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12 13:57최종 업데이트 23.12.12 1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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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혼자 산다 ⓒ unsplash

 
난 혼자 산다. 행복하냐고 묻는다면 "그럴 때도 있고 아닐 때도 있다"고 답하겠다. 혼자인 것이 좋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퇴근 후 돌아와 취향껏 멋대로 꾸며 놓은 내 방을 볼 때, 늦잠을 자고 일어난 한가한 주말 오후, 커피 한 잔을 내려서 조용하고 멍하니 앉아 있을 때, 가끔 청소와 빨래가 잔뜩 밀려도 아무도 내게 잔소리를 하지 않을 때, 엊그제 사다 놓은 비싼 망고가 (누구의 손도 타지 않고) 온전히 냉장고에 남아 있을 때. 생각해보면 별 것 아닌 순간들에 '삶을 온전히 내가 제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반면 외롭긴 하다. 얼마 전엔 코로나19에 걸려 집에서 혼자 끙끙대는데, 간병은커녕 아프다는 말을 할 사람도 없어서 괴로웠다. 두꺼운 이불을 빨아 널 때나, 장을 본 식재료가 남아서 어쩔 수 없이 버려야 할 때, 저녁 늦게 걸려 온 전화를 받다가 내 잠긴 목소리에서 '종일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문득 내가 혼자서 살아가고 있다는 자각을 한다.


혼자 사는 일이 불행한지 행복한지를 말하기는 어렵다. 삶을 온전히 내가 제어하고 있다는 느낌은 곧 내가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다는 의미기도 하다. 고요한 하루란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적적한 하루와 같은 것이고, 비싼 망고가 남아있는 냉장고란 음식을 나눠먹을 사람이 없는 냉장고와 같은 것이다. 혼자 사는 일이 어떻게 행복하기만 하고 또는 불행하기만 할까. 그럴 때도 있고, 이럴 때도 있는 것이지.  

"장가가라고 차마 못하겠다"

난 마냥 어릴 줄 알았는데 어느덧 삼십대 후반에 이르렀다. 집안 어른들은 몇 해전부터 드라마에서나 보던 잔소리를 하곤 한다. "넌 언제 장가가니?" "너무 나이들기 전에 아이를 낳아야지." 예전엔 '비혼주의자'라느니 '결혼제도에 반대한다'느니 하는 말을 잔뜩 힘줘서 했던 것 같지만, 요즘은 그냥 얼렁뚱땅 넘긴다.

어른들도 으레 던지는 한두마디 이후엔 더 길게 잔소리를 하지 않으신다. 짧아진 잔소리의 이유가 '쟨 아무래도 글렀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2023년의 대한민국에서 (유무형의) 자산이라곤 하나 없는 임금노동자가 '결혼 시장'에서 살아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게돼서 인지는 잘 모르겠다.  

확고한 비혼주의자이던 때도 있었다. 결혼제도라는 것이 유한하고 추상적인 '감정'을 볼모로 계약관계를 맺는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인간의 평균수명이 마흔살 남짓이던 시절에나 가능하던 제도라고도 생각했다. 이십년을 따로 산 사람 둘이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견뎌가며 살아가는 기간이 고작 이십년 정도이던 시절에나 가능하던 제도. 백세시대에 혼자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긴 시간을 함께 살아가게 강제하는 제도란 도태될 수밖에 없는 제도라고 생각했다. 그런 이야기를 할 때면 "황혼 이혼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 명확하지 않느냐"고 말했었다.

지금도 근본적으로는 그 때와 생각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확고하게 '비혼'을 말하진 않는다. 조금 더 살아보니 삶에서 확고한 생각과 말이란 것은 너무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알게되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보다는 결혼이라는 것이 예전보다도 더 대수롭지 않아졌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을 바라면 기꺼이 결혼을 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는 정도가 지금의 결혼에 대한 공식입장이다(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이란 결혼상대인 연인은 물론, 모친을 비롯한 주변의 가족들도 포함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을 바라면 기꺼이 결혼을 할 수도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 ⓒ Unsplash

 
결혼은 딱 그만큼의 의미인 것 같다. 혼자 살아가는 삶을 외롭다고 할 때도, 편안하다고 때도 있는 것처럼 함께 살아가는 것 역시 충만하다고 할 때도, 번잡하다고 할 때도 있는 것이다. 삶의 행복이란 몇 명짜리 가정을 이루느냐 같은 것으로 단순화 시킬 수 없다.

결혼과 출산, 가정을 이루는 것이란 그보다는 훨씬 현실적인 문제다. '삶의 행복'이 아니라 '생활의 무게'를 가늠하는데 결혼과 출산이라는 척도를 들이밀면 수긍할 수밖에 없다. 단적으로 (다소 아이러니하게도) 확고한 비혼주의자이던 시절보다 지금의 내가 결혼을 할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 역시 다분히 현실적인 이유다.

십여 년쯤 경제생활을 하다보니 내가 앞으로 벌어들일 수입이 어느 정도일지 어림잡아서라도 짐작할 수 있게 됐고, 지나온 삶의 궤적을 살펴보니 앞으로 어떤 삶의 가치관으로 살아가게 될지도 어림잡아서는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삶에 큰 변동이 없다면, 난 아마 내 또래 연령이 받는 평균임금 수준을 오갈 것이고(지금도 딱 그 지점을 오가고 있고), 주식-부동산-코인 같은 투자를 '투기'라고 여기는 태도가 변하지 않을 것이다(꼭 그렇게 여기지 않아도, 어차피 투자할 돈도 없다). 대출이자가 부담스러워 서울 변두리 월세에 살아가는 경제관념도, 또 큰 대출은 받지 못하는 경제규모도 좀처럼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 스스로는 꽤 만족하는 삶이지만 사회가 안정적이라고 여기는 생애주기의 사이클에는 좀처럼 들어서기 어려울 것이다. 종종 연애는 할 수 있겠지만, 안정적이지 못한 삶의 주기를 이미 예고한 삼십대 후반의 남자는 내가 생각해도 결혼 상대로선 좋은 평가를 받기 어렵다. 결혼은 생활과 생활이 결합하는 문제기 때문이다.

