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1.16 15:15최종 업데이트 23.11.1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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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란 감정이 위험한 이유는 이 감정이 ‘내 자신’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 셔터스톡

 
2022년 12월 서울시가 '서울시 고립·은둔 청년 실태 조사 보고서'를 내놓았다. 서울시에 거주하는 만 19~39세 사이의 청년 5221가구 6929명을 온라인과 심층 인터뷰를 통해 조사한 결과다.

조사 결과를 보면 고립된 상태에 놓인 이들은 3.3%, 은둔하고 있는 이들은 1.2%로 둘을 합쳐 총 4.5% 정도에 이른다. 1천 명 중 45명이 이런 상태라는 의미다. 고립된 청년들이 9만 3820~9만 6056명 정도이고, 은둔하고 있는 청년들은 3만 3009~3만 3796명으로 총 12만 6829~12만 9852명 정도가 고립 및 은둔 상태에 있다고 추산된다. 이걸 전국적 차원으로 확대해 보면 61만 명에 이른다.


무엇이 은둔이고, 무엇이 고립일까? 그 기준은 뭘까? 이 조사에서 은둔은 외출이 거의 없는 상태가 최소 6개월 이상 지속된 상태를 말한다. 자기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거나, 방에서 나오긴 하지만 집 밖으로 나가지 않거나, 집 밖으로 나가더라도 인근 편의점이나 간단한 취미 생활만을 위해 외출하는 경우다. 또한 지난 1주일간 경제활동이 전혀 없고 1개월 이내에 구직이나 학업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청년도 여기에 해당한다.

고립은 정서적 또는 물리적 고립이 최소 6개월 이상 지속된 상태를 의미한다. 우선 정서적 고립이란 중요하거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 급한 일이 있을 때 부탁할 수 있는 사람, 개인적으로 돈을 빌려야 할 때 부탁할 수 있는 사람, 낙심하거나 우울할 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상태다. 물리적 고립은 친척이나 가족 이외에 친한 친구나 친한 사람과의 대면 교류 그리고 직장, 학교, 동네 등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과의 대면 교류가 1년에 한두 번 이하 또는 전혀 없는 상태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점은 이 실태조사가 서울시와 연계된, 공적 정책의 토대가 되는 보고서라는 점이다. 이런 보고서에서는 숫자가 많을수록 써야 할 정책비용이 커지기 때문에 숫자가 기본적으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영국의 경제학자 알렉스 코밤은 저서 <불공정한 숫자들>에서 정부가 잡는 통계는 어려운 사람들의 존재를 최대한 숨겨서 이에 쓰이는 비용을 줄인다고 밝힌다. 짧게 말하자면 서울시에서 추정하는 13만 명에 이르는 고립·은둔 청년의 숫자는 최소한의 수치로 보아도 좋다는 의미다.

외로움이 나를 망가뜨린다  

영국의 정치경제학자 노리나 허츠는 <고립의 시대>에서 21세기를 '외로운 세기'라고 말한다. 사회적으로 고립감을 느끼는 외로운 사람들이 대규모로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전 세계적으로 외로움은 정부가 다뤄야 할 중요한 사회 현상이 되고 있다. 2018년 영국은 외로움을 전담하는 차관을 임명했고, 2021년 일본은 고독부 장관을 임명했다.

외로움은 개인에겐 감정의 상태이며 집단에겐 사회적 상태다. 개인에게 감정의 상태로서 외로움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내가 어렵고 힘들 때 내 처지를 호소하거나 도움을 줄 사람이 없다고 느끼는 상태'다. 정치철학사에서 가장 먼저 외로움이란 감정을 다룬 한나 아렌트는 이를 두고 '모두에게 버려졌다는 감정의 상태'라고 한다.

