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3 15:31최종 업데이트 23.11.13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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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 대통령이 12일 경기 고양시 킨텍스에서 열린 2023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청년의 약속' 선포식에서 축사를 마친 뒤 인사하고 있다. ⓒ 연합뉴스


4·10 총선을 5개월 앞둔 지난 7일, 윤석열 대통령은 3대 관변단체 중 하나인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의 전국회원대회에 참석해 가짜뉴스 추방 운동을 격려했다. 이 단체가 전개하는 가짜뉴스 추방운동은 후쿠시마 오염수와 관련된 것이다. 12일에는 또 다른 3대 관변단체인 새마을운동중앙회의 '2023 전국새마을지도자대회 청년의 약속 선포식'에 가서 축사를 했다.

경기도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이 행사에서 윤 대통령이 강조한 키워드는 '박정희'였다. 그는 "그동안의 눈부신 성장과 번영은 우리도 한번 잘살아 보세라는 국민들의 의지와 하면 된다는 신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라며 "이러한 의지와 신념을 이끌어준 위대한 지도자도 있었습니다"라며 박정희를 상기시켰다.


7일 축사가 관변단체를 선거에 활용하는 역대 보수정권의 관심사를 반영한 것이라면, 12일 축사는 그것과 더불어 대구·경북(TK)에 대한 러브콜도 담았다고 볼 수 있다. TK 지지율이 흔들리는 최근 양상에 대한 위기감이 반영된 호소로 보인다.

박정희 향수를 자극해 TK의 마음을 얻는 윤 정권의 접근법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의 잇따른 만남에서도 나타난다. 지난달에는 10·26사태 44주년을 맞아 박정희 추도식에 참석해 박 전 대통령을 만났고, 대구를 방문해 바르게살기운동협의회 행사에 참석한 7일에는 박 대통령 자택까지 찾아갔다. 이 자리에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정운영을 되돌아보면서 배울 점은 지금 국정에도 반영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윤 대통령은 대선 전인 2021년 10월 19일에는 '전두환이 정치는 잘했다'고 말했다. 취임 뒤에는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을 앞세워 '이승만은 잘했다'는 메시지를 띄워 왔다. 그러다가 최근 들어서는 '위대한 지도자도 있었다'며 박정희를 부각시키고 있다.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중에서 선거에 확실한 도움이 되는 쪽은 지역 기반이 단단한 박정희일 것이다. 황해도 출신인 이승만은 오랜 미국 생활과 불성실한 태도로 인해 국내 기반이 현저히 약한 상태에서 1945년에 귀국했고, 부산·경남(PK) 출신인 전두환은 타 지역은 물론이고 자기 지역에서도 인심을 제대로 얻지 못했다. 그래서 총선이 다가올수록 윤 정권의 관심은 이승만보다는 박정희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다.

TK 지지율이 떨어진 것은 윤 정권이 박정희에 대한 애정을 많이 표시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경제가 어려워지고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데 더해 대통령 부부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는 등의 원인으로 보인다.

지지율 감소가 박정희와 별 관계가 없는데도, 윤 정권은 보수 정치인들이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는 방법으로 지금의 곤란을 피하려 하고 있다. TK 지역의 삶을 실질적으로 개선하기보다는 이미지 전략으로 민심을 현혹하려는 윤 정권의 성의 없는 태도를 반영하는 현상이다.

TK 배려해 박정희 향수 자극?

대구·경북을 특별히 더 배려해서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는 게 아니라는 점은 다른 나라의 유사 사례에서 쉽게 드러난다. 이런 현상에 대해 제3자 시각을 갖게 되면, 윤 정권이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 대구·경북의 일반 대중을 존중하는 데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점이 어렵지 않게 나타난다.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관리체제에 있을 때인 1999년 12월에 치러진 칠레 대선의 핵심 이슈 중 하나는 경제문제였다. 15년 만에 발생한 최악의 경제성장률 둔화가 전년도인 1998년에 있었고 실업률이 11%대까지 치솟아 있었다. 1990년 칠레 민주화 이래로 야당의 위치에 있었던 보수 진영은 이 문제를 부각시키며 선거 국면을 팽팽하게 만들었다.

보수 진영의 호아킨 라빈 후보가 채택한 선거전략은 악명 높은 독재자인 아우구스토 피노체트(재임 1973~1990)의 경제정책을 부각시키고 그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1999년 12월 13일 자 <한겨레> 기사 '칠레 대선 좌-우 대결 팽팽'은 "라빈은 '칠레를 다시 뛰게 할 것'이라며 피노체트 시절의 경제성장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피노체트 정권은 인권 탄압으로 악명이 높았다. 공식 보고만 기준으로 해도, 3000명 이상이 정치적 이유로 살해되고 수만 명이 감금됐으며 1000여 명이 실종됐다. 이렇게 대중을 억압하는 정권의 경제정책이 대중에게 유리할 리 없다. 경제성장의 성과가 대중에게 공평하게 분배될 리도 만무했다.

