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1.24 19:35최종 업데이트 24.01.24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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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개남 장군 한 장의 사진으로 남은 김개남 장군의 모습. ⓒ 정읍시청

 
동학혁명 혹은 동학농민운동은 반외세·반봉건운동이다. 이 속에 담긴 반외세 혁명의 성격은 전봉준과 최시형에게서도 나타나지만, 김개남에 의해 훨씬 선명히 드러난다.

1894년 상반기에 있었던 동학군의 제1차 봉기는 반봉건을 위한 것이고, 하반기에 일어난 제2차 봉기는 반외세를 지향한 것이었다. 제1차 봉기가 제2차 봉기로, 반봉건 운동이 반외세 운동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김개남이 보여준 모습은 그가 가장 원론적이고 가장 강경한 반외세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동학혁명 등에 관한 역사서인 황현(1855~1910)의 <오하기문>은 전북 태인 출신인 김개남을 김기범(金箕範)으로 표기했다. 2022년에 <동학학보> 제62호에 게재된 이선아 전북대 연구원의 '호남의 동학과 개벽의 꿈 - 태인 유생 김기범에서 동학접주 김개남'에 인용된 유생 기행현의 <홍재일기>에도 김기범으로 적혀 있다.

김개남이 된 김기범

황현은 오늘날의 정치평론가처럼 상황을 예리하게 관찰했다. 기행현은 김개남이 전국적 인물이 된 뒤인 1894년 하반기에 김개남을 만났다. 이런 사람들이 김개남 대신 김기범이란 이름을 사용했다. 이선아 논문은 "동학농민혁명 당시에도 유생들에게는 김개남보다 김기범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한다.

이 논문에 따르면, 김개남의 족보상의 이름은 영주(永疇)이고 기범과 기선(箕先)은 성인식인 관례 때 받는 이름인 자(字)였다. <홍재일기>에 기범(基凡)으로 표기돼 있지만, 이는 중요하지 않다. 한자로 된 인명이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발음은 같지만 뜻이 다른 글자로 바뀌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개남(開南)은 김개남 본인이 붙인 이름이다. 호(號)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김개남은 이 이름의 작명자가 자기 자신이 아닌 초월적 존재라고 말했다. <오하기문>은 동학혁명 시기에 그가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 손바닥에 개남이라는 두 글자를 써주었다"며 "그래서 호를 개남으로 했다"고 말한 일을 소개한다.

신령을 등장시킨 것이나 동학혁명 시기에 이런 말을 한 것을 감안하면, 개남은 꽤 혁명적인 글자다. 남쪽을 개벽시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동학혁명을 좀더 급진적인 방향으로 이끌고자 했던 그의 지향성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조선시대의 '강남좌파'?

김개남은 전봉준이나 최시형보다 훨씬 '왼쪽'에 있었다. 이런 성향은 그가 빈농 출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을 낳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동학혁명 당시 그의 부대에 하층민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 자신은 부유한 가문의 일원이었다. 철종 임금 때인 1853년에 출생한 그는 요즘 말로 하면 '강남 좌파' 비슷했다. <오하기문>은 "기범의 집안은 대대로 태인의 세력가였다"고 알려준다.

김개남은 지방 세력가인 자기 가문 내에서도 영향력이 상당했다. "기범은 음흉하고 사나웠으며 무력으로 일을 해결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난을 일으켰을 때 그 집안 사람의 대부분이 그를 따라 나섰다"고 한 뒤 "그리하여 도강 김씨 가운데 접주가 된 사람이 24명이나 되었다"고 <오하기문>은 기술한다.

이 책에서 황현은 동학군을 '도적' 혹은 '도둑'으로 불렀다. 동학에 대한 편견이 깔린 책이기 때문에, 이 책에 나오는 '음흉하고 사나웠다'는 표현은 기획력이 있고 결단성이 있었음을 가리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 가문 사람들이 그를 따라 동학군에 가담한 데는 이런 기질적 특성도 작용했으리라 볼 수 있다.

김개남은 19세 때 연안 이씨와 혼인했다가 상처하고 20세 때 전주 이씨와 재혼했다. 두 번째 부인은 전라도 임실 사람이었다. 김개남은 재혼 뒤 임실에서 서당 훈장이 됐다. 훈장이 되려면 <천자문>은 기본이고 <통감> 같은 역사서나 사서오경 같은 철학서도 익히 알고 있어야 했으므로 20세 무렵의 김개남은 상당한 교양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김개남 장군 태생지 정읍 산외면 정량리 원정마을의 김개남 장군 태생지 알림판. ⓒ 이영천

 
1995년 <한국근현대사연구> 제2집에 실린 역사학자 이진영의 '김개남과 동학농민전쟁'에 따르면, 김개남의 손자인 김환옥은 최시형이 임실을 방문한 1873년에 김개남(당시 20세)이 동학 교인이 됐다고 증언했다. 하지만 이 논문은 입교 시점을 뒤로 늦춰 "늦어도 39세 되던 1891년 초엽에는 동학에 깊이 관련"됐다고 말한다. 위 이선아 논문은 정식 입교 시점을 1889년으로 추정했다.

