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10 18:41최종 업데이트 24.02.10 1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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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독립운동지혈사> ⓒ 울산박물관


항일투사가 아닌데도 오랫동안 항일투사로 비친 극우파 인물이 있었다. 역사학자 겸 독립운동가인 박은식의 책에 나오는 맹영재가 바로 그다.

박은식은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과정에서부터 이 정부에 깊이 개입했다. 또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에서 이승만 탄핵안이 가결된 1925년 3월 18일 제2대 대통령에 당선돼 7월 7일까지 재직하고 11월 1일 향년 66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독립운동뿐 아니라 역사 서술로도 임시정부와 관련이 깊었다. 임시정부 기관지인 1919년 10월 14일 자 <독립신문>은 "겸곡 박은식 선생은 독립운동사의 편찬에 착수하리라"라는 말로 그의 <한국독립운동지혈사> 출간을 예고했다. 임시정부 기관지가 박은식 책을 '사전 홍보'해 준 셈이다.

또 <독립신문>에 보도된 독립운동 관련 기사들뿐 아니라, 국무총리대리 안창호가 총재이고 독립신문사 사장 이광수가 주임인 임시정부 임시사료편찬회가 간행한 <한일관계사료집>도 <한국독립운동지혈사>의 밑바탕이 됐다. 박은식이 임시정부 자료들을 기초로 독립운동의 피의 역사를 서술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임시정부와의 관련성으로 인해 박은식이 1915년에 출간한 <한국통사>와 1920년에 펴낸 <한국독립운동지혈사>는 상당한 정통성을 띠게 됐다. 그런데 그런 박은식의 책에서 전혀 엉뚱한 인물이 항일투사로 잘못 기재되는 일이 일어났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명성황후 시해(을미사변, 1895년 10월 8일) 및 그 직후의 단발령 실시(11월 15일)에 맞서 일어난 을미의병을 설명하다가 "맹영재·김백선은 지평에서, 허위는 문경에서, 이설·김복한은 홍주에서, 기우만은 장성에서 모두 의병을 일으켰다"고 기술했다. 지금의 경기도 양평인 지평에서 맹영재(?~?)와 김백선(1873~1896)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설명이다.

박은식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이 부분을 좀 더 자세히 서술했다. "지평 사람 맹영재·김백선 또한 군사를 일으켜 이에 호응하였다"라며 "일본 군대와 수개월 동안 교전하여 서로 살상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한국통사>에서 박은식은 충청도 제천 의병장인 유인석의 투쟁을 가장 먼저 소개한 뒤 맹영재를 언급했다.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유인석·이인영·이강년을 한데 묶어 간략히 설명한 뒤 맹영재의 활약상을 설명했다. 임시정부와 함께하는 역사학자가 맹영재의 항일을 이처럼 비중 있게 묘사했고, 그 뒤 그 역사학자가 임시정부 대통령이 됐다. 이 정도면, 맹영재가 훌륭한 항일투사로 알려질 조건이 형성됐다고 볼 수 있다.

을미의병으로 볼 수 없는 인물

대한민국에서 독립유공자 서훈이 본격화된 것은 1960년 4·19혁명 뒤인 1962년이다. 1962년의 전년도에 5·16쿠데타가 있었다는 이유로 이때의 독립유공자 서훈이 5·16 쿠데타의 산물인 양 잘못 알려지기도 했지만, 박정희가 독립유공자 서훈을 추진한 최대 동기는 4·19 민심을 달램으로써 정권의 정당성을 구축하는 데 있었다.

이런 상황은 이미 죽은 맹영재의 위상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이 시기부터 독립유공자들이 대거 발굴되면서 그가 항일과 거리가 멀다는 점이 계속해서 부각됐다.

1962년에 을미의병장 이소응(1852~1930)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된 일 등을 계기로 부각된 맹영재의 실체가 국가보훈처가 1986년에 발간한 <독립유공자 공훈록> 제1권에 적혀 있다. 1896년 연초에 천여 명을 기반으로 춘천에서 의병을 일으킨 이소응이 "병력을 증강하기 위하여 몸소 지평군수 맹영재를 찾아가 협상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고 공훈록은 알려준다.

맹영재가 의병 활동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점은 1968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된 또 다른 을미의병장인 김백선에 관한 위 공훈록의 기록에도 나타난다. 공훈록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함을 참지 못하던 중 임금이 강제 삭발을 당하였다는 소식과 함께 지방에서도 단발령이 시행되고 인심이 크게 설레니 김백선은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할 것을 결심하였다"고 말한다. 그런 뒤 "이에 맹영재를 찾아가서 군사를 일으켜 적을 토벌하자고 권하였는데, 맹은 이해관계를 말하며 응낙하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맹영재가 그런 모습은 위 책에 나오는 을미의병 이진응·김경달·이춘영에 관한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이춘영 편에는 "맹영재는 이미 거의할 뜻이 없었다"고 기술돼 있다.

