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04 10:33최종 업데이트 23.12.04 1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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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8월 12일 경부선 개통 당시의 모습 ⓒ 위키미디어 공용


'독립운동'하면 총을 드는 무장투쟁이나 칠판 앞에 서는 애국계몽운동 등이 떠오르지만, 이 운동의 본질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항일 노동운동이나 소작쟁의다. 일제가 한국을 침략한 근원적 목적은 일본 자본가들을 위한 경제적 착취였다. 그래서 이 착취에 맞선 노동자·농민의 싸움은 독립운동의 본질과 직결된다.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23일, 일본은 한일의정서 제4조에 "제3국의 침해 혹은 내란으로 인해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 대일본제국 정부는 속히 임기응변의 필요한 조치를 행할 수 있다"라는 규정을 넣었다. 그러면서 유사시 일본군이 한국 땅에 군사기지를 둘 수 있다고 규정했다.


한국에 접근하는 일본의 의도가 경제적 착취라는 것을 명확히 드러내는 사건이 을사늑약(을사보호조약) 이전인 이 시기에 있었다. 경기도 시흥군민 수천 명이 1904년 9월 14일 오후 3시경 시흥군청을 습격한 사건이다.

이 사건의 주역 중 하나는 그해 10월 18일 자 <고종실록>에 "난의 수괴(亂魁)"로 적시된 민용훈(閔用勳)이다. 고종의 전임자인 철종 때 출생해 1904년에 50세 정도였던 민용훈은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리에 살았다. 광명역 부근인 이곳은 지금의 광명시 일직동이다.

관청에서 주사로 일했던 그가 항일운동의 선봉에 선 계기는 경부선 철도 부설이었다. 여기에 담긴 일본의 탐욕에 맞서고자 군민들을 항일 무대로 끌어냈던 것이다.

일본이 깔아놓은 철로는 한국을 지배하는 수단이자 중국 침략을 위한 사다리였다. 이 철도 건설은 한국의 옆구리를 치는 일로부터 시작했다. 1894년 청일전쟁을 계기로 한국이 일본의 영향 아래 들어간 뒤인 1900년에는 인천과 한양을 잇는 경인선이 완전 개통됐다. 이는 일본 병력과 군수물자를 수송하는 루트였다.

그런 뒤인 1905년에 부산과 한양을 잇는 경부선, 1906년에 신의주와 한양을 연결하는 경의선이 개통됐다. 한국의 옆구리에 경인선을 횡으로 깐 뒤, 하반신과 상반신에 경부선 및 경의선을 종으로 깔았던 것이다.

노동력과 토지를 자기 물건처럼 사용한 일본
 

1983년 10월 21일 자 <매일경제>에 실린 '우리의 국토 제24회 경부선 철도' ⓒ 매일경제

 
이는 꽤 오랫동안의 준비 작업을 거친 결과였다. 일본은 조선 정부의 허락도 없이 이 작업을 진행했다. 1876년 강화도조약에 의한 대일 개항 이후로 조선 각지에서는 일본 밀정들이 곳곳을 염탐하며 지형과 교통을 조사하는 일들이 있었다. 김의원 국토개발연구원장이 1983년 10월 21일 자 <매일경제>에 기고한 '우리의 국토' 제24회 경부선 철도편에 이런 사례가 소개됐다.

"일본은 경부선 철도에 관하여 일찍부터 관심을 쏟아왔는데, 1885년에는 송전행장(松田行藏)이란 자가 4년 간에 걸쳐 노선을 구상하면서 답사한 일이 있다. 이때 전도밀(前島密)이란 자가 일본 철도와 연계하여 만주를 거쳐 중국대륙은 물론 시베리아를 경유하여 유럽에 이르는 유라시아대륙 횡단철도망을 예상하여 조선반도 종관(縱貫) 철도를 일본 자본에 의해 부설하는 것이 급무란 것을 역설하여 조야의 주의와 관심을 환기시킨 일도 있다."

이런 사례는 일본이 꽤 오래전부터 한반도 철도망 구축을 준비해왔음을 보여준다. 한국 지배와 중국 침략을 위한 기획이 꽤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이다.

일본을 위해 한국을 착취하는 경부선 철도 사업의 본질은 계약 단계에서부터 나타났다. 이에 관한 1898년 계약인 경부철도합동(合同)은 일본이 부설권과 영업권을 독점하도록 규정했다. 한국은 철도 부지를 무상 제공하고 영업이익에 과세를 하지 않기로 했다. 

