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보경

배우 김보경 ⓒ 연합뉴스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그만해라, 많이 먹었다)"는 희대의 명대사를 탄생시킨 영화 <친구>는 거친 부산 사나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만 흔히 기억된다. 하지만 여기서 특별한 존재감을 드러낸 여성이 있었다. 

주인공 상택(서태화)의 첫 사랑이자 훗날 준석(유오성)의 아내가 되는 진숙 캐릭터다. 영화 초반부 걸밴드 레인보우의 메인보컬로 첫 등장부터 범상치 않은 패션에 신비감 넘치는 아우라를 풍기며 무대 중앙으로 걸어나오는 진숙의 모습은 단숨에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진숙의 등장은 바로 고 김보경(1976-2021)이라는 배우가 세상에 처음 이름을 알리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녀가 수줍은 듯 시크하게 샤프의 '연극이 끝나고 난 뒤'를 열창하는 공연 장면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영화 팬들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노란 셔츠에 빨간 화가 모자, 얼굴을 반쯤 덮은 단발머리까지 그 시절의 멋부림이나 립싱크가 촌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온전히 김보경이라는 배우가 뿜어내는 특유의 우아한 분위기 덕분일 수 있다. 

인상적이었던 첫 등장 이후 정작 그 뒤로 이어지는 <친구> 속 진숙의 삶은 그리 행복하지 못했다. 자신을 짝사랑했던 상택과는 이어지지 못했고, 조폭이자 마약중독자였던 준석과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영화에서 진숙이 등장하는 분량은 그리 많지 않았다. 

하지만 처연한 표정과 분위기만으로 진숙의 고단했던 삶과 감정을 표현해낸 김보경의 연기는 <친구>에서 오히려 더 독특한 존재감을 뿜어낸다. 영화를 보고 나온 관객들 중 짧은 출연 분량에도 진숙의 캐릭터가 기억에 남았다는 이들이 많았다. 

<친구>를 연출했던 곽경택 감독은 김보경을 진숙 역할에 캐스팅한 이유를 두고 "그 시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세대(7080)가 좋아할 만한 이미지의 여배우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고전적인 이미지와 마스크를 지닌 김보경은 극 초반부 옛날 교복을 입고 찰진 부산 사투리를 구사하는 여고생의 모습에서, 후반부 세상의 평지풍파를 겪고 달관한듯 처연한 분위기를 풍기는 비련의 중년 여인까지 소화하는 데 아무런 위화감이 없다. 당시 김보경은 아주 어리지도 성숙하지도 않은 20대 중반의 나이였다. 

2007년 <하얀거탑>의 강희재 역할은 김보경의 또다른 대표작으로 꼽힌다. 강희재는 작중 주요 배경인 명인대학교 병원 부근에서 와인바를 경영하는 여사장이자 주인공 장준혁의 숨겨진 내연녀이기도 하다. 한국판에서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일본판 원작에서는 의대를 중퇴한 경력이 있는 엘리트 여성이라는 설정도 있었다. 

극 중에서 강희재는 그리 단순한 인물이 아니다. 강희재는 장준혁의 정적을 염탐하여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는 '스파이'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 작중에서 유일하게 장준혁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순수하게 헌신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장준혁의 야망을 위해 그의 뜻에 순종하면서도, 가끔은 장준혁 본인도 깨닫지 못하는 속내를 꼬집거나 할말은 하는 인물로 묘사된다. 장준혁에게 강희재란 이용가치로서의 파트너를 넘어, 진정으로 마음을 터놓을수있는 친구이자 동지라고까지 할 수 있는 존재였다고 볼 수 있다. 

담관암으로 죽음을 앞둔 장준혁과 강희재의 마지막 통화는 <하얀 거탑>의 숨겨진 또다른 명장면이다. 마지막임을 직감하고 그렁그렁한 눈물을 억지로 참으면서도 강희재는 애써 밝은 목소리로 통화를 이어간다. 끝까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는데 서툰 장준혁을 대신하여 먼저 "당신, 오래도록 기억해줄게"라는 작별인사를 남기는 강희재의 마지막 대사는, 그 담담한 어투속에 담겨진 진심과 슬픔이 어떤 절절한 사랑 고백보다도 가슴을 울린다. 

장준혁과의 통화를 마친 강희재는 더 이상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홀로 오열한다.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임종을 가까이서 지켜보지도 못하고 끝까지 먼 발치에 작별을 고하며 슬픔을 애써 숨겨야했던 강희재의 복잡한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낸 장면이다. 감정을 강하게 토해내기보다 오히려 안으로 삼키는 김보경의 차분하고 절제된 연기력이 오히려 연민을 배가시킨다. 웰메이드 드라마로 호평받았던 <하얀 거탑>과 강희재 역할은 훗날 인터뷰에서도 김보경이 가장 애착을 가졌던 작품으로 꼽히기도 했다. 

