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03 15:13최종 업데이트 23.11.03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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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27일 경북 칠곡군 다부동 전적기념관에서 열린 '이승만·트루먼 대통령 동상 제막식'에서 시민들이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을 남기고 있다. ⓒ 연합뉴스

 
윤석열 정권은 전쟁 위기를 강조하는 데 여념이 없는 듯하면서도, 이와 상반된 모습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이승만과 백선엽 동상을 건립하기 위해 곳곳에서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은 윤석열 정권이 정말로 전쟁 발발을 우려하고 있는지를 의심케 만든다. 가정이든 국가든 위급 상황이 예견될 때는 중요 상징물이나 조형물을 치우기 마련이다. 또한 그런 것을 설치할 계획이 있었더라도 나중으로 미루게 된다.

왕조 국가들은 긴급한 상황이 예견되면 역대 임금의 어진부터 긴급히 피신시켰다. 광해군 정권의 핵심 실세인 이이첨이 하위직인 광릉참봉 일을 하다가 32세 때인 1592년에 조정의 주목을 받은 것도 그 일에서 공로를 세웠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이 발발한 그해에 일본군이 세조 수양대군의 무덤인 광릉에 불을 질렀다. 그러자 이이첨은 불길을 무릅쓰고 뛰어들어 세조의 영정을 보호했다. 어진을 들고 뛰는 과정에서 일본군을 두 차례나 만났으면서도 악착같이 사수했다. 이는 그가 선조와 광해군의 신임과 주목을 받아 일약 도약하는 계기가 됐다.

이승만기념관 건립 위해 500만 원 기부한 대통령... 그뿐만이 아니었다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이 지난 7월 19일 서울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 현충관에서 열린 이승만 초대 대통령 서거 58주기 추모식에 참석하여 추모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위급 상황이 발생했거나 예상된다면 이처럼 상징물을 치우는 게 상례인데도 윤석열 정권은 거꾸로 가고 있다. 북한과의 대결 분위기를 고조시키면서도, 한편으로는 태평스럽게 이승만기념관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달 1일에는 윤 대통령이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에 500만 원을 기부했고, 다음날에는 오세훈 서울시장이 400만 원을 기부했다.

이것에 더해, 이승만 동상을 서울 광화문광장뿐 아니라 워싱턴 주미 한국대사관 앞뜰에도 세우는 방안이 함께 추진되고 있다. 

관련 보도에 따르면 지난 2일 발족된 '이승만 동상 건립 추진모임'에는 정운찬 전 총리, 정의화 전 국회의장, 김장환 극동방송 이사장,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장관, 백선엽 장녀 백남희씨 등 60여 명의 학계·재계·정계 인사가 참석했다. 한국전쟁 당시의 미 8군사령관인 제임스 밴플리트의 외손자인 조셉 매크리스천 주니어 등도 함께했다. 이 자리에는 박민식 국가보훈부장관도 참석해 "정부도 미 의회·정부에 협조 공문을 보내는 등 적극 협조하겠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나아가 <중앙일보>보도에 등장한 이 모임 관계자는 "국가보훈부를 비롯한 정부에서도 동상 건립 추진에 여러 도움을 주고 있다"라고 밝혔다. 민간 단체가 앞장서는 모양새지만 실상은 윤석열 정권이 배후에 있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워싱턴 한국대사관 앞에 세우고자 하는 동상은 광화문에 세우려는 동상이 갖기 힘든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근 180개 국가의 대사관이 모인 워싱턴 매사추세츠가의 한국대사관 앞뜰에 동상이 건립되면, 이승만이 '대한민국의 아버지'라는 이미지가 조장될 위험성이 있다. 세계 외교의 중심지인 그곳에서 한국대사관은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한다. 즉, 미국 안의 대한민국이다. 그런 곳에 동상을 세우면 이승만이 대한민국을 공식 대표한다는 이미지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워싱턴의 튀르키예대사관 앞에는 케말 아타튀르크 동상, 남아공대사관 앞에는 넬슨 만델라 동상, 영국대사관 앞에는 윈스턴 처칠 동상, 인도대사관 앞에는 마하트마 간디 동상이 있다. 이런 동상들이 갖는 국가 대표성을 이승만에게도 부여하는 것이 윤석열 정권의 의중이라 할 수 있다.

윤석열 정권은 이승만이 한국전쟁을 수행하고 한미동맹을 체결한 일을 홍보하고 있지만, 국민들에게 반드시 설명해야 하는 사안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승만을 대통령직에서 끌어내린 우리 국민들의 결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밝혀야 한다.

