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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번 말고... 20대 여성 '15% 회색 표심' 의미

[보궐선거 그 후] 왜 '이대남'은 오세훈, '이대녀'는 군소 후보 선택했나?

등록 2021.04.18 11:32수정 2021.04.18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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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오후 서울 노원구 중평중학교에 설치된 서울시장 보궐선거 투표소에서 퇴근한 직장인과 시민들이 투표를 하고 있다. ⓒ 권우성

 
'이대남'은 젠더 문제 때문에 오세훈에게 투표했을까? 

"정부가 여성들을 배려하며 내놓은 각종 정책과 발언들은 보편적 의제로 다가가지 못하고 청년 남성들을 수혜자처럼 취급하고 배제했습니다."

4월 15일, 박창진 정의당 부대표가 재보궐 선거 이후 처음으로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꺼낸 말이다. 그는 "복지, 노동 등 청년 모두가 동의하는 문제를 해결합시다"라고 말하며 "성대결을 조장한 책임이 정치에 있다는 걸 반성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했다. 20대 남성들이 서울 재보궐 선거에서 왜 60대 남성보다 높은 수치로 오세훈 후보를 지지했는지 분석이 쏟아지고 있을 때의 일이다.

박창진 부대표는 20대 남성에 대한 이야기는 했지만 20대 여성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18세, 19세, 그리고 20대 여성이 재보궐선거에서 유일하게 '회색지대'를 만들며 15%나 1번 후보와 2번 후보 대신 다른 후보를 찍었다는 그 중요한 사실도 지적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글에는 20대 남성의 이야기가 20대 청년의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둔갑해 있었다. 모두를 위한 정치를 해야 한다는 글에 역설적으로 20대 남성의 이야기만 들어갔다는 사실은 글 내용보다 더욱 중요한 것을 시사한다.

진보가 아닌 보수 정치인들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국민의힘 정치인인 이준석은 재보궐 선거에 대해 "민주당이 2030 남성의 표 결집력을 과소평가하고 여성주의 운동에만 올인했으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겁니다"라고 평했다. 그는 "성평등이라고 이름 붙인 왜곡된 남녀 갈라치기를 중단하지 않으면 민주당에 20대 남성 표가 갈 일은 없다"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들이 많았는지 수많은 언론에서 '역차별' 때문에 민주당이 선거에 졌다는 분석을 늘어놓기도 했다.

민주당 정치인들도 관련 여론을 의식했는지 20대 남성을 갑작스럽게 호명하기 시작했다. 전용기 의원은 "20대 남성들의 희생에 대한 국민들의 열망에 답하는 것이 국회의원으로서 의무라고 생각합니다"라 언급하며 이미 오래전 성차별적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사라진 군가산점 재도입을 주장했다.
 

kbs1 개표방송 화면 캡쳐 ⓒ kbs1

 
국민의힘에 대한 20대 남성 지지율의 증가가 '젠더'라는 이슈 때문이라고 간단히 요약될 수 있을까? '젠더' 이슈 때문에 20대 남성이 국민의힘을 지지하게 되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오히려 부동산에 대한 문제나 불공정에 대한 문제가 더 큰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특히 선거 직전에 터진 'LH사건'은 20대 남성뿐만이 아닌 전 세대의 지지율을 바꿀 만한 큰 사건이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 어떠한 정치인들은 '젠더' 이슈를 선거의 축으로 가져가고자 노력했다. 야당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 성폭력 사건에 대한 심판을 외쳤고, 여당은 '최초의 여성시장'이라는 슬로건을 언론 인터뷰에서 내밀었다. 정반대의 시도도 있었다. 오세훈 후보는 선거가 끝날 때까지 젠더에 대한 공약을 묻는 질문에 답하지 않았고, 그의 옆에서 선거운동을 했던 이준석은 선거 내내 페미니즘에 대한 적대를 표현했다.


박영선 후보도 다르지 않았다. 박원순 성폭력 사건이라는 큰 리스크를 쥐고 선거에 출마한 박 후보는 피해 사실을 타인에게 유포하여 피해자에게 고통을 주거나 부적절한 호칭으로 피해자를 명명하여 상처를 주었던 정치인들에게 선거 캠프에서 주요 역할을 부여했다. 이 모든 광경은 정치인들이 페미니즘을 자신에게 유리할 때만 사용하는 액세서리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닐지 의구심을 들게 만들었다.

