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0.06 17:21최종 업데이트 23.10.07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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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 정문. ⓒ 권우성

 
육군사관학교가 홍범도 장군 흉상뿐 아니라 안중근 의사 등을 기념하는 공간마저 철거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육사가 충무관 내의 독립전쟁 영웅실을 치우기로 결정하고 지난 7월 육군본부에 예산을 청구한 일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이다.

육사가 철거하기로 한 홍범도 흉상은 충무관 앞에 있다. 그 충무관 건물 내에 홍범도·이회영·김좌진·지청천·박승환·이범석과 더불어 안중근의 이름을 딴 각각의 독립전쟁 영웅실이 있다. 공사비 3억 7천여 만 원을 들여 이곳을 철거한다는 것이 육사의 방침이다.


JTBC 등 언론에 보도된 육사 문건에는, 그동안 영웅실에 대한 문제 제기가 많았으며, 특정 인물을 기리는 공간을 시대별 국난 극복의 역사를 학습하는 공간으로 변모시킬 필요성이 있다는 취지의 내용이 적혀 있다. 또 영웅실로 인해 생도들의 휴게실과 문화실 개선에 제한이 있었으며, 금년 10월로 예정된 한미동맹 70주년 행사에도 제약이 따른다는 등의 사유를 명분으로 영웅실 폐지가 추진되고 있다.

윤석열 정부의 역사인식을 홍보하는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은 중국 뤼순감옥 박물관에서 안중근 전시실이 일시 폐쇄된 일을 두고 지난 8월 6일 페이스북에 "최근 안중근 의사 전시실과 윤동주 시인 생가를 폐쇄했다는 보도를 봤다"며 "안중근과 윤동주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항일지사로 한국인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 숨 쉬는 걸 중국 정부에서 과연 모를까"라고 썼다. 그런 뒤 "소인배나 갈 법한 길을 가고 있다"고 중국을 비판했다.

우리 외교부 내에서 이 발언에 대한 불만이 제기됐다는 보도도 있었다. 안중근 전시실 일시 폐쇄와 관련해 우리 외교부가 "내부 보수공사 때문"이라고 설명을 했는데도, 박민식 장관이 상황에 맞지 않는 과도한 발언을 했다는 이유에서다.

안중근은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항일지사이며 안중근을 배척하는 것은 소인배의 행동이라는 발언이 이처럼 8월 초 윤석열 정권에서 나왔다. 바로 그 직전에 육사에서는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안중근의 공간을 아예 철거하기 위한 움직임이 구체화됐다. 안중근에 대한 모독이 중국보다 한국에서 더 강도 높게 벌어진 셈이다.

4일 자 언론에 보도된 또 다른 육사 문건인 '초일류 육사 구현을 위한 학교발전 현장 토의'에 따르면, 독립전쟁 영웅실 철거를 요구하는 측은 '특정 시기 및 단체 관련 중복 및 편향성'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시대별 국난 극복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으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윤석열 정권, 독립운동을 어떻게 생각하길래...
 

2018년 6월 8일, 서울 노원구 육군사관학교에 설치된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과 항일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홍범도·김좌진·지청천·이범석 장군 등의 흉상에 신흥무관학교 107주년을 맞아 꽃목걸이가 걸려 있다. ⓒ 이희훈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국난 극복 역사를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당연히 의미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독립전쟁 영웅실의 철거를 꼭 수반해야 하는가는 의문이다. 더군다나 대일 굴욕외교로 국민감정이 불편해진 시기에 하필이면 항일투사 기념실을 치우는 것이 시의적절한가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 게 아니라, 까마귀 날자 배 떨어트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육사 내의 기념물들은 대체로 20세기 역사와 관련이 있다. 항일 독립전쟁이나 한국전쟁 시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육사 홈페이지의 '육사 소개' 코너의 하위 코너인 '기념시설 및 기념물'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1965년에 부하를 살리고자 수류탄을 안고 스스로 희생된 강재구 소령의 동상, 건군 20주년을 기념하는 건국탑, 육사의 교육 이념을 담은 교훈탑은 20세기와 관련된 기념물이다.

또 한국전쟁 때 희생된 육사 2기생들을 기리는 참전생도상, 그때 희생된 10기생들을 추모하는 불멸탑, 대통령상 수상자 등을 기념하는 백년탑, 4년제 육사 개교에 기여한 벤플리트 장군의 동상, 19기생들의 졸업을 기념하는 승화대, 한국전쟁 때 고도의 전투력을 보여준 심일 소령의 동상 및 전공기념비, 6기생들의 임관 30주년을 기념하는 통일탑, 15기 생도의 졸업 기념물인 오성탑 등도 20세기와 관련된다. 20세기와 관련된 기념물은 이 외에도 여럿이다.

