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당장, 모두를 위한 '성중립 화장실'을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TDOR)을 기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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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윤(hawk0725)등록 2018.11.20 08:16
지난 11월 17일, 녹사평역 3번출구 앞 이태원 광장에서 '트랜스해방전선'이 주최한 '트랜스젠더 추모 문화제'와 'TDOR(Transgender Day of Remebrance)March'가 열렸다.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은 미국에서 1998년 11월 28일에 살해당한 아프리카계 MTF(Male to Female)트랜스젠더 리타 헤스터를 추모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이후 11월 20일은 트랜스젠더 혐오로 인해 살해당하거나 삶의 끝으로 내몰린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을 애도하기 위한 국제적인 기념일로 지정되었다. 한국에서는 '트랜스해방전선'이외에도 '트랜스젠더 인권단체 조각보'가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 촛불문화제와 촛불문화제 사전행사를 통해 지속적인 추모와 연대를 이어오고 있다.
 
17일 행사를 주최한 '트랜스해방전선'은 페이스북 페이지를 통해 행사준비 기간 동안 연대서명을 받은 결과, 150여명의 개인과 144개의 단체 서명이 모였다고 알린 바 있다. 만들어진지 아직 1년이 되지 않은 인권단체가 처음으로 기획했던 추모문화제였음에도 불구하고 지지를 표명하는 개인 및 단체가 이렇게나 많이 모였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이다. 뿐만 아니라, 행사 당일의 추위와 바람을 뚫고 광장을 빼곡히 메운 사람들의 발걸음과 형형색색 깃발들의 모습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얼어붙은 몸을 녹이는 느낌이었다.
 

2018년 11월 17일 이태원광장에서 진행된 트랜스젠더추모의날 문화제 ⓒ 이소윤

 

성중립 화장실은 남녀공용화장실이 아닙니다

오후 5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추모문화제는 당사자-운영위원의 발언, 그리고 연대사와 공연이 번갈아가며 진행되었다. 중간중간에는 "그만 죽여라, 우리도 살고 싶다"는 구호를 다같이 선창하기도 했다. 이 날 추모문화제 발언과 연대사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했던 화두는 '성중립 화장실'의 필요성이었다. 트랜지션 과정 중에 있는 트랜스젠더 혹은 비수술트랜스젠더의 경우, 성별이분법에 따라 '여자/남자'로 분리되어있는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엄청난 긴장과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일이다. 화장실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같은 공간에 있는 이용자들의 젠더를 의심하는 시선('쟤 진짜 여자(혹은 남자)맞아?')을 견뎌야함은물론, 때로는 그러한 의심이 물리적인 폭력의 형태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녹색당 신지예 공동운영위원장은 연대사를 통해 2018년 지방선거 서울시장 후보 시절 '성중립 화장실 설치' 공약을 내세웠던 이유를 언급하며 트랜스젠더는 기존의 성역할고정관념을 공고히하는 존재가 아니라, 존재 하나만으로 가부장제를 흔들고 있는 이들이기에 (성중립화장실에 대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공약을 끝까지 바꾸지 않았던 것이라 밝혔다. 한국다양성연구소 김지학 소장 역시 연대사를 통해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은 외출 중 화장실 이용에 매우 큰 제약을 받고 있기에 물도 제대로 마시지 못하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는 "차별금지법이 생기면 트랜스젠더들이 여자 화장실과 목욕탕에 들어와서 범죄를 저지를 것"이라는 혐오표현에 대해 "트랜스젠더의 삶에 대한 철저한 무지와 무관심에서 나오는 발언"이라 분석했다.
 