결국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 내내 여당과 제1야당의 중심 의제가 된 것은 '청년'도, '여성'도 아니었다. 여성 청년의 입장에서 말하자면, 청년과 여성이라는 구호는 이용되었을 뿐이다. 단일화에 대한 온갖 논쟁이 끝난 이후 양당 후보들은 정권 심판과 정권 수호에 대한 메시지가 대부분이었다. 민주당의 경우 청년을 위한 정책이라 불렸던 데이터 5기가에 대한 내용과 10만 원 지급에 대한 내용은 다소 궁색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20대 남성 대부분은 오세훈 후보에게 투표했다. 민주당의 청년 정책에 메리트가 전혀 없었고, 과도한 네거티브 전략이 오히려 반감을 샀다. 그러나 20대 여성 15%는 1번과 2번이라는 선택지 외에 다른 후보들을 지지했다. 'n번방' 사건을 기억하는 세대, 리얼돌 반대 시위에 직접 참여하는 세대, 페미니스트로 자신을 정체화하는 것에 거리낌 없는 세대. 20대 여성에게는 정권 수호냐 정권 심판이냐가 모두 답이 될 수 없었다.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정권 심판이나 수호보다는 오히려 '미프진 도입', '무상 생리대', '디지털 성폭력 강력 대응', '성별 임금 격차 해소'일지도 몰랐다.

1번과 2번 후보에 가려져서 많이 조명되지는 못했지만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는 분명 가장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출마한 선거이기도 했다. 여성과 퀴어, 성폭력 반대와 새로운 보편을 만들기 위한 시도가 가장 많이 진행된 선거였다. 18세, 19세, 20대 여성 15%라는 회색지대는 정권 심판과 정권 수호라는 구도, 혹은 양당제 구조의 한계를 보여주는 수치이기도 했지만 페미니즘 정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수치이기도 했다.

'이대녀'들의 회색 지대, 새로운 가능성을 본다
 

기호 6번 신지혜 후보 선거운동 마지막날. ⓒ 기본소득당

 
나는 이번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서 기본소득당 기호 6번 신지혜 후보의 선거운동을 했다. 신지혜 후보의 선거운동원들은 대부분 20대 청년이었고, 여성 비율이 훨씬 높았다. 페미니즘과 기본소득을 동시에 주장하는 후보였기 때문에 주변의 관심도도 높았다. 피켓을 들고 지하철역에서 선거운동을 할 때면 젊은 여성들이 다가와 지지한다는 인사를 하고 갔다. 유세차 발언을 끝까지 듣고 가는 젊은 여성들도 많았다. 다양한 세대와 다양한 성별의 지지를 마주하기는 했지만, 월등히 젊은 여성들이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그들 중 일부는 '회색 지대'가 되어 신지혜 후보를 지지했을 것이다.

20대 남성의 지지율과 관련된 분석이 난무하는 지금, 과연 20대 여성의 자리는 어디에 있을지를 고민한다. 거리에서 만난 수많은 여성들은 진보 진영에서도, 보수 진영에서도 분석되지 못했다. 청년의 이미지가 오로지 20대 남성으로 고착화되다보니 20대 여성이 겪는 특징적인 억압은 이야기되지 못했다. 동시에 20대 남성의 국민의힘 지지를 오로지 젠더 문제로만 환원하는 분석들은 어떠한 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그것은 쉬운 분석이지만 옳은 분석은 아니다.

오히려 왜 청년들이 공정함이라는 담론에 반응하게 되었는지를 고민하는 것이 필요하다. 복지에 대한 반감과 능력주의에 대한 환상이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 선거 이후 많은 정치세력들이 해야 하는 것은 20대 남성의 억울함에 조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 억울함의 기저에 깔린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이다. 반페미니즘이 아니라 시대의 상식이 될 페미니즘 정치를 열심히 고민하는 것도 동반되어야 한다.

선거가 끝난 지금 20대 여성 표는 버리고 가는 표로 분류된 것이 아닌지 우려스러운 마음이 든다. 이미 오래 전부터 20대 여성들은 "국가가 나를 버렸다"라는 감각을 토해내고 있었다. 15%라는 회색 지대는 그 감각을 고민하지 않은 결과로서 나타난 일이다. 그래서 놀랍지만, 동시에 놀랍지 않다. 예견된 사실이었다.

이대로라면 아마 회색 지대는 더욱 더 늘어날 것이다. 정치에 도전하는 여성들도 더욱 많아질 것이다. 반페미니즘을 기성 정치가 외치고, 페미니즘을 새롭게 등장한 이들이 외치는 현상이 지속된다면 그럴 것이다. 낡아버린 정치 세력들이 아니라 새로운 진영이 새로운 색으로 나타나기를 바란다. 회색 지대가 마침내 대안적인 정치 세력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재보궐선거 #이대남 #이대녀 #기본소득당 #오세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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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여성 정치에 관한 책 <판을 까는 여자들>과 <집이 아니라 방에 삽니다>를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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