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21 11:48최종 업데이트 24.02.21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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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서울의 봄>은 군사 반란이 일어난 1979년 12월 12일 저녁 7시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의 9시간을 담았다. ⓒ 하이브미디어코프

 
'사건이나 사고 이전에 사람을 먼저 알자'는 취지로 첫 번째 소개했던 이들은 70대 이상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몸으로 받아낸 '국제시장 세대'였다. 공교롭게도 요즘 이승만 미화를 통해 역사 왜곡을 작심한 영화 <건국전쟁>을 한국의 대형 교회들이 단체관람하며 흥행을 주도한다는 소식에 참담하고, 모두에게 송구한 마음이다.

이제 그들과 40년 이상 서로 맞서는 시대 인식으로 살아온 50대 전후의 나 같은 세대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리는 대개 1990년대부터 소위 386세대(30대-80년대 학번-1960년대생)로 불리며 주목받기 시작한 이래, 세월에 따라 나이의 변화를 반영하여 486, 586으로 불릴 정도로 여전히 사회적 영향력이 크다.


'국제시장 세대'가 한국전쟁과 생존 전쟁으로 기억된다면, 우리 세대를 일으키고, 지금껏 가로지르는 세대적 경험은 틀림없이 1980년 광주다. 마침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당시 분위기를 깊이 느낄 수 있다. 영화의 소재인 12.12 군사반란은 18년 동안 절대권력이었던 박정희의 죽음 후 권력 공백을 둘러싼 군부와 정치권력의 교체 이야기다.

그로부터 1980년 5월 광주까지 약 반년 동안 3김 등 주요 정치인뿐 아니라 유신독재에 염증을 느끼던 대학생과 청년층의 민주주의 요구가 분출했다. 결국 신군부는 그것을 빌미 삼아 국가안전을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엄청난 광주학살을 일으켰다(광주학살 직후 보안사령관과 중앙정보부장을 겸직하던 전두환은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장까지 차지하며, 이미 실권을 잃은 최규하 대통령을 몰아내고 차기 대권을 쥘 모든 준비를 마쳤다).

1980년 8월 마침내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유신 시대에 버금가는 군사 독재, 공안 통치를 이어가며 언론과 여론을 통제했다. 그러나 1980년 5월 광주의 소식은 숨기려 할수록 더욱 은밀히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쉬쉬하는 소문으로, 누군가 몰래 만든 유인물로, 그리고 끔찍한 광경을 담은 사진과 더 은밀한 비디오 영상까지 조금씩 유통되기 시작했다.

아무리 권력에 대한 욕심이 크기로서니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라고 준 총으로 한 도시의 무고한 시민들을 무참히 살육해 버린 참상에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대학 시절 1980년 광주 참상이 담긴 여러 종의 자료를 본 적 있지만, 199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대중 후보의 서울교대 앞 유세에 갔다가 '광주 비디오'를 사서 처음 봤을 때 경험한 충격이란 말로 다 하기 어려웠다.

광주 충격에서 시작된 1980년대 청년·학생들의 군사 독재 타도와 민주화 운동은 그렇게 공유된 세대적 경험이 되었다. <꽃잎>(1996년), <박하사탕>(2000년), <화려한 휴가>(2007년), <택시 운전사>(2017년) 등 참담했던 그 시절을 담은 영화들이 잇따라 만들어졌다.

부모나 선배 세대와 전혀 다른 시각
 

2월 17일 자 <한겨레> 기사 '미국 비밀문서 속 12.12와 5.18' ⓒ 한겨레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79년 12.12 군사 반란과 1980년 5월 광주에 이르는 신군부의 권력장악과 잔인한 국민 탄압, 학살의 과정을 미국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미국은 백악관, 국무부, 국방부, 중앙정보국(CIA)과 주한 미국대사관을 오르내리며 한국 상황에 대해 한국 정치권과 신군부와 소통하며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2월 17일 자 <한겨레> 기사 '미국 비밀문서 속 12.12와 5.18' 참조).

12.12 직후 신군부를 불안하게 주시하던 미국은 결국 '한국의 안정'과 '미국의 이익'을 위해 그들을 묵인하며, 관리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광주학살이 벌어지던 시기에도 미국은 우려, 압력, 허용 등을 오가며 전후 과정을 알면서도 결국 묵인했다.

무엇보다 한국군 작전권을 갖고 있던 미군이 광주작전에 투입된 공수부대를 비롯한 주요 부대의 이동을 허용했던 사실은 명백했다. "현재 한국의 상황에 대한 전반적인 토의 결과, 향후 더 큰 불안의 씨앗을 뿌리지 않은 상태에서 최소한의 무력을 사용하여 한국 당국이 광주에서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데 의견이 모아졌음.(2급 비밀)"(앞의 <한겨레> 기사)

물론 당시에는 이같은 비밀문서의 존재를 확인하기 전이었지만, 당시에도 안팎의 정황과 외신 보도 등을 통해 개략적인 전개 과정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이를 알게 된 청년·학생들은 분노하며 특히 미국에 대해 앞선 부모, 선배 세대(4.19, 유신 세대)와 전혀 다른 시각을 갖게 되었다.