'성중립 화장실이 만들어지면 여성을 대상으로 한 범죄가 증가할 것'이라는, 근거없는 공포정치는 어떻게 가능했던 걸까? 어째서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를 '위험한 범죄자'로, 성중립 화장실을 '성범죄의 원인'으로 프레이밍하고 있는 걸까? 나는 이와 같은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가 '성중립 화장실'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상상력이 사회적으로 너무나 부족하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성중립 화장실은 기존의 남녀공용화장실이 아니며, 이제까지의 남녀공용화장실도 사실은 남자화장실이나 다름없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남녀공용화장실은 기본적으로 남자화장실을 디폴트값으로 설정하고 그 공간을 여성도 같이 사용하도록 강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여자화장실을 따로 설치하면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남성용소변기와 남성용대변기 중 남성용대변기를 여성도 함께 사용하도록 한 것이다. 따라서, 남녀공용화장실은 남녀공용공간이라기보단 남성중심적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2016년에 보도된 한 기사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법률에 의해 공중화장실은 남녀화장실을 분리해야함에도 불구하고 건물주는 비용을 근거로 공용화장실을 고집하고 있었다.
 
"2004년부터 시행된 공중화장실 등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공공기관의 공중화장실은 남녀 화장실을 분리해야 한다. 민간도 업무시설 3000㎡, 상가시설 2000㎡ 이상인 경우 화장실을 남녀로 분리해 설치해야 한다. 그 이전에 지어진 건물은 해당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상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있다. 건물주는 남녀 공용화장실을 분리하려면 돈이 만만치 않게 든다는 이유로 손을 놓고 있다.('규제 허술' 남녀 공용화장실 범죄 사각지대 2004년 전 건물 법 미적용 PC방 등 실태 파악도 안돼…분리 유도·안전 대책 필요)" http://m.idomin.com/?mod=news&act=articleView&idxno=508806&sc_code=&page=6&total=230#06wC
 
그리고 바로 이 점에서 남녀공용화장실과 성중립화장실의 근본적인 차이가 명확해진다. 성중립화장실은 (남녀공용화장실과 달리) 목적 자체가 '분리'에 있다. 다만, 그 분리의 기준이 성별이분법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의 젠더와 무관하게 누구나 가장 안전하고 독립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1인용 개인 화장실'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을 뿐이다. 사실, '강남역 살인사건'이 발생한 이후 서울시가 제일 먼저 시행한 정책이 서울시의 남녀공용화장실을 남자화장실/여자화장실로 분리하는 것이었다. 서울시가 처음부터 법을 존중했더라면 원래 오래전부터 시행했어야 하는 정책이었다.
 

구글 이미지 검색결과: 모두를 위한 화장실(All Gender Restroom) ⓒ 이소윤

 

성별이분법에 따른 공간분리는 정말로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가(지켜준 적이 있는가)?

그러나 강남역 사건 이후, 나에게는 여전히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남아있다. 첫 번째로 "만약에 다음에는 화장실이 아닌 다른 공공장소, 예컨대 지하철 한복판에서 이런 사건이 발생한다면, 그때는 서울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때는 지하철 칸을 분리할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그리고 얼마 전 이수역에서 발생한 남성에 의한 여성 대상 폭력사건은 남성중심적인 문화가 강력한 공간이라면 어디서든지 여성을 비롯한 사회적 소수자들이 폭력에 쉽게 노출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수역 사건의 피해자가 '여자답지 않은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는 이유로 폭력에 노출되었다는 사실은, 트랜스젠더 당사자들이 화장실에 들어설 때마다 자신의 젠더를 의심받으면서 물리적인 폭행과 위협의 대상이 되는 맥락과 긴밀하게 맞닿아있다. 이수역 사건과 관련한 청와대 청원은 벌써 20만명을 훌쩍 넘었다. 이제 정부와 서울시가 답해야 할 차례다. (공간분리 이외에) 공공장소에서 끊이지 않는 젠더폭력을 해결하는 방법에 대해 공권력을 비롯한 행정시스템이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에 대한 답변 말이다.
 