'K-독재' 선구자의 동상? 한국인들 얼굴에 먹칠하는 것
 

미국 워싱턴 주재 남아공 대사관 앞 넬슨 만델라 동상에 꽃들이 남겨져 있다. 2021.12.27 ⓒ AP/연합뉴스

 
이승만은 단순히 장기집권과 독재만 한 게 아니었다. 그는 헌법 제1조를 위반했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고 선포한 1948년 헌법의 제1조를 위반한 중대 범죄자다.

그는 대규모 민간인 학살을 저질러 국민이 주인이라는 민주국가 이념을 훼손했다. 또 선거 부정을 통해 국민의 선택을 왜곡시켜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여기에 더해 장기 집권과 독재로 공화국 체제의 정신까지 훼손했다. 민주공화국의 '민주'와 '공화' 모두를 살뜰히 위반한 셈이다.

현행 헌법 전문은 이승만과 투쟁한 국민들의 정신을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으로 표현한다. 여기서도 나타나듯이, 이승만은 대한민국헌법이 공인한 '불의한 자'다. 이런 불의한 자의 동상을 워싱턴의 '대한민국 영토' 앞에 세우고자 한다면, 납득될 만한 설명부터 해야 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달 18일(현지시각) 정상회담 때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의 후임 문제를 거론한 일이 미국 정치매체 <폴리티코>의 1일 자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가자지구를 관리하는 하마스와 이전부터 충돌해왔으면서도 지난달 7일의 대공습을 예견하지 못한 네타냐후 총리에게 그런 식으로 책임을 물은 셈이다.

지난 5월 9일과 11일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공습하고 14일 가자지구가 로켓 발사로 응수하자 이스라엘이 곧바로 보복한 사례 등에서도 확인되듯이, 이스라엘과 하마스는 이전부터 이미 준전시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도 10월 7일의 대공습을 사전에 대비하지 못했으니, 책임론이 일어날 만도 하다.

한국전쟁도 남북 간의 충돌이 일상처럼 이어지는 상황에서 벌어졌다. 그랬는데도 이승만 정권은 1950년 6월 25일의 대규모 기습에 대해 사전 준비를 하지 못했다. 임진왜란 때의 선조 임금처럼 도망 다니기에 바빴다. 전세가 역전된 것은 미군의 개입에 의해서였다. 이런 이승만을 한국전쟁 공로자로 치켜세우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일이다.

이승만은 외국군의 힘을 빌려 전쟁을 수행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군사주권까지 손쉽게 내주었다. 이 때문에 지금도 한국군은 독자적인 작전통제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영토를 내주는 것뿐 아니라 군사주권을 내주는 것도 중요한 국가적 상실이다.

윤석열 정권과 극우세력은 한미동맹 체결도 이승만의 업적 리스트에 넣고 있지만, 이 역시 우스운 일이다. 위기 상황에서 군사주권을 내주고 외국의 도움을 청한 것이 그렇게 위대한 업적으로 포장되는 일은 이 세상 어느 나라 역사서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역사는 이런 지도자를 보통 수준이나 보통 이하의 둔재로 평가할 뿐이다.

이승만은 K-독재의 선구자다. 재선을 위해 불법적으로 헌법을 바꾸더니 위헌적인 3선 개헌까지 강행하고 뒤이어 사실상의 종신 군주제로 나아갔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은 민간인 학살과 선거 부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런 이승만의 궤적은 박정희의에 의해 거의 그대로 답습됐다.

이승만이 개척한 K-독재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다. 정권 출범 초기에 국민과 정권 사이의 선을 명확히 긋는 정체성 확인 작업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 정권은 출범 직후인 1948년 후반기부터 친일청산을 무산시키는 일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는 정권의 정체성이 반민족이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자, 이들이 의지하는 최대 기반이 국민 다수가 아닌 강대국 군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박정희 정권 역시 쿠데타 직후인 1961년 하반기부터 대일 굴욕외교를 추진하며 국민들의 식민 지배 청산 요구를 거부하다가 민간정부 출범 직후인 1964년부터 국민들과 대규모로 충돌했다. 이·박 두 정권은 국민 다수와 척지고 외국군에 의존하며 3선 개헌과 영구 집권으로 가면서, 국민 탄압과 선거 부정을 불사하는 K-독재의 궤적 위에서 움직였다.

윤석열 정권이 워싱턴 한국대사관 앞에 이승만 동상을 세우면, 이는 K-독재의 원조를 미화하는 일이 된다. 이승만은 충분히 예견되는 전쟁을 방지하지 못해 기습을 당하고 외국의 도움으로 간신히 정권을 지켜낸 뒤 외국과의 동맹에 의존하며 군사주권을 포기했다.

이런 '둔재'를 아타튀르크·만델라·처칠·간디 급의 위인들과 동격에 두게 되면, 이승만 동상 앞을 지나게 될 외국인들이 잠시나마 어이없는 웃음을 짓게 될 것이다. 그런 것을 나라 밖에까지 설치한다는 것은 한국인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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