한국 공포 영화의 숨은 걸작으로 꼽히는 <기담>에서는 '그림자 없는 여인' 역할을 맡아 호러 연기에 도전하기도 했다. 여기서 김보경은 일제 강점기인 1942년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고 당시 경성 최고의 서양식 병원 '안생병원'으로 돌아온 미스터리한 여의사 김인영 역할을 맡았다. 

역대 한국 공포영화 중 미장센이 가장 아름다운 작품으로 꼽히는 <기담>은 자극적인 공포감을 강조하기보다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과 가장 가슴아픈 비극의 교차를 통하여 감정의 극적 대비를 불러일으키는 옴니버스 유형의 작품이다. 김보경이 연기하는 인영은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연으로 등장하여 냉철하고 차분한 엘리트 신여성 이미지 뒤로 슬픔과 광기에 물들어 미쳐가는 반전을 감춘 캐릭터였다. 

인영은 자신을 살리기 위하여 대신 죽어간 남편 김동원(김태우)과의 갑작스러운 이별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스스로의 인격 속에 남편을 되살려서 일본군에게 복수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라는 현실을 강제로 받아들여야한다는 공포와,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이 한 여인을 괴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모든 진실을 깨닫고 난후 인영이 이야기 초반부 학교 강의 장면에서 학생들에게 했던 대사가 다시 겹쳐진다. "하지만 영혼의 존재는 믿고 싶어요. 우리에게 영혼이 없다고 생각하면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요." 

아이러니하게도 끝내 남편이 없는 세상에 홀로 남겨진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던 인영이 삶을 포기하며 남긴 마지막 대사는 "쓸쓸하구나"였다. 194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 배경에 어울리게 여기서도 김보경 특유의 고전적이면서도 고혹적인 분위기가 빛을 발한다. 바닷가, 거실, 벤치 등에서 남편 동원과 둘만의 아름다웠던 추억들을 회상하며 남편의 모습이 유령처럼 사라질 때마다 연이어 쓸쓸하게 홀로 남겨지는 인영의 모습은 아련한 슬픔과 여운을 남겼던 명장면이다. 

이처럼 안정된 연기력과 독특한 분위기로 자신만의 개성을 구축했던 김보경이지만, 아쉽게도 연기에 바친 열정에 비하여 정작 그녀에게 허락된 시간은 짧았다. <아유 레디> <청풍명월> <학교4> <스포트라이트> <어린 신부> <파주> <북촌방향> <은하해방전선> 등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으나 <친구>와 <하얀거탑> 외에는 대중적으로 크게 알려지거나 성공한 작품이 적었다. 커리어 내내 공백기도 잦고 길었던 편이었다. 

김보경은 2013년 MBC 아침드라마 <사랑했나봐> 종영 이후로는 별다른 연기활동 소식이 없었다. 돌연 8년 만에 비보가 전해지며 그녀가 이미 연기활동을 하던 때부터 투병을 이어왔다는 것도 뒤늦게 알려져 팬들의 안타까움을 더했다. 진숙에게 '연극이 끝나고 난뒤'를 부르던 첫 등장 신이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빛났던 시절이었던 것처럼, 김보경에게도 데뷔작이었던 <친구>가 그녀 인생의 대표작으로 남았다는 것은 묘한 여운을 남긴다. <하얀거탑>에서 강희재가 사랑했던 장준혁처럼, 김보경 역시 배우로서 한창 빛나야할 40대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됐다 

김보경은 과거 인터뷰에서 <친구> 이후 한때 커리어에 침체기를 겪으며 슬럼프로 힘들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연기에 대한 변함없는 열정을 드러냈다. 

"배우는 선택받을 수밖에 없는 직업이다. <친구>로 잠시 주목받고나서 한동안 하루종일 일이 들어오기만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시기가 가장 괴로웠다. 그럴 때는 화가 나기도 했고, 다른 일을 해야하나 고민한 적도 있었다. 

<하얀 거탑>부터는 이제는 연기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스타가 되고싶다는 욕심은 더이상 없다. 연기를 하면서 한이 아니고 끼도 아니지만, 뭔가 내 안의 응어리가 풀어지다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때가 행복하다."  


사람은 떠날 때 이름은 남기고, 배우는 떠날 때 작품을 남긴다. 비록 김보경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앞으로도 그녀의 이름으로 영원히 기억에 남을 작품과 캐릭터들을 남겼다는 점에서 그녀의 연기인생은 충분히 박수받을 가치가 있다. 이쯤에서 다시 한번 곱씹게어보게되는 <하얀거탑> 희재의 마지막 대사는 마치 그녀와 팬들 사이의 작별인사이자 약속처럼 들린다. "당신, 오래도록 기억해줄게."
김보경 하얀거탑 친구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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