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5 20:56최종 업데이트 23.11.15 2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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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4월 18일 당시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와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서울 여의도 국회 소통관에서 양 당 간 합당을 공식 선언한 후 백브리핑 자리에서 안 대표가 먼저 자리를 뜨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국민의힘 안철수 의원과 이준석 전 대표의 '복국집 파동'이 소란스럽다. 방음이 안 되는 벽을 사이에 두고 막말과 고성이 오갔다고 보도된 이 사건은 '인성', '싸가지' 같은 감정싸움으로 번지더니 소셜미디어에서는 '가짜뉴스'와 '강서구청장 선거 패배 책임론'으로까지 이어졌다.

물론 중요한 일은 아니다. 어차피 그들은 모두 변방에서 변죽만 울리고 있을 뿐인 데다, 다툼의 내용마저 유치하고 맥락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 쓸모없는 사태의 와중에 국민의힘 장예찬 청년최고위원도 참전했다.


장 최고위원은 '복국집 사태'가 알려진 후 한 라디오방송에 출연해 "나에 대해 조금 안 좋은 얘기를 한다고 고성을 지르면서 아버지뻘 안철수 의원에게 (고함을 치는 건) 예의가 아니다"라며 이 전 대표를 비판했다.

'청년'을 대표한다는 최고위원이 '어른이 말씀하시는데 대들면 안 된다'고 말한 셈이다. 이 전 대표가 약점으로 지적받던 거침없는 언행과 어린 나이를 꼬투리 잡은 것이다. 이른바 '싸가지 없는 정치'에 대한 공격이다.

'어린 것들'에 대한 정치권의 텃세는 역사가 유구하다. 1971년 대선을 앞두고 신민당 김영삼 의원은 젊은 정치지도자가 필요하다며 '40대 기수론'을 내세웠다. 유진산 총재를 비롯한 신민당 내 '어른'들은 '구상유취'(입에서 아직 젖내가 난다는 뜻)니 '정치적 미성년'이니 하는 말로 40대 기수론을 견제했다. 시대가 시대니만큼 '문자'를 써서 비판했지만, 결국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라고 말한 셈이다.

지난 세기말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젊은 피 수혈론'이 있었다. 2000년 총선을 앞두고 영입된 인사들이 현재 민주당의 주류인 '386'으로 용어에서 드러나듯 이들 모두 당시 30대였다. 이들의 등장을 달가워하지 않은 것은 '정적'인 한나라당이 아니라 공천 물갈이가 두려웠던 같은 당의 어른들이었다.

이른바 당내 중진이라고 불리던 이들은 386들의 '출신'과 '사상'을 걸고넘어지기도 했고, 어린 나이의 '불안정함'과 '경험없음'을 공격했다. 민주화가 이뤄지고 정치인의 발언이 미디어에 노출되는 빈도가 높아지며 다소 세련되게 포장됐지만 역시 마찬가지로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라는 공격이었다.

지금은 '청년정치'라는 말이 유행이다. 스무 살 남짓 지방의원이 있고 20대 여성 국회의원도 있다. 각 당은 청년 부대표니, 청년 대변인이니 하며 '청년'만 덧붙인 직함을 만들어 인사들을 영입하고 있다. 법조계나 언론계, 기업인 등으로 구성되던 기성정치는 다양한 출신과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로 재편되는 듯 보였다.

기성의 정치 문법과 다른 언어를 구사하는 이들의 적은 이십여 년 전에 이들과 비슷한 방식으로 정계에 입문해 지금은 주류가 된 '어른'들로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공격받았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이 새로운 세대를 공격했다. 다름을 미숙함으로 공격했고, 새로운 언어는 '싸가지 없음'으로 규정지었다.

류호정 의원이 타투이스트 노조 합법화를 위해 타투를 한 채 국회 마당에서 기자회견을 할 때, 분홍 원피스를 입고 의사당에 들어설 때 그녀에게 혀를 찬 것은 86세대 의원들보다는 그 '어른의 정치언어'에 익숙해진 대중이었다. 그들의 불만과 비난은 다양한 단어로 표출되는 것 같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맥락도 앞서와 같다. '어린 것들이 뭘 안다고'.

