 것을 보고 안타까워했던 김은화 딸세포 출판사 대표가, 김규진·김세연 부부를 향해 공개 응원 편지를 보냅니다.  [편집자말]

지난달 30일 새벽 4시 30분 국내 첫 레즈비언 부부인 김규진(32)·김세연(35)씨의 딸 '라니'(태명)가 태어났다. 31일 연합뉴스와 통화에서 출산 소감을 밝힌 규진씨와 세연씨는 '국내 첫 임신 레즈비언 부부'이자 '국내 첫 출산 레즈비언 부부'가 됐다. ⓒ 연합뉴스

 
안녕하세요, 규진님. 저는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 김은화라고 합니다. 사회생활 할 때는 상당히 친절한 사람입니다만 평범한 한국 남자와 결혼해 살다보니 지옥에서 온 페미니스트가 되어버렸네요.(웃음) 지난해 이맘때 출산해 돌쟁이를 키우는 아기 엄마이기도 합니다. 규진님의 출산을 축하드리고자 이 편지를 씁니다.

지금은 조리원에 계신다고요. 라니(태명)를 안을 때 얼마나 벅찬 마음일까요. 참 신기하죠.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눈사람 배아에 불과했던 것이 사람의 형상을 하고서 세상 밖으로 나왔으니 말이에요. 저도 시험관으로 아이를 가졌는데요, 그맘때의 저는 무사히 엄마가 되었다는 사실에 감격하며 꼬물거리는 아가가 신기해서 눈을 떼지 못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수유 콜을 받느라 눈이 항상 퀭했지요. 어차피 집에 가면 두 시간 간격으로 먹이느라 잠도 제대로 못 주무실 텐데, 조리원에서라도 푹 쉬다 오시길 바라봅니다.

엄마가 둘이면 왜 안 되나요?
 

김규진씨가 쓴 책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 겉표지 ⓒ 위즈덤하우스

 

규진님과 세연님의 출산 소식에 대한 반응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생기더라고요. 혐오성 댓글보다 두 분을 지지하는 분들의 댓글이 더 눈에 들어왔지만, 페미니스트로서 저도 몇 자 남겨보고자 합니다.


먼저 가족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분들의 의견에 대한 반박입니다. 엄마와 아빠가 둘 다 있어야 하는데 아빠가 없으니 문제라고 보는 시선에는, 뿌리 깊은 성별 역할 규범과 한부모가정에 대한 혐오가 담겨 있습니다.

저 역시 한부모가정 출신이기도 한데요, 세상에는 아버지가 있어서 불행한 집도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가부장제가 남성에게 부여하는 권력은, 종종 가족 구성원에 대한 폭력으로 나타나곤 합니다. 자녀를 소유물로 여기거나 부인을 경제적, 정서적 식민지로 여기고 착취하는 남성도 있지요. 물론 세상에는 모범적인 아버지가 더 많겠지만, 생물학적인 아버지라고 해서 모두가 그 역할을 자동으로 해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 역할은, 결국 밖에서 돈을 벌어와 아이를 사랑으로 키우며 사회에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해 주는 것입니다. 그걸 여성 둘이 하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요? OECD 성별임금격차 1위를 기록하는 한국에서 여여 커플이 경제적으로 불리할 수는 있겠습니다만, 그것은 사회구조의 문제이지 개인의 잘못은 아닙니다. 누가 됐든 경제적 능력으로 부모 자격 운운하는 것은, 주제넘은 짓이기도 하고요.

저는 오히려 엄마가 둘인 집이, 엄마가 하나인 집보다 아이에게 더 좋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남성과 결혼한 여성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하곤 합니다.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여기에는 파트너가 가사노동과 육아를 동등하게 책임져 주길 바라는 마음과 함께, 본인이 돌봄 받고 싶은 소망도 담겨 있습니다. 이성 부부의 경우, 이런 역할은 보통 아내의 역할로 인식되고 남성은 생계부양자로서의 역할이 우선시되니까요.