이런 '외로움'이란 감정이 위험한 이유는 이 감정이 '내 자신'을 망가뜨리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라. 내가 어렵고 힘들 때 내 처지를 호소할 사람도, 도움을 줄 사람도 없다면 우리는 당연히 묻게 된다. "도대체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길래 내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도, 도움을 줄 사람도 없는 걸까? 도대체 나라는 사람은 누구인가?" 이 질문에 제대로 된 답을 스스로 찾지 못할 때 우리는 '자아'를 잃어버리게 된다.

불행하게도 질문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외로움이란 감정은 연쇄적인 질문을 불러일으킨다. "도대체 나는 이 세계에 왜 존재하고 있는 걸까? 도대체 나란 사람은 이 세상에 쓸모가 있는 것일까?" 정리하자면 외로움에 빠져든 개인에게 이 감정은 타자를 잃고, 나를 잃고, 세계를 잃어가는 연속적인 과정이다.

정치사상가 한나 아렌트는 이처럼 모두에게 버려진 이들은 대개 '자기중심적 슬픔(self-centered bitterness)'에 빠져든다고 말한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단어는 'bitterness'이다. 우리말로 슬픔이라 옮길 수 있는 이 단어에는 또 다른 중요한 의미가 있다. 바로 '분노'다. 정리하자면 외로움에 빠져든 이들이 느끼는 감정의 상태는 '분노 어린 슬픔'이다. 이 '자기 중심적인' '분노 어린 슬픔'은 두 가지 좋지 않은 사회 현상으로 이어진다.

우선 '자기중심적인' 슬픔은 모든 세상사를 자기를 불행하게 만든 것이 무엇인가를 기준으로 판단하게끔 한다. 외로움에 빠진 이들은 '공통의 이익'을 기준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자신의 삶 속에서 '타자와의 신뢰'를 경험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공통의 이익이란 늘 타자와의 신뢰에 토대를 둔다. 하지만 어려운 상황에서 도움의 부재는 타자에 대한 신뢰의 부재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이들은 대체로 무엇이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는가를 기준으로 공공사를 다루고 무엇이 우리에게 공통의 이익이 되는가로 판단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오히려 어려움에 빠진 나를 도와주지 않는 이 세상에 대해 공익을 생각하라는 요구 자체가 모순일지도 모른다.

여기에 더해 '분노 어린 슬픔'은 혐오로 이어진다. 우선 그 혐오의 대상은 스스로 이 세상에 쓸모가 없다고 느끼는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지적처럼 어떤 인간도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을 자기 안에만 담아둘 수 없다. 이런 이유로 자기를 미워하는 마음은 반드시 타자를 향해 터져 나오기 마련이다.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 특히 능력주의 사회에서 누가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는지 그 구체적 대상은 늘 모호하기만 하다. 예를 들어 나에겐 어디에나 '시험'이란 기회가 주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것은 누구도 아닌 '내 자신'이다. 그러다 보니 그 분노의 표출은 무작위적으로 이루어진다. 요즘 우리가 목격하는 무작위 범죄는 이렇게 외로워진 사회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더 큰 문제는 이런 외로워진 사람들, 내가 외로워지고 있다고 느끼는 사람들, 자칫하면 나도 외로워질 수 있다는 불안에 휩싸인 사람들을 동원하는 정치인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바로 도널드 트럼프 같은 인물이 그렇다.

<고립의 시대>에서는 노리나 허츠가, <자기 땅의 이방인들>에선 '감정 노동'이란 용어를 만든 사회학자 앨리 러셀 혹실드가 정확하게 외로워진 사람들이 어떻게 트럼프 같은 정치인들을 지지하게 되는지 짚고 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에서 외로워진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해서 만들어진 체제가 바로 전체주의였다고 말한다. 이런 아렌트의 분석을 이어받은 노리나 허츠는 "트럼프에서 명확하게 확인된 21세기 포퓰리즘 현상이 세계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외로워진 사람들과 깊은 상관관계를 맺고 있음은 확실하다"며 "외로움이 민주주의를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가장 외로운 세대, 2030
 

능력주의와 더불어 젊은이들을 외롭게 만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디지털 기술이 만든 격차이다. ⓒ 셔터스톡

