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2.26 15:28최종 업데이트 24.02.26 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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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나라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띄우는 <건국전쟁>의 이승만도 "우리들 대한국민은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라는 헌법 전문을 감히 부정하지 못했다. 3·1운동의 독립정신이 대한민국의 근간이라는 대명제를 이승만도 어쩌지 못한 것이다. 그 후의 역대 헌법과 대통령들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지난해 3·1절 기념사 때 윤석열 대통령은 "3·1운동 이후 한 세기가 지난 지금 일본은 군국주의 침략자에서 우리와 보편적 가치를 공유하고 안보와 경제 그리고 글로벌 어젠다에서 협력하는 파트너가 되었습니다"라고 한 뒤 "한·미·일 3자 협력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고 나서 "이것은 104년 전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외친 우리 선열들의 그 정신과 결코 다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 3·1정신이 한일 파트너십 및 한미일 협력에 있다고 발언한 것이다. 3·1운동의 독립정신이 대한민국의 근간이라는 헌법 전문에 어긋나는 말을 한 것이나 다름없다. 일본과의 문제들이 해결됐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는 한일 파트너십이 절대로 3·1정신이 될 수 없다. 일본 총리가 아닌 대한민국 대통령이 대한민국의 근간을 흔드는 발언을 내놓았던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일본은 성큼성큼 서진(西進)하며 식민지배 청산을 방해하고 있다. 거기다가 더욱 노골적으로 영토를 요구하고 있다.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을 하루 앞둔 지난 21일에는 가미카와 요코 외무대신이 조태열 외교부장관 앞에서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독도가 일본 땅이라는 주장은 '그런 줄 알고 있으라'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독도를 내놓으라'는 공격적 의미를 담고 있다. 독도 영유권에 관한 22일 자 <산케이신문> 사설에 나온 "한국은 일본에 사죄하고 반환해야 한다"라는 주장이 일본의 본심이다. 안에서는 대통령이 3·1정신을 흔들고, 밖에서는 일본이 영토를 요구하고 있으니, 대한민국은 내우외환에 빠져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왜 지금 이순신인가?
 

일제청산연구소 제9차 월례포럼에서 강의하는 이충렬 이순신정신계승포럼 대표. ⓒ 일제청산연구소

 
이런 위기 상황에 맞서 '대일관계의 패러다임을 바꾸자'고 거듭 주장하는 이가 있다. 국회의원 69명이 작년 6월 27일 '남해의 이순신해 병행 표기 및 이순신 기념사업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을 발의하도록 하는 데 기여한 이충렬 이순신정신계승포럼 대표다.

일제청산연구소(소장 양진우 목사)와 기독교매체 C헤럴드가 지난 25일 경기도 하남시 초이화평교회에서 주최한 제9차 월례포럼 강사로 나선 그는 한국 뉴라이트와 일본 극우가 한편이 되어 역사전쟁을 일으키는 현 상황을 제3차 정한론의 시대로 해석했다. 그는 "제3차 정한론은 저강도 정한론"이라며 "다짜고짜 군사력을 앞세워서 한반도에 전면전을 개시"한 제1·제2차 정한론과 대비시켰다.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의 조직부장, 미국 하원 국제관계위원회 초빙연구원, 노무현 대선캠프 정책특보, 조지 부시를 방문하는 노무현 대통령 특사 등을 역임한 이충렬 대표는 자신이 말하는 제1차 정한론은 1910년 대한제국 병탄으로 귀결된 요시다 쇼인(1830~1859)과 메이지유신 시대의 그 정한론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정한론을 최초로 주장한 사람은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였다"라고 말한다.

도요토미는 정한론에 입각해 1592년에 임진왜란을 도발했다. 그가 정한론자인 것은 맞다. 하지만 메이지유신보다 300년이나 앞선 사람이다. 300년 간격으로 벌어진 두 현상을 제1차와 제2차로 묶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들 만하다.

이에 관한 그의 구체적 설명은 1월 17일 자 <오마이TV> '일본의 3차 정한론, 이순신 정신으로 돌파하자!'에서 제시됐다. 이 방송에서 그는 제1차와 제2차의 인적 연관성을 지적했다.