그들은 미국 문화원을 점거하고, '미국 반대'와 '주한미군 철수'를 거리낌 없이 외쳤다. 이승만과 박정희의 독재를 알고 있어도, 미국만은 자유와 민주, 풍요의 나라이며 우리를 먹여 살리는 혈맹의 나라로 믿고 있던 부모, 선배들과 어떻게 공존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당시 우리 세대는 부모 세대를 독재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는 비겁한 어른으로 여겼다. 반면, 부모들은 걷잡을 수 없이 '빨갱이'가 되어가는 자식들을 바라보며 깊은 우려에 빠졌다.

아버지가 지휘하는 경찰 진압 작전에, 형이 동원되어 동생을 잡아가는 비극의 가족사가 낯설지 않은 참으로 가슴 아픈 시대였다. 청년 시절 나와 같이 교회를 다니던 절친의 아버지가 기동대 경찰이었다. 가끔 그 집에 놀러 가서 마주치면 친구 아버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행동 조심하고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했던 기억이 난다.

무고한 국민을 죽인 정권과 그들을 지원하는 미국이라는 참을 수 없는 공공의 적에 대항하며 우리 세대는 자연스럽게 반미와 사회주의, 북한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이어졌다. NL(National Liberation, 민족해방파) 또는 주사파로 불리는 운동 세력은 그렇게 태어났고, 30여 년이 흐른 지금까지 우리 세대를 일컫는 상징 가운데 하나가 되어 버렸다.

당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시대의 자식
 

15일 오전 서울 종로구에서 바라본 서울시내가 안개와 비로 뿌옇다. ⓒ 연합뉴스

 
1966년에 태어나 1985년에 대학에 입학했던 나는 그렇게 열렬한 운동권은 아니었지만, 기본적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대학 시절 이후 실천 현장에서 한 역할을 감당해 왔다. 우리는 지나친 이념 주의와 섣부른 이원적 사고로 크고 작은 문제의 중심이 되기도 했지만, 1980년 광주를 공유하는 시대의 자식으로서 오늘과 같이 민주주의와 기본인권이 일상화되는 시대를 만드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민주화 운동의 주역을 자부하던 우리 세대 역시 한국 사회의 통합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깊은 성찰과 반성이 필요하다. 서강대 이철승 교수는 <불평등의 세대>(문학과지성사, 2019년)라는 책을 통해 86세대를 재평가하는 논의에 불을 붙였다. 되돌아보면 우리는 한국 사회의 첫 번째 황금기를 관통한 세대이다. 베이비붐 세대의 말미에 태어나, 한국경제의 고도성장기(1970~80년대)에 청소년, 청년기를 보내며 마이카시대라고 불리던 중산층 신화의 혜택을 받았다.

고등교육이 일반화되고 1980년대 대학입학정원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그 수혜로 대학가 시대를 열었고, 취업이 아닌 여행을 목적으로 해외에 나간(1989년) 첫 세대가 되었다. 더 좋고 나쁜 직장의 차이는 있었지만, 취업 자체는 크게 어렵지 않았다. 1990년대 세계화와 경제개방 속에서 맞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사태와 2008년 세계 금융위기의 직격탄도 윗세대와 아랫세대에 집중되면서 우리는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받았다.

무엇보다 1980년대부터 민주화 세대라는 연대감 속에 정치, 경제, 사회 등 각계에 구축된 협력 기반이 다른 세대에게는 기득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다른 세대를 압도하는 고위직 장악률과 상층 노동시장 점유율, 최장의 근속연수, 최고 수준의 임금과 소득점유율, 꺾일 줄 모르는 최고의 소득상승률, 세대 간 최고의 소득격차, 이 모든 것이 어떻게, 성장이 둔화되어 가는 경제에서 가능했을까?"(이철승, <불평등의 세대>130쪽)

지금은 조국 사태를 거치며 민주화 세대의 특권화, 기득권화를 깊이 의심받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명심해야 할 게 있다. 다른 세대도 다 그렇듯이 우리 역시 하나의 모습만은 아니었다. 우리를 흔히 86세대로 부르지만, 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세대로 일반화하기에는 당시 늘어난 수치를 감안해도 대학 진학률은 30%를 겨우 넘을 정도였다.

단순화하면, 86세대의 다수인 70%가량은 오늘날 각계의 주류, 기득권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 당시 그들은 대학 대신 공장, 농촌, 광산 등에서 살아왔다. 더구나 같은 세대라도 여성의 위치와 자리는 철저히 '중하층 노동시장-비정규직이나 파트타임'(같은 책, 246쪽)에 머물렀다.

80~90대를 부모로, 지금 시대 가장 뜨겁게 주목받는 20~30대를 자녀로 두고, 은퇴를 앞둔 우리 역시 지난 30여 년 동안 뜨거운 열정으로 살아왔다. 공교롭게도 우리는 한국 현대사상 가장 뜨거운 세 세대를 관통하며 살아왔다. 그러므로 우리 세대가 부모 세대와 어떻게 화해하고, 불화하는 자녀 세대와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는 단지 한 가정을 넘어, 대한민국과 한반도의 미래를 좌우할 사활적 과제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그저 우리 시대의 기억과 경험에서 머물러 '라떼'만을 반복하면 대한민국은 불통하며, 다음 세대는 길을 잃게 될 것이다. 우리는 80년 광주를 경험하며 대의와 가치에 따라 나름 뜨겁게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 역시 당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시대의 자식이며, 30~4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의 생각과 경험이 전부이거나 모두 옳은 것이 아님을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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