정식 입교 시점에 관계없이, 김개남은 자신이 1873년에 입교했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런 그의 생각이 손자의 증언으로 연결됐으리라 볼 수 있다.

1890년경을 전후해 동학에 깊이 관련된 김개남은 그 뒤 교단 내에서 급성장했다. 동학이 팽창된 교세를 바탕으로 교조 최제우 명예회복운동을 전개하던 시기에 그는 동학 내의 유망한 지도자로 부각됐다. 이선아 논문은 이렇게 정리한다.
 
"1891년에 최시형을 만났고, 1892년에 교조신원운동을 전개할 때에 전라도의 접주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1893년 3월 보은집회 때에는 최시형은 태인포라고 명명하고 그를 대접주로 임명하였다."
 
이렇게 1890년대 전반에 급성장한 김개남은 1894년 동학전쟁 당시 전봉준·손화중과 더불어 동학군의 주요 지도자로 부각됐다. 이들의 지휘하에 동학군은 최대 산업 지역의 중심지인 전주성을 점령해 조선왕조를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고종의 요청하에 들어오고 일본군이 그런 요청 없이 뒤따라 들어와 경복궁을 점령한 뒤로 동학군 지도부 내의 입장 차이가 두드러졌다. 일본군을 몰아내야 한다는 대의에서는 이견이 없었지만, 경복궁 내의 고종이 일본군의 수중에 있다는 점이 분란의 원인이 됐다.

전봉준은 전봉준대로, 김개남은 김개남대로

동학군은 일본에 맞서 봉기할 것인가를 두고 내부 분열을 일으켰다. 2000년에 <동학연구> 제6집에 실린 역사학자 이희근의 논문 '1894년 동학 지도부의 제2차 기병(起兵) 추진과 그 성격'은 이렇게 정리한다.
 
"이런 현상은 조선왕조의 체제를 인정하고 그 체제 내에서 개혁을 추진하려는 전봉준·최시형 등 동학 지도자들이 각 지역의 반일 봉기 움직임에 소극적으로 대처하는 한편, 재봉기를 제지하였기 때문이다. 이들 개혁적인 지도자들이 이런 태도를 취한 것은 섣불리 봉기하였다가 일본군의 볼모 상태인 고종의 안위에 (위험을 발생시킬 가능성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남쪽을 개벽하겠다는 의지를 가진 김개남은 고종의 안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새로운 왕조를 염두에 두고 있었으니 조선왕조 군주의 신병이 걱정될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항일 봉기를 적극 주장했다. 결국에는 전봉준과 최시형도 한양 조정의 뜻을 확인하고 제2차 봉기에 나섰지만, 이미 노정된 분열 상태를 해소하지는 못했다. 전봉준은 전봉준대로, 김개남은 김개남대로 항일 투쟁에 나서는 결과로 이어졌다.

역사학자 이이화의 <이이화의 인물 한국사> 제4권 김개남 편은 "2차 봉기가 일어날 적에 그는 전봉준의 공주 공격에 합류하지 않았다"면서 김개남이 자기 부대를 이끌고 "장수·금산·진잠을 거쳐 청주병영 공격에 나섰다"고 서술한다. 그런 뒤 "그의 청주병영 공격은 실패했으나, 청주병영의 관군이 공주전투에 투입되지 못하게 하는 데는 한몫했다"고 덧붙인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로 경제적 침략에 성공한 일본은 1894년에 군사적 침략을 통해 조선을 수중에 넣었다. 그런 뒤 러시아의 개입을 물리치고 1905년에 외교권을 빼앗았다.

1894년의 항일 투쟁에서 김개남은 가장 적극적이었다.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가장 선명한 방법으로 일본의 한국 침략에 대항했다. 국가보훈부가 지정한 독립유공자는 아니지만, 그가 고도의 항일투쟁을 벌인 사실은 부인될 수 없다.

대중적인 역사가인 이이화는 청주전투에서 패해 힘을 잃은 그가 지금의 전북 정읍시에서 관군 장교 황헌주에게 붙들리는 장면을 아래와 같이 묘사한다. 옛 친구 임병찬이 신고를 한 직후의 상황이다.
 
"황헌주가 김개남이 숨어 있는 집을 포위하고 어서 나오라고 소리쳤다. 이때 마침 김개남은 측간에서 대변을 보고 있다가 '올 줄 알았네. 똥이나 다 누고 나가겠네'라고 대꾸했다. 이렇게 해서 기개에 찬 영웅은 잡혔다."
 
음력으로 고종 31년 12월 25일자(양력 1895년 1월 20일자) <고종실록>은 김개남을 효수형에 처한 뒤 그 시신을 동학군 전투가 일어난 지역들에서 순회 전시했다는 보고가 고종에게 올라왔음을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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