두 번째는 "과연 성별이분법에 따른 공간분리가 여성들을 제대로 지켜준 적이 있는가?"라는 질문이다. 강남역 사건이 남녀공용화장실에서 발생한 범죄였다면,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불법촬영' 사건들은 대부분 여자화장실 안에서 발생한 범죄였다. 즉, 남녀공용화장실(이라고 써 붙이긴 했으나 사실상 남자화장실인 공간)에서 여성이 안전하지 못하니 남녀화장실을 구분해야한다는 움직임에 따라 여자화장실을 따로 설치했으나, 그렇게 분리한 공간에서조차 여성들은 제대로 안전을 보장받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이 비로소 수면위로 드러난 것이다. 이쯤 되니 한국사회의 공적 시스템과 사회제도의 무력함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나는 이런 무력함을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바로 성중립 화장실의 설치라고 생각한다.
 
앞서 밝혔듯이, 성중립화장실은 분리 자체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성별이분법에 따른 분리를 거부하는 개념이다. 만일 그동안 성별이분법에 따른 화장실 분리가 시스젠더 여성에게도, 트랜스젠더 여성에게도 제대로 안전을 보장해준 적이 없다면, 그러한 분리 기준을 더욱 엄격하게 높일 것이 아니라 다른 기준을 도입해 보는 것을 상상해보자는 것이다. 성중립 화장실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성중립화장실로 인해 화장실 몰카범죄가 더욱 증가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전혀 반대로 생각한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화장실 몰카를 설치하고 돌려보는 남성들의 심리가 "나는 절대로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없다"는 아주 강력한 확신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성중립 화장실의 경우, 화장실을 사용하는 사람의 젠더가 고정적이지 않으며 완전한 랜덤이라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화장실을 방금 막 이용한 사람과 앞으로 이용할 사람의 젠더가 어떤 젠더일지 아무도 예측할 수가 없기에 오히려 '나는 절대로 찍힐 가능성이 없다'거나 '우리(남자)화장실에는 몰카가 존재할리가 없다'는 확신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래의 사진은 2016년 Alamo Drafthouse Cinema에서 공개한 성중립화장실(gender-neutral bathroom)의 설계도다. 11개의 독립된 공간 안에 좌변기 시설이 있고, 화장대와 남성용 소변기를 이용할 수 있는 공간이 별도로 마련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휠체어 장애인 혹은 유아를 동반한 이용자들을 위한 칸도 설치되어 있다. 성중립화장실은 젠더퀴어뿐만 아니라 서로 다른 젠더에 해당하는 장애인 당사자와 활동보조인을 위한 공간이기도 하다. 사회적 소수자들을 위한 화장실을 기존의 남자화장실/여자화장실로부터 '격리'해서 '예외적인', '제3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함께 어울려서 이용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 전환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구글 이미지 검색 결과: all gender restroom(출처: https://www.austinchronicle.com/news/2016-11-18/local-businesses-warn-lege-on-anti-lgbtq-laws/) ⓒ 이소윤

     
이수역 사건이 공론화되었을 때 정말 발 빠르게 피해자에게 연대를 표명하고, 피해자를 지지하는 대자보를 게시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과 성소수자에 대한 폭력이 다르지 않음을 이야기한 단체 중 하나가 트랜스젠더인권단체(트랜스해방전선)였다. 그런데 내가 그걸 알고도 침묵한다면, 트랜스젠더 추모의 날을 앞두고 성중립 화장실을 둘러싼 오해와 편견에 대해 침묵한다면, 너무 염치없는 페미니스트가 될 것만 같았다.
 
마지막으로,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를 덧붙이고 싶다.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 돌아올 수 없는 사람들을 떠올릴 때마다 자주 듣는 노래다. '수없이 잃었던 / 춥고 모진 날 사이로 / 조용히 잊혀진 네 이름을 알아 / 멈추지 않을게 / 몇 번이라도 외칠게 / 믿을 수 없도록 멀어도 / 가자 이 새벽이 끝나는 곳으로(아이유, 이름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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