맹영재는 얼마 안 있어 사망했다. 이때 그의 아들이 보여준 행동이 특이했다. 김경달 편에는 "맹영재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은 의병장 최삼여를 죽여 의병진의 활약을 봉쇄"했다고 말한다. 을미의병을 반대한 맹영재가 사망하자, 그 아들이 의병장을 살해하고 의병 활동을 방해했던 것이다.

맹영재 집안은 선비 가문이었다. 그런 집에서 삼년상 기간 내에 살상을 저질렀다. 그것도 의병장에 대한 살상이었다. 뒤이어 의병 활동에 대한 방해가 일어났다. 죽기 전에 맹영재가 의병 불참을 미안해했다면, 그 아들이 아버지가 죽은 직후에 이런 행동을 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맹영재가 의병에 대한 악감정을 가진 상태에서 눈을 감았다고 해야 그 아들의 행동이 이해된다.

이처럼 맹영재는 을미의병으로 볼 수 없는 인물이다. 그런데도 20년 뒤에 나온 박은식의 <한국통사>에 이어 <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도 그가 대표적인 을미의병으로 거명했다. 훗날 진상이 확인되지 않았다면, 박은식이라는 역사학자의 무게로 인해 맹영재가 훨씬 오랫동안 을미의병장으로 기억됐을 것이다.

오랫동안 독립운동가처럼 비친 이유
 

일본 제국주의에 맞서 무장한 의병 ⓒ 위키미디어 공용

 
맹영재가 실제와 달리 을미의병장으로 기록된 데는 착각을 유도할 만한 이유들이 작용했다. 그는 을미년 1년 전인 갑오년에 민병대를 이끌고 동학농민군(갑오농민군)을 토벌했다. 강원도뿐 아니라 황해도에까지 원정을 가서 동학군을 토벌했다. 이때 포수들을 이끌고 맹영재와 함께한 인물이 위의 김백선이다. 맹영재가 지평군수가 된 것은 동학군 격파에 기여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동학혁명이나 동학농민운동 같은 긍정적 표현이 사용되지만, 1987년 6월항쟁 이전만 해도 '동학난'이라는 표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됐다. 동학군을 혐오한 보수 기득권층의 시각이 20세기 후반까지도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랬기 때문에 동학혁명 직후에는 진압을 주도한 맹영재 같은 인물들이 훌륭한 귀감으로 포장될 수밖에 없었다. 박은식이 맹영재에 관한 좋은 시각을 유지한 데는 이런 분위기도 한몫했으리라고 볼 수 있다.

박은식이 오류를 범하게 된 또 다른 이유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맹영재가 을미의병을 지휘했다는 오해하게 만들 만한 일이 김백선이 맹영재를 찾아갔다가 퇴짜를 당한 직후에 일어났다. 위 공훈록에 따르면, 퇴짜를 맞은 김백선은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친 뒤 총을 부숴버리고 그 집을 나와 자결을 시도했다. 이때 자결을 저지한 인물이 위의 이춘영(1868~1896)이다.

김백선은 이춘영의 권유를 듣고 맹영재 쪽으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김백선은 맹영재가 지휘하는 포수군 400명을 빼앗아 오기로 마음먹었다. 공훈록에 따르면, 이 부대는 동학군 토벌 과정에서 김백선이 양성하고 맹영재가 지휘한 병력이었다. 김백선은 부대원들을 설득해 모두를 빼내 오는 데 성공했다.

위 공훈록의 이춘영 편은 그 병력이 이춘영 휘하에 들어갔다고 말한다. 이춘영이 자결을 시도하는 김백선을 설득하면서 무슨 제안을 했겠는가를 추론케 만드는 장면이다.

김백선이 양성하기는 했지만 외형상으로는 맹영재의 지휘를 받는 포수부대였다. 이 부대 전체가 을미의병에 가담했다. 맹영재가 을미의병을 지휘한 듯한 인상이 이로 인해 얼마든지 조성될 수 있었다. 박은식이 을미의병이 일어난 지 20년이 흐른 뒤에도 착오를 범한 데는 이런 사정도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맹영재는 농민군 진압에 선뜻 나서면서도 일본군 진압 앞에서는 주판알을 튕기는 극우파였다. 이런 인물이 오랫동안 독립운동가처럼 비쳤다. 뒤늦게나마 그의 실체가 규명된 것이 천만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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