예컨대 여성에게 주어지는 출산휴가가 100일인 데 비해 남성의 출산휴가는 10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100일 대 10일이라니요. 아이의 생애 초기, 엄마가 아빠에 비해 돌봄을 10배나 많이 수행한 결과는 훗날 어마어마한 차이로 돌아옵니다. 이를 보여주는 결과물이 있습니다. 저희 집에 놀러 오는 사람들의 돌봄 능력의 순위를 매기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유자녀 여성으로서 돌봄 경력자(양가 할머니 포함)
2. 비혼 여성으로서 반려동물 돌봄 경력자
3. 유자녀 남성(남편 포함)


네, 그렇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제 남편보다, 고양이를 키우는 비혼 여성 친구가 아이와 더 잘 놀아줍니다. 슬픈 일이지요.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두 분이라면 아실 거예요. 작은 생명체와 교감하려면 일단 몸을 낮춰 눈높이를 맞추고 관심 있게 지켜보며 조심스레 다가가야 한다는 걸요. 돌봄 경험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제 남편은 아이와 가깝게 지내고 싶어 하지만 좀처럼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돌봄은 기본적으로 감정노동입니다. 말해지지 않은 타인의 욕구를 분석하고 채워줘야 하는데, 심지어 그 타인이 약자라면요? 작은 생명체를 위해 눈을 맞추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는 데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자기보다 강한 생명체 앞에서 눈치를 보는 일이야 생존본능이고 사회생활 하면서 평생 단련되는 스킬이지만, 돌봄은 다른 종류의 예민함을 필요로 합니다. 자발적으로 몸을 낮추고 사랑으로 관찰하며 헌신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내가 먹고 자고 쉬고 싶은 욕구를 뒤로 미루면서까지요.

이 태도를 어떻게 해야 알려줄 수 있을까요. 여하튼 저는 남편을 되는대로 열심히 훈련시키고 있습니다. 전보다는 아기가 아빠를 더 친근하게 여기는 것 같아요. 하지만 가끔 '현타'가 오곤 합니다. 애 돌보면서 제 한 몸 건사하기에도 힘들어 죽겠는데 남편 돌봄 교육까지 담당해야 하다니요. 그렇다면 저는 도대체 누가 돌봐주나요.

'가족 각본' 깨트리기
 

성소수자와 성소수자들의 인권과 권리를 지지하는 내외국인들이 참여하는 ‘피어나라 퀴어나라 - 제24회 서울퀴어문화축제’가 지난 7월 1일 서울 을지로 2가 일대에서 열렸다. 퀴어문화축제에 참석자들이 을지로 2가를 출발해, 명동역, 한국은행앞, 서울광장, 종로를 지나는 도심행진을 벌이고 있다. ⓒ 권우성


최근 맘 카페에서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습니다. 사연은 이렇습니다. 남편이 육아휴직 중임에도 불구하고 육아에 있어서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르고, 부인인 자신이 이유식을 만든다거나 스케줄 관리, 육아 정보 습득 등 주도적으로 나서야 하는 상황에 불만을 토로하는 내용이었어요.

저는 격하게 공감했습니다. 제 남편도 육아휴직 중에 그랬거든요. 저 같은 여성들이 달려와서 댓글로 화를 내기 시작했어요. 남편이 똥만 싸러 가면 함흥차사다, 다음 생엔 나도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는 등의 댓글도 있었지만 가장 눈에 띄는 첫 번째 댓글은 이거였어요.

"다음 생엔 남자나 레즈비언으로 태어나야겠다."

이겁니다! 이거예요! 동성 커플의 결혼 및 출산은 사회에 이런 상상력을 보태줍니다. 나에게 부여된 성 역할이 부당하다, 다른 여여 커플, 남남 커플은 이렇게 살지 않겠지 하는 생각을 하도록 샛길을 터주는 거예요.

김지혜 강릉원주대 교수는 <가족 각본>에서 말합니다. 가족은 성별 역할에 기반해 잘 짜인 한 편의 연극 같은 것이라고요.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 이들이 내세우는 "며느리가 남자라니!"라는 문구를 대표적인 예로 들어 설명합니다. 전통적으로 가족 내에서 며느리가 해왔던 역할을 과연 남성이 수행할 수 있겠느냐, 그리되면 집안이 망한다는 뜻이 담긴 문장인데요.

사실 이상한 그림이긴 합니다. 한 집안의 며느리로서 여성에게 당연히 부과되어 왔던 일(시부모 모시기, 제사 지내기, 친척 대접, 가사노동, 출산 및 양육)을 남성이 한다는 게 저로서도 상상이 잘되지 않아요. 예를 들어 제 부모한테도 살갑게 굴지 못하는 남편이, 장모님 수발을 든다는 게 어디 말이나 되나요. 그렇게 끔찍이 사랑하는 자기 딸한테도 점수를 못 따고 있는데요.

그런데 말입니다, 여성인 제가 기존의 며느리 역할로 규정해놓은 업무를 수행하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현재 60대인 저희 어머니 세대는 어쩔 수 없이 해왔지만, 지금 저희 세대에서 며느리한테 저렇게 많은 업무를 요구했다가는 고부 관계가 단절될 수 있어요. 요즘 세상에 며느리 역할이 웬 말입니까. 효도는 셀프라고요.