명절이면 집안 어른들이 하는 장가가란 잔소리에 정작 우리 모친께선 말을 더하지 않는다. 모친께서도 내심 하나뿐인 아들이 장가가고, 예쁜 손주도 낳아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어하시지만, 당신께서 직접 "차마 장가가란 말을 못하겠다"고 하셨다. '얜 아무래도 글렀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신지, 아니면 '생활의 무게'를 견뎌내지 못하는 삶이 행복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를 매우 잘 알고 계시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당신들만 모르는 생활의 무게

며칠 전엔 어느 국회의원이 저출산 문제의 원인은 "<나 혼자 산다>와 불륜과 사생아가 나오는 드라마 때문"이라고 말했다는 기사를 봤다. 그보다 얼마 전에는 다른 국회의원이 <나 혼자 산다>가 저출산을 유발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나 혼자 산다>때문에 "혼자 사는 것이 더 행복한 것으로 인식된다"는 주장이다.

MBC의 간판 예능프로그램인 <나 혼자 산다>가 정규편성되기도 전에 (무려 추석특집 파일럿 편성일 때) 본 기억이 난다. 애초의 기획은 기러기 아빠나 20~30대 남성이 자취방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청소를 잘 하지 않고, 인스턴트 음식을 먹으며, 본래는 하얀색이던 베갯잇이 누래져 있다. 바깥에서는 화려한 삶을 살아가는 연예인들이 혼자 살아가는 일상의 공간에선 이토록이나 지질한 모습이라는 것이 프로그램의 웃음 포인트였다. (기획의도는 거창했다. "늘어난 1인가구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며 사회적 공감대를 얻는다"는 것이었나.)
 

<나 혼자 산다>의 한 장면 ⓒ MBC

 
프로그램을 보면서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드라마 속의 화려한 배우가 집에서는 먹다 남은 컵라면 그릇을 싱크에 잔뜩 쌓아 두는 모습이나, 해가 뜨고 지는 동안 침대 밖으로 한번도 나오지 않은 채 홈쇼핑 채널에 집중하는 록스타의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웃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니까 <나 혼자 산다>의 애초의 웃음 포인트는 연예인의 화려한고 부러운 생활이라기 보다는 평범하고 지질한 생활에 있었다.

시청자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언젠가부터 PPL 노출을 위해 눈 뜨자마자 건강기능식품을 먹거나, 어울리지 않는 안마의자에 앉아있는 모습이 나타나면서, 영화나 드라마 홍보를 위해 단발성으로 출연하는 연예인들의 작위적인 모습 같은 것들이 내용의 주를 이루면서 재미가 반감했다. 덩달아 프로그램의 인기도 하락했다.

말인즉슨, 애초에 버는 돈의 단위가 다른 수퍼스타들의 일상을 전시하는 프로그램에서 나를 비롯한 시청자들은 그저 피식거릴 웃음의 요소를 발견할 뿐 거창하게 삶의 행복 같은 것을 찾지 않는 다는 것이다. 어느 국회의원들의 말대로 그저 방송 프로그램으로 사람들이 행복의 척도를 그린다면, 혼자사는 화려한 삶이 더 나타날수록, 각종 화려한 물건들의 PPL이 범람할수록 <나 혼자 산다>의 인기는 올라야 하지 않나. 또 한동안 육아 예능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나 요즘처럼 방송사 프라임 타임마다 부부 예능이 주를 이루는 시기에는 출산율과 결혼율이 올라가야 하지 않나. (심지어 부부가 사는 집이기 때문에 부부 예능이나 육아 예능에 나오는 연예인의 집과 생활이 더 화려하고 비싸보인다.)

시청자들은 연예인들이 입고 먹고 사는 것들을 때때로 부러워는 하지만, 그래서 가끔은 무리해서 그것들을 사기도 하고, 또 가끔은 부러운 마음에 악플을 달기도 하지만, 그 프로그램 때문에 '삶의 행복'이 무엇인지에 대한 자기 규정을 바꾸진 않는다. 혼자 살아본 사람들은, 아니 사실 그냥 어떻게든 '살아 본' 사람들은 알고 있다. 저 화려한 삶이 행복은 아닐 수도 있다는 것도, 저 화려한 생활의 무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생활의 무게와 삶의 행복이라는 것이 실은 다르다는 것도. 그러니까 그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혼자서도, 여럿이도 '삶을 살아본 적'도 '생활을 꾸려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다. 나오는 대로의 말과, 꾸며내는 대로의 관념만 있는 사람들.

저출산의 문제가 심각한 수준이라는 데에 동의하지 않을 사람은 없다. 출산과 결혼을 계획하지 않고 있는 나도 이 문제에 일부 기여하고 있는 것이겠다. 정부와 정치권이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하고 힘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지를 먼저 아는 것이 중요하겠다. 필요한 것은 "<나 혼자 산다> 때문에 출산율이 떨어진다"같은 어설픈 떠넘기기와 단정이 아니라 질문이다. 그리고 질문은 "왜 장가 안가느냐"가 아니라 "당신이 짊어진 생활의 무게가 무엇이냐"여야 한다. 결혼과 출산은 '생활'의 문제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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