1998년 10월 19일 자 <한겨레> 기사 '반공주의 탈 쓴 인간 도살자'는 "90년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날 때까지 17년에 이른 그의 통치 기간은 암흑의 시대 그 자체였다"고 한 뒤 "한때 150%였던 인플레를 잡는 데 성공했지만, 그의 집권 기간 칠레는 세계에서 7번째로 분배의 불평등이 심한 나라가 돼 월소득 100달러 이하의 극빈 상태에 허덕이는 국민이 전체의 34%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진보진영의 리카르도 라고스 후보를 추격하는 라빈 후보는 피노체트 시절에 일간지 경제부장을 지낸 인물이었다. 피노체트의 언론 대책을 조언하고 협조도 했다. 이런 인물이 볼 때는 피노체트 정권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는 시카고학파 경제학자들을 기용한 사실을 높이 평가했겠지만, 이 정권은 경제 관료들의 역량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했다.

장하준 케임브리지대학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경제정책을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학 전문 지식이 아니라 전반적인 지적 능력이라는 점이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보다 그 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분야를 전공한 사람이 가장 유능한 경제정책 입안자가 될 확률이 크다"고 한 뒤 이렇게 말했다.

"피노체트가 고용한 '시카고 보이들'을 비롯해 경제학 분야에서 고도의 훈련을 받은 경제학자들이 경제정책을 운영했지만 동아시아 국가들보다 훨씬 열등한 경제 실적을 올렸다는 사실은 위의 추론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보수진영이 보수 유권자를 더 우롱하는 현상

1970년까지만 해도 칠레는 한국보다 잘살았다. 그랬던 나라가 기울어진 데는 피노체트의 실정이 큰 역할을 했다. 그래서 칠레 대중은 피노체트 경제정책의 피해자였다. 그런데도 1999년 대선에서 보수진영은 궁핍한 대중의 마음을 독재자에 대한 향수로 채워주려 했다. 피노체트 향수를 유발해 보수 유권자들을 단결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궁핍한 대중을 살리는 일차적 방도가 분배구조 개선이라는 점을 칠레 보수세력이 몰랐을 리는 없다. 그런데도 보수 유권자들을 그런 식으로 대했다는 것은 그들이 보수진영 지지자들을 우민시했음을 보여준다. 상대 진영 유권자들보다 자기 진영 유권자들을 훨씬 더 많이 기만한 셈이다. 이 대선에서는 진보진영의 라고스가 승리했다.

보수 정치인들이 진보진영 유권자보다 보수진영 유권자를 더 많이 우롱하는 현상은 2022년 필리핀 대선에서도 현저했다. 이 대선의 승자인 페르니난드 마르코스 주니어의 어머니인 이멜다와 그 아버지인 마르코스 전 대통령이 필리핀 국민들을 얼마나 많이 괴롭혔는지는 1986년에 폭발한 필리핀 피플파워로도 잘 증명된다.

그런데도 마르코스 주니어 진영은 선거전략의 하나로 아버지 마르코스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 '다시 함께 일어서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아버지의 계획을 실현할 수 있다면 싱가포르처럼 될 것"이라는 환상을 퍼트렸다. 마르코스로 인해 고난을 겪은 필리핀 국민들을 그 아들 마르코스가 아버지의 이름을 내걸고 또다시 기만했던 것이다.

아버지 마르코스 시절의 보수 유권자들이 특별히 혜택을 받았던 것도 아니다. 보수진영 내의 특권층이 혜택을 봤을 뿐, 진보진영이건 보수진영이건 일반 대중은 별다른 덕을 입지 못했다. 그런데도 아버지 마르코스를 미화하며 보수진영의 표를 결집시켰으니, 보수진영이 보수 유권자를 더 많이 우롱하는 현상이 필리핀 대선에서도 잘 나타난 셈이다.

박정희가 다수 국민을 탄압하며 소수 특권층을 살찌웠다는 것은 윤석열 대통령 같은 보수 정치인들도 익히 알고 있다. 그 시절 경제성장이 저임금과 노동탄압에 기초했으며 그 결실이 공정하게 분배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잘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툭하면 보수진영 유권자를 겨냥해 박정희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한국의 보수 정치인들이 진보진영 유권자와 보수진영 유권자 중 어느 쪽을 더 많이 우롱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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