계약 단계에서만 농락이 있었던 게 아니다. 한국이 철도 부지를 무상 제공했으니, 그 토지의 주인들이 제값을 받기는 힘들었다. 경부선 철도 특집 편인 1981년 6월 30일 자 <매일경제>는 "철도 부설로 논밭을 잃은 농민들은 울화통이 터져 활빈당이 되어 화적질로 심사를 달래는 판국이었다"고 말한다.

임차인이 아닌 소유자가 화적이 되는 일들이 많았다. 토지가 수용되면 소유자가 아닌 세입자가 피눈물을 흘리는 것이 지금의 상식이지만, 일제 침략 때는 소유자도 화를 면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철도 공사에 동원된 한국인들 역시 손해를 입었다. 이들은 노동력을 헐값에 제공했다. 이들의 임금은 동일한 기술 수준을 가진 일본인의 3분의 1밖에 안 됐다. 이 때문에 한국인들이 노동력 제공을 기피하자, 일본은 한국 지방정부를 움직여 노동력을 강제로 동원했다.

이때는 을사늑약 이전이었다. 군사동맹만 체결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일본은 한국의 노동력과 토지를 자기 물건처럼 사용했다. 심지어 한국 공권력까지 마음대로 흔들어 대며 이런 착취를 일삼았다.

시흥군민 수천 명이 궐기한 것은 그런 탐욕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이들은 일본의 노동력 동원에 대해 시흥군이 협력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이를 위해 1904년 7월 군청 앞에서 시위를 벌였지만 요구는 수용되지 않았다. 도리어, 노동자 모집 비용이 주민들에게 전가됐다.

경부선 철도에 담긴 일본의 탐욕을 정면으로 거부
 

고종실록 ⓒ 위키미디어 공용

 
민용훈이 지도자로 부각된 시점은 이때였다. 그해 9월 그는 주민들을 규합해 성토대회를 열었고, 이들을 데리고 관청으로 몰려가 논쟁을 벌였다. 위의 10월 18일 자 <고종실록>은 그가 한밤중에 통문을 돌려 주민들을 불러 모아 이런 상황을 만들어 낸 일을 소개하고 있다.

그런데 시흥군청에서 논쟁이 벌어지던 중에 사고가 발생했다. 군수가 불러온 일본인 석공 10여 명이 장검과 철봉으로 주민들을 공격해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는 주민들을 더욱 격분시켜 불상사를 확대시키는 원인이 됐다.

그해 9월 15일 자 <고종실록>은 경기관찰사의 보고서를 근거로 시흥군민 수천 명이 "군수 박우양을 죽이고 그 아들과 외국인 2명을 죽였다"고 말한다. 외국인의 국적은 언급되지 않았지만, 정황상 일본인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은 이 사건을 '대일본제국'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했다. 그래서 한양 동대문에 주둔 중인 일본 군부대를 동원해 주모자 체포에 나섰다. 위의 10월 18일 자 <고종실록>은 민용훈 등이 일본 사령부에 붙들려 갔다고 말한다. 일본군이 한국 정부를 제치고 민용훈 등을 체포한 것은 이들의 궐기가 반정부투쟁보다는 항일투쟁에 훨씬 가까웠음을 잘 드러낸다.

조선 정부는 엄한 처벌을 약속하며 이들의 신병을 인도받았고 민용훈은 태형 100대와 종신형을 받은 뒤 유배됐다. 그가 유배된 곳은 전라도 신안군이다. 1906년 1월 1일 자 <고종실록>에는 민용훈에게 내려진 석방 명령이 기술돼 있다.

경부선 철도는 일제 침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시설이다. 민용훈은 시흥군민들과 함께 목숨을 걸고 이에 저항했다. 그는 당시의 한국인들이 경부선 철도에 담긴 일본의 탐욕을 정면으로 거부한 흔적을 역사에 남기는 데 기여했다. 덕분에 우리는 이 철도에 담긴 제국주의 침략의 의미를 훨씬 쉽게 인식하고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우리 역사에 이만한 메시지를 남겼다면, 독립유공자로 지정돼야 타당하다. 1895년에 활동한 이들도 독립유공자로 지정되는 마당에, 1904년에 이런 활약상을 남긴 민용훈이 유공자로 지정되지 않을 이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 대중의 노동력이 착취당하지 않도록 투쟁하는 것은 영토와 영해를 지키는 것 이상의 사회 공헌이다. 군복을 입지 않고도, 봉급을 받지 않고도 그런 공헌을 아끼지 않은 사람들을 공식적으로 기억해야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민용훈은 독립유공자 명단에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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