육사가 독립운동가들의 공간을 없애면, 육사 기념물들은 20세기 중에서도 후반과 집중적인 관련을 갖게 된다. 시기적 편중성이 한층 더 심해지게 된다. 따라서, 시기적 편중성을 해소하고자 영웅실을 폐지한다는 말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는다. 영웅실 폐지를 정당화할 사유는 현재로서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은 홍범도가 소련이나 공산주의와 가깝다는 이유로 그의 흉상 철거를 합리화했다. 그런데 지금 추진 중인 영웅실 철거는 그 논리와 배치된다.

홍범도는 소련에 가기는 했지만 공산주의자로 분류되기에는 애매했다. 이회영은 좌파이지만 공산주의와는 거리가 멀다. 그는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였다. 나머지 다섯 인물은 좌파와 거리가 멀다.

안중근은 특히 그랬다. 그는 제국주의에 대항했다는 점에서는 진보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정치 성향은 보수에 가까웠다. 회고록인 <안응칠 역사>에서 밝혔듯이, 그는 동학혁명에 맞서 싸운 보수파다. 아버지 안태훈과 함께 민병대를 조직해 동학군 토벌에 가담한 이력이 있다.

그런 안중근의 공간까지 치운다는 것은 영웅실을 없애려는 윤석열 정권의 진짜 의도가 좌파니 공산주의니 하는 것과 별 관련이 없음을 보여준다. 흉상 문제와 영웅실 문제를 관통하는 공통점은 '총을 들고 일본에 대항한 인물'들과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윤석열 정권이 그들의 흉상이나 공간을 치우고자 하는 동기는 독립운동에 대한 윤석열 정권의 인식이나 평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독립운동에 높은 가치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의 이 사달을 만들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독립운동가 일곱 분이 '불령선인'인가
 

2018년 8월 14일, 제73주년 광복절 및 정부수립 70주년을 맞아 방한한 안중근 의사의 증손자 토니 안씨가 서울 중구 안중근의사기념관에서 안중근의사 대형 좌상을 바라보고 있다. ⓒ 연합뉴스

 
일곱 독립투사 같은 인물들을 일제는 당연히 혐오했다. 일제가 그런 인물들에 대한 혐오를 표시할 때 사용한 표현이 있다. 불온한 조선인이라는 의미의 불령선인(不逞鮮人)이 그것이다. 일본인들은 홍범도나 안중근 같은 인물들을 '후테이센진'으로 부르며 경멸감을 표했다.

<백범일지>에는 상하이 임시정부 경무국장 시절의 백범 김구를 불쑥 방문한 박씨라는 청년이 등장한다. 이 청년은 초면인 김구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단총과 수첩을 쑥 내밀었다.

그는 돈 벌려고 상하이에 온 자신에게 일본 영사관 직원이 접근해 김구 암살 책임을 맡겼다면서 "만일 불응하면 불령선인으로 엄벌한다"는 협박까지 받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청년은 권총과 수첩을 넘겨준 뒤 장사를 하러 간다며 사라졌다. 김구는 '불령선인'에게 고맙다고 말했다. "나는 감사의 뜻을 표하였다"고 <백범일지>는 말한다.

불령선인이라는 표현은 1923년 관동대지진(간토대지진) 및 관동대학살(간토대학살)과 2011년 동일본대지진 때도 회자됐다. 2018년에 <일본근대학연구> 제60집에 실린 노윤선의 논문 '일본 지진을 통해 바라본 혐한과 혐오 발언에 대한 고찰'은 동일본대지진 당시를 설명하면서 "혐한 시위의 현수막 가운데에서 관동대지진 때 사용된 불령선인이라는 단어를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재일한국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이 오랜 세월이 지나도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평했다.

한국인 독립운동가나 반체제 인사를 경멸적으로 부르던 불령선인이란 표현이 지금도 재일한국인들을 겨냥해 사용될 때가 있다. 일본이 독립운동가들을 얼마나 싫어했는지가 이런 데서도 드러난다.

불령선인에 대한 그 같은 혐오는 일제가 독립운동가 이상룡의 집을 반토막 낸 사실에서도 느낄 수 있다. 일제가 철로를 깐다는 핑계로 임청각을 반토막 낸 것은 이 집에서 불령선인이 무려 아홉 분이나 배출됐기 때문이다. 불령선인이 있었던 공간에 대해 일제가 어떤 시각을 가졌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홍범도나 안중근 같은 독립운동가를 위한 흉상이나 기념 공간을 정당한 명분 없이 없애는 것은 남의 집을 반토막내는 것 만큼이나 야만스러운 일이다. 이런 일은 일본이 자신들에게 대항하는 불령선인들에게 저질렀던 일이다.

독립전쟁 영웅실의 일곱 분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죄를 짓거나 폐를 끼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윤 대통령을 포함한 한국인들의 오늘을 있게 만들어줬다. 그런 은인들의 공간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그들을 불령선인으로 폄하했던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나 어울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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