 
외로움을 이야기할 때 우리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세대는 노인 세대다. 하지만 통계적으로 가장 외로운 세대는 20대다. 가장 활력이 넘치리라 여기는 이 세대가 가장 외로운 세대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왜 젊은이들이 외로운가? 왜 활력이 넘쳐야 할 우리 젊은이들이 도움이 없다는 감정에 시달리고 있는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이들은 그 원인을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자기 책임의 윤리'에서 찾는다. 바우만은 지구적 시장이 건설되면서 이 윤리가 전 세계에 동시적으로 전파되었다고 말한다. '자기 책임의 윤리'는 '복지'라는 국가의 보호에서 벗어나 '시장'에서 스스로 책임지는 삶을 살라는 지구적 차원의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를 가장 충실히 받아들인 건 교육과정에서부터 충실히 이 윤리를 학습한 새로운 세대들이었다. 미국에서는 밀레니얼 세대가, 유럽에서는 Y세대가, 우리나라에서는 MZ세대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사실 MZ세대라고 할 때 문화적으로 우리나라의 밀레니얼 세대와 Z세대는 공유한 것이 거의 없다. 다만 이 세대를 하나로 묶는 코드가 있다면,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바로 이 자기 책임의 윤리다. 바우만은 이 자기 책임의 윤리로 무장한 세대들의 특징이, 자신들의 어려움을 국가나 사회에 호소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능력주의 사회라면 더욱 국가나 사회, 타인에게 도움을 호소할 수 없게 된다. 능력주의 사회에서 누군가 밀려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이 열심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열심히 노력하지 않은 자들이 사회에 도움을 청한다는 건 그 자체가 부도덕한 일이다. 능력주의 사회는 늘 자신이 당면한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라고 말한다. 그렇기에 능력주의 사회에서 자기 책임의 윤리로 무장한 세대일수록 어려운 처지에 놓인다고 하더라도 사회적 도움을 청하지 못하고 고립되는 경우가 생겨난다. 뒤에 보겠지만 통계적으로, 사회적으로, 지금 우리 젊은 세대가 그런 상황에 놓여 있다.

젊은이들을 외롭게 만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인은 디지털 기술이 만든 격차다. 디지털 기술은 전 세계의 부를 창출하는 핵심 수단인데, 이 기술은 극단적으로 이익을 소수에게 몰아주는 속성이 있다. 그 이유는 세 가지 정도로 볼 수 있다.

첫째, 모두가 알다시피 디지털 기술의 발전 속도가 너무 빠르다. 2012년 이후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는 1년에 10배 정도에 이르고 있다. 풀어 말하자면, 2년 차에는 100배, 3년 차에는 1만 배, 4년 차에는 100만 배에 이르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런 발전 속도를 따라잡는 사람들의 수는 점점 소수가 되고 자연스럽게 분배는 양극화된다.

둘째, 디지털 기술이 만드는 네트워크 효과는 각 영역에서 독과점 효과를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 세계 검색시장의 91~92%를 구글이 차지하고 있다. 국내 역시 네이버와 구글의 독과점 체제다. 택시의 우버, 숙박의 에어비앤비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이런 독과점은 디지털 플랫폼이 자리 잡는 모든 영역에서 일어난다.

셋째, 디지털 기술은 중간숙련 일자리를 대체하고 저숙련 일자리를 늘리는 성향이 있다. 디지털 기술은 사무자동화에 많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반복 수행 비율이 높은 중숙련 일자리를 대체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중숙련 일자리가 사라지면 소수의 전문적인 능력을 지닌 집단과 그렇지 못한 다수의 집단으로 노동의 지형이 갈라지게 되고 이로 인해 임금 또한 양극화된다.