그러니 며느리가 남성이라고 생각하면 기대할 수 없는 일은, 여성에게도 기대하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성별이야 어찌 됐든 남의 집 귀한 자식이잖아요. 이 논리를 확장시켜 보면 가족 내에서 애초에 엄마 역할, 아빠 역할이라고 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이릅니다. 각자 능력과 상황에 따라 협상 가능한 것이지요. 부모 역할을 둘이서 하면 좀 더 수월하겠지만, 비협조적인 파트너라면 혼자 하는 게 더 나을 테고요.

규진님의 출산 소식에 화를 내는 분들은, 이런 논리에 '버튼'이 눌린 게 아닐까 짐작해봅니다. 임신, 출산이 그나마 성별 역할 규범의 근거로 내세우는 것인데 레즈비언 커플의 출산은 그 희박한 근거마저 의미를 상실하게 만드니까요. 규진님의 이러한 행보는 세간의 논리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키겠지요. 

라니와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을 위해
 

지난 2022년 5월 4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어린이날 100주년 ‘어린이차별철폐의 날’ 선포 기자회견에 참석한 어린이들이 차별금지법 제정을 촉구하며 ‘노키즈존 나빠요, 차별금지법 좋아요’라고 적힌 글씨에 색칠을 하고 있다. ⓒ 유성호

 
유아차를 밀고 다니면서 장애인 분들의 이동권 투쟁에 대해 생각합니다. 유아차의  네 바퀴가 지나는 길은, 그분들이 휠체어에서 내려와 온몸으로 투쟁해 가며 깔아놓은 길이잖아요. 제가 유아차를 끌고서 지하철에 드문드문 설치된 엘리베이터를 타고서 불편하게나마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장애인분들 덕분입니다.

공공시설에서 계단을 만날 때마다 세상이 거대한 노키즈존으로 느껴집니다만, 장애인 분들의 용기에 힘입어 저는 계단 앞에서 민원을 넣습니다. 그 덕분에 얼마 전에는 제가 사는 동네의 산책로 진입 구간에 경사로가 생겼어요. 3개월 전에 넣은 민원이 수리된 것이지요! 세상이 문을 걸어 잠근다면, 그 문을 두드리고 고함치고 우회하여 결국은 박살 내는 사람이 있잖아요. 배제된 사람들의 힘은 그런 데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규진님은 레즈비언으로서 정체성을 오픈하고 임신과 출산 소식을 알리며, 다른 삶도 가능하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랑을 위해 한 발 한 발 용기 내서 나아가고 있는 규진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요. 저는 제 아이가 살아갈 세상이 한계 없이 넓었으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타고 태어난 것으로 인해 차별받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게 성별이든 성적 지향이든 계급이든 간에요. 

보수적인 한국 사회는 있는 것을 자꾸 없는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대통령은 구조적인 성차별은 없다고 단언하고, 이미 가족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을 법 밖의 존재로 만듭니다. 그렇게 비존재로 만들어서 얻고자 하는 것이 뭡니까? 가부장제 하의 '정상 가족' 기획은 이미 실패했습니다. 세계 최저의 출생율이 실패를 보여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진정 미래를 걱정한다면, 한국 사회는 답해야 합니다. 생활동반자법이, 차별금지법이, 비혼 여성이든 레즈비언 커플이든 혼외 관계든 원하는 사람은 아이를 갖고 키울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길을 열어주기를 바랍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아니라 온 사회가, 국가가 필요합니다.

법을 바꾸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겠지요. 그전에 먼저 사람들이 라니를 향해 몸을 낮추고 다정하게 웃어주는 이웃이 되어주면 좋겠습니다. 아이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란다면 이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방관자인 척하면서 기득권의 편에 설 것이 아니라, 그 반대편에 서서 세상을 향해 싸워주길 바랍니다. 저도 그편에 함께 하겠습니다. 규진님이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에 썼듯 당장 거대한 악을 내가 직접 모두 물리칠 수는 없지만 하루하루 작은 차별과 혐오와는 싸워나갈 수 있으니까요. 

당신처럼 용기 있는 여성과 동시대에 아이를 낳아 키운다는 사실이 기쁩니다. 아이가 낮잠 자는 동안 틈틈이 메모해 둔 글을 그러모아 편지를 보냅니다. 이성애자 기혼 여성으로서 불편한 내용을 적은 것은 아닐는지 읽고 또 읽어봅니다. 거친 대목이 있더라도 부디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규진님, 세연님, 엄마가 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라니야, 이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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