싸가지 없는 정치의 유구한 역사

김영삼의 40대 기수론도, 386의 정계 진출도,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청년세대의 정치세력화도 모두 '시대적 소명'이라 할만한 명분이 있었다. 고인 것은 썩게 마련이라는 것, 시대가 앞으로 나아가는 만큼 정치 주체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 다양한 정체성의 다양한 목소리가 공론장에 나타나야 한다는 것.

결국 '변화'의 요구다. 그러나 과거의 어느 한 시절에는 '변화'를 소명으로 삼았던 이들이 오히려 변화의 요구를 묵살하고 있다. 40대 기수들에게 젖내를 운운하던 신민당 어른들이 그랬듯, 젊은 피 386을 불온하고 불안하다고 했던 민주당 중진들이 그랬듯, 그리고 오늘에는 '어른의 언어'가 아닌 새롭고 확장된 언어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대중들이. '어린 것들이 뭘 알아'.

예로부터 '요즘 것들'은 싸가지가 없었다. '요즘 젊은것들은 버릇이 없다'는 말은 기원전 수메르 점토판에서도 발견된다던가. 기성의 언어와 새로운 언어는 늘 불화한다. 새로운 것이란 결국 기성의 것을 극복하는 것, 기성의 것이 있던 자리를 대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성의 것과 불화하는 모든 것이 새로운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있던 것들의 자리를 빼앗았다고 해서 새로운 것인 것도 아니다.

장예찬이 기성 정치인들과는 다른 출신과 정체성, 그리고 '청년'이라는 직함을 가졌다고 해서 '아버지뻘'을 운운하는 그가 새로운 언어를 가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마찬가지로 안철수를 비롯한 나이 든 기성정치인과 불화한다고 해서 다른 정치인을 환자로 칭하거나 영어로 선을 긋는 이준석이 기존의 것을 대치하는 힘을 지녔다고 말할 수도 없다.

사실 '아버지뻘' 운운하며 "어린 것들이 뭘 아냐"고 말하는 것과 '나잇살이나 먹고' 운운하며 '어른들은 몰라요'라고 말하는 건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그러니까 지금 '복국집 사태'가 불러온 소동은 시대와 불화해 새로운 것을 길어내는 '싸가지의 정치'가 아니란 얘기다. 지금 이건 그저 늙은 꼰대와 젊은 꼰대 간의 막장 자존심 싸움 같은 것일 뿐.

싸가지 없는 정치의 유구한 역사는 사실 그보다도 훨씬 앞에서부터 있었다. 실은 인류의 정치사는 늙다리 꼰대들과 불화하던 어리고 싸가지 없는 것들의 투쟁사. 그리고 역할을 바꿔 그것이 반복되는 과정이다. 세상은 변화하고 발전하기 때문에, 인간은 늙어가고 낡아가기 때문에 언제나 새로운 정치세력과 주체를 요구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때때로 그것을 혁명이라고 부르기도 했고, 선거라고 부르기도 했고, 발전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것을 무엇이라고 불렀든 모든 것의 목적은 결국 '변화'다. 과거보다 조금은 더 나은 우리, 어제보다 조금은 더 나을 내일. 그리하여 어떤 변화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어떤 변화의 의지도 느껴지지 않는 무례함은 정치가 아니다. 그냥 버릇없는 어린애의 투정이지. 마찬가지로 다가오는 새로움을 그저 미숙함으로 여기고 나이와 권위로 견제하는 것 역시 정치가 아니다. 그건 그냥 꼰티 나는 진상이다.

유럽의 '68세대'는 "서른 살이 넘은 사람은 누구도 믿지 말라"고 외쳤다. 지금의 비뚤어진 세계를 빚어온 모든 낡은 것들에 대한 저항. 이 구호를 인용해 한 이탈리아의 소설가는 "스물이 넘지 않은 자의 말을 믿지 말라"고 썼다. 상상과 저항의 의지를 빼앗기고 어른들의 언어로 제도화된 어린것들에 대한 일침으로.

싸가지가 무엇이겠나. 서른이 넘든, 스물도 채 안 되든, 새로운 것을 상상하고 저항하고 대체하고 또 변화하는 힘. 그래서 다소 불온해 보이고 다소 불안해 보여도 마침내는 세계를 앞으로 가게 하는 힘. 그것이 싸가지 없는 정치와 운동 아닐까? 복국집에 앉아서 이러쿵 저러쿵 하며 천하제일 꼰대력을 견주는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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