누구도 자기 인생 온전히 책임질 수 없어
 

고립에 관한 여러 연구들은 우리 청년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사회적 돌봄’이라고 말하고 있다. ⓒ 셔터스톡

 
젊은 세대들은 이런 디지털 기술과 인생 전반을 함께 보내야만 할 뿐 아니라, 아직 노동시장으로 진입하지 못한 20대 대다수는 디지털 기술이 만드는 보상격차를 고스란히 떠안고 출발한다.

문제는 공공 보건학자인 리처드 윌킨슨과 케이트 피킷이 <불평등 트라우마>에서 지적하듯이 이런 불평등이 커질수록 사회 경쟁이 심화되고, 경쟁이 너무 강화되면 불안이 증가하고, 이 불안은 불신을 만들고, 이 불신이 확산된 사회일수록 도움 없이 홀로 남겨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데 있다. 더하여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어도 세상과 접촉할 수 있는 통로를 열어주는 디지털 기술은 젊은이들이 사회적 고립을 선택할 가능성을 더 크게 만든다.

특히 우리나라는 다른 어느 국가보다 디지털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난 몇 년간 직접 목격하고 있듯이 '자기 책임의 윤리'로 무장한 능력주의가 지배하고 있는 곳이다. 그러다 보니 젊은이들이 사회적 고립 속에 도움이 없다고 느끼는 현상이 더 쉽게 나타날 수 있다.

이는 여러 데이터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예를 들어 2018년 한국리서치의 '사회적 고립과 외로움 인식 보고'를 보면, 우리나라의 20대 응답자 중 40%가 '항상' 외롭거나 '자주' 외롭다고 답하여 '상시적' 외로움을 호소하고 있었고, 이 숫자는 전 세대에 걸쳐 가장 높았다. 이 조사에서 외롭지 않다고 답한 20대 응답자는 15%밖에 되지 않았으며 전 세대에 걸쳐 가장 낮은 수치였다. 시장조사 기관인 엠브레인 트렌드 모니터가 올해 실시한 '일상 속 외로움 체감' 조사에서도 가장 외로움을 많이 느끼는 세대는 20대였고 그다음으로 외로움을 느끼는 세대는 30대였다.
 

세대별 외로움 체감도 단위 : 명, % ⓒ 한국리서치

 
이 문제를 단번에 해결할 수 있는 해결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시작해야 할 지점은 알 수 있다. 바로 '자기 책임의 윤리'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누구도 너의 인생을 책임져 주지 않는다"는 말은 엄혹한 현실을 알려주는 데 적합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말은 너의 실패에는 사회에 책임이 없다는 말이자, 너의 실패를 누구에게도 변명하지 말란 말이다. 그래서 이 말은 한편으로 사회적 연대를 약화하고, 때로는 우리를 고립시키는 말이기도 하다. 알고 보면 누구도 자기 인생을 자기 스스로 온전히 책임질 수는 없다. 사회가, 국가가 존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대체로 우리는 청년들에게 도움을 주는 정책에 인색하다. 아니, 내 자식의 일이 아니라면 청년들의 어려움에 솔직하게 귀기울여 듣는 일에도 인색한 편이다. 하지만 고립에 관한 여러 연구들은 우리 청년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사회적 돌봄'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 그 돌봄을 어떻게 할 것인지 우리가 본격적으로 논의해야 할 시점이다.
 

김만권 /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 ⓒ 김만권

 
필자 소개 : 이 글을 쓴 김만권은 경희대 비교문화연구소 학술연구교수입니다. 관심 영역은 권리와 의무, 자원의 분배에 대한 문제를 정치, 경제, 복지의 통합적 관점에서 살펴보는 것입니다. 학계에서는 학술등재지 <시민과 세계> 편집위원장을, 시민사회에서는 참여연대 부설 참여사회연구소 소장을 역임했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새로운 가난이 온다>, <호모 저스티스> 등이 있습니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소셜 코리아>(https://socialkorea.org)에도 게재됐습니다. <소셜 코리아> 연재 글과 다양한 소식을 매주 받아보시려면 뉴스레터를 신청해주세요. 구독신청 : https://socialkorea.stibee.com/subscri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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