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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금 빼돌려 대선자금으로"... 촘촘히 '부패 그물' 짠 박정희
[단독] <프레이저 보고서>에 담긴 서산개척단의 이면... 정치자금 착복 도구로 활용
2018년1월18일 (목) 이주연 기자
박정희 정권에서 자행된 비극, 서산개척단. 그 이면에 '정치자금' 착복이 자리잡고 있었다. 미국의 원조사업 PL(미 공법, Public Law)-480에 따라 한국은 막대한 원조금을 받았고, 박정희 정권과 부역자들은 이를 빼돌려 정치자금으로 유용했다는 정황이 <프레이저 보고서>를 통해 드러났다.

<프레이저 보고서>는 미 하원 국제관계위원회가 국제기구소위원회(위원장 프레이저)를 통해 작성한 공식 문건으로 1978년 10월 미 의회에 공식 제출됐다. 보고서는 박정희 정권에 대해 미합중국이 내놓은 가장 권위있는 평가서로 알려져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에 PL-480 및 이와 연관된 박정희의 정치자금 내용이 담겨있음을 발굴한 것은 서산개척단 사건을 5년간 좇던 이조훈 다큐멘터리 감독이다. 이 감독은 "서산개척단원들은 박정희의 정권연장 플랜에 희생된 셈"이라고 비판했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기만적으로 부패한 1967년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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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시대에 대한 완벽한 평가서로 평가받는 <프레이저 보고서> ⓒ 이주연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1955년부터 1976년까지 PL-480을 통해 한국에 지급된 원조 규모가 나타나 있다. 서산개척단 등 간척사업에 대한 지원은 PL-480 Ⅱ에 따라 이뤄졌다. 이는
1964년 충청남도가 작성한 'PL480-Ⅱ 양곡에 의한 자조근로사업 실시현황' 등의 문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프레이저 보고서>에 따르면 PL-480 Ⅱ에는 총 3300만 달러가 지원됐다. 당시 환율로 보면 90억 원, 현재 시가로 환산하면 3600억 원이다. 막대한 규모의 자금이 지원됐으나 이는 한국 농업 발전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1960년대 PL-480 프로그램으로 한국경제 발전에 기여했지만, 농업분야는 성장하지 못했다. 한국정부가 농업분야로 재원들을 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략) PL-480 프로그램은 쉽게 남용으로 이어졌다." (프레이저 보고서 339p)

<프레이저 보고서>는 PL-480 관련 자금 착복 과정의 핵심 인물로 로비스트 박동선을 꼽고 있다. 그는 1960년대부터 PL-480 미곡 거래를 위한 판매 대리인으로 일했다. 박동선은 1978년 상원 윤리위원회 청문회에 출석해 "정부 안 개인들의 도움을 받으려는 사람은 정당과 수수료를 나눠야 하는 것이 관행이었다"고 진술했다. 

<프레이저 보고서>는 "한국 중앙정보부 또한 박동선의 미곡 중개 활동의 수혜자였다. 미 대사관은 한국중정부장 김형욱이 미곡 수수료로 받은 돈의 대부분인 50만 달러를 가져갔다고 보고 받았다"고 밝혔다.

즉, PL-480에 따른 미곡 거래에서 발생한 돈이 박동선을 거쳐 김형욱 중앙정보부장 등 박정희 정권의 실세에게 흘러들어간 것이다. 그 끝은 박정희를 향해있다.

"해외거래 재원들로부터 자금을 세탁하는 시스템은 1967년 대통령 선거에서 최대한 사용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1966년 김성곤은 민주공화당 재정위원회 위원장에 지명됐다. 미 정부와 박동선에 따르면, 그는 정치자금을 접수하는 주요 채널이었다고 한다. 1967년 대통령 선거는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기만적으로 부패한 선거라는 오명을 받았다." (프레이저 보고서 367p)

"부패 그물 촘촘히 친 박정희"... 정권연장 플랜에 의해 희생된 개척단원들

워싱턴 특파원으로 백악관을 출입했던 문명자 기자는 책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을 통해 당시 상황을 상세히 고발했다.

"1963년 12월 대통령에 당선된 박정희는 자신 주위에 부패의 그물을 더욱 촘촘히 둘러쳤다. 공화당 재정위원장 김성곤은 수표로 지불되는 정치자금을 접수하고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김성곤으로부터 그 수표들을 건네받아 현금화하는 동시에 현금으로 지불되는 정치자금을 접수했다. 박 정권의 이와 같은 정치자금 비밀 조달 체계는 67년 대선에서 그 위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5대 대통령 박정희가 6대 대통령으로 당선된 1967년 선거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부패한 선거"가 된 이유다. 이 같은 부패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1969년부터 1975년까지 박동선은 해외사업 재원들에서 얻은 미곡거래 수수료로 900만 달러 이상을 발생시켰다. 이 자금들 중에 박은 한국(박동선이 자금을 지불한 것으로 알려진 한국 관리들은 김형욱 등이 있다)에 기부, 현금 선물로 접근했다." (프레이저 보고서, 37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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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조훈 영화감독은 “61년부터 67년까지 그들이 6~7년 간 당한 고통이 개척단으로 끝나고도 끝나지 않았다”며 “국가는 계속 도둑질 하고 있고 그들은 계속 농락 당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 유성호

<서산개척단>(가제) 영화 개봉을 준비하고 있는 이 감독은 "박정희는 군사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고, 젊은이들을 불순세력이나 부랑아로 몰아 전국의 간척사업장 등에 강제수용한 뒤 강제노역을 시켰다"라며 "이것을 1955년부터 있었던 PL-480 지원사업과 연계해 미국으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빼돌렸으며, 대통령 선거에 정치자금으로 활용해 정권을 안정화시키는 큰 그림을 그려 작업한 것으로 파악된다"라고 밝혔다.

이 감독은 "서산개척단에 납치돼 강제노역과 강제 결혼, 심지어 구타에 의한 살해까지 당한 젊은이들은 결국 박정희의 정권연장 플랜에 희생된 셈"이라고 꼬집었다. 

박정희 정권이 PL-480 등을 통해 호의호식하는 동안 서산개척단 단원들은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단원들의 생활 상태는 걸인 이상이며 뼈다귀만 남았습니다. 심지어 소금국만 먹은 것이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철저한 조사를 해주시면 정부를 받들어 올바른 인간이 되겠습니다. 눈물로서 호소하는 바입니다."(1966년 개척단원들의 탄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띄운 탄원서에 답이 없었던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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