제1차 정한론에 착수했다가 실패한 도요토미 히데요시 세력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비주류 세력이 됐다. 이들은 1603년에 세워진 무신정권인 도쿠가와막부 하에서 핍박을 받았다. 이런 역사를 지적한 그는 이 세력의 후예들인 사쓰마번(부산 남쪽)과 조슈번(부산 맞은편)의 무사들이 1868년 메이지유신 때 도쿠가와막부를 전복한 뒤 정한론을 재차 추진한 일을 거론했다. 그 같은 인적 연관성이 있으므로 임진왜란 시기를 제1차 정한론의 시대로 볼 수 있다는 게 그의 관점이다.

포럼에서 이 대표는 메이지시대의 정한론이 아닌 임진왜란 시대의 정한론을 제1차로 이해하게 되면 한일관계의 양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한국은 제2차 정한론 때는 나라를 잃었지만, 제1차 정한론 때는 나라를 지키고 일본군을 몰아냈다. 한국이 지는 정한론뿐 아니라 한국이 이기는 정한론도 있었다는 명제가 성립하므로, 한국이 열세로만 인식되던 한일관계가 달리 보이게 된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지난 1월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이 대표와 나눈 대화에서, 그는 구한말이 아닌 임진왜란 시기를 제1차 정한론으로 보게 되면 '한일전'에 나설 한국 대표팀의 컬러도 바뀌게 된다고 주장했다. 김원봉·김구·홍범도·김좌진 등은 잘 싸웠지만 일본을 몰아내지는 못했다. 이순신·권율·사명대사 등은 일본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두 시대의 항일 인물들을 묶어 대표팀을 재구성하면 한일관계 양상이 달라지리라는 게 그의 전망이다. 패배의 기억만을 갖고 싸움터에 나서는 것과 승리의 기억도 함께 갖고 나서는 것의 차이를 그는 강조한다.

포럼에서 그는 '이순신이 얼마나 위대했는지'라는 다소 식상할 듯한 이야기를 실감 나게 들려줬다. 이순신은 조정의 지원을 사실상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남해 해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23전 23승을 기록했다.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에서는 자기 목숨을 잃으면서까지 조선 수군의 승리를 얻어냈다. '산 이순신'뿐 아니라 '죽은 이순신'도 일본을 여유 있게 물리쳤던 것이다.

이충렬 대표는 '이순신이 없었다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칭기즈칸처럼 됐을 수 있다'는 소름 끼치는 가정을 제시했다. 도요토미는 조선은 물론이고 중국과 인도까지도 꿈꾸었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명분도 조선 정복이 아니라 정명가도(征明假道)였다.

동아시아는 물론이고 당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명나라를 정복하겠다고 나선 일본군이다. 그런 군대를 이순신이 막지 못했다면, 도요토미의 사무라이들은 명나라를 넘어 인도까지 갔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아시아 곳곳의 군대들이 일본군을 막느라고 진땀을 뺐을 것이다.
  
그는 이순신을 중심으로 한일관계의 새판을 짜는 것은 물론이고 이순신을 알리기 위한 국제적 프로젝트에 착수할 필요성도 제기한다. 대한민국 차원에서만이라도 남해와 이순신해를 병기하는 것, 식민지배의 역사가 서린 청와대 자리나 일본군 주둔지인 용산에 이순신기념관을 세우는 것, 베토벤이 나폴레옹을 기리는 교향곡 3번 '에로이카'를 만들었듯이 한국 음악가들이 이순신을 기리는 명량교향곡 같은 작품을 만드는 것 등등을 제안했다. 이런 방법으로 이순신의 기운을 오늘날에 되살리고 한일관계 재정립에 나서자는 게 그의 외침이다.

이충렬 대표의 제안은 당장 실현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간도 들여야 하고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런데도 그의 말에 귀가 솔깃해지는 것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이 예사롭지 않아서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3·1정신은 한일 파트너십 및 한미일 협력'이라고 말하는 현 상황이 참담하기 때문일 것이다.

재작년부터는 3·1절과 광복절을 앞두고 가슴 착잡해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이번엔 무슨 말이 나올까 염려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분위기를 조장하는 윤석열 정권의 반역사적 태도가, 한일관계 패러다임의 재정비를 촉구하고 있다.

 

일제청산연구소 제9차 월례포럼 포스터 ⓒ 일제청산연구소

 
덧붙이는 글 글쓴이는 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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