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박영길 씨와의 차 한 잔>

영화 <박영길 씨와의 차 한 잔> ⓒ 인디그라운드


01.
<박영길 씨와의 차 한 잔>
한국 / 2022 / 15분 47초
감독 : 유우일
출연 : 이양희, 임인정

흑백영화가 주는 특유의 감성, 영화사 초창기에서나 볼법했을 어색하고 간지러운 연기, 올드하고 둔탁한 컷 전환과 배우들의 문어체 화법까지. 이 영화 <박영길 씨와의 차 한 잔>의 이질적인 면모를 이야기하자면 그것만으로도 한참을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구성이나 형식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다. 손을 잡는 것마저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는 부부의 모습이나 대화를 구성하고 있는 요청과 수용의 일방적인 구조 역시 지금의 다른 영화들이 갖고 있는 모습과는 완전히 다르다.

의도적으로 다른 형식을 빌려왔다면 그 목적은 명확할 필요가 있다. 영화가 상당 부분 감독의 뜻에 따라 모습을 갖추게 되는 것도 사실이지만, 조금 더 나아간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관객과의 경계에서도 제 역할을 해야만 한다. 영화 <박영길 씨와의 차 한 잔>은 소나기를 피하기 위해 다방을 찾은 영길(이양희 분)과 정희(임인정 분) 부부의 대화로만 구성된다. 처음 화면이 비추는 공간 역시 두 잔의 커피가 놓인 테이블 하나, 한 평 남짓한 작은 공간뿐이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 이야기했던 독특한 장치들과 두 인물, 이 좁은 공간 하나가 영화의 전부와도 같다. 다만 이 작고 유난한 세계는 자신이 향하고자 했던 자리를 향해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정확히 걷는다.

두 사람의 대화는 제법 화목하다. 서로를 걱정하는 마음이 말투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 역시 그 말투를 닮아 있다. 이제 곧 은퇴를 앞둔 남편의 지난 시간과 노고에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자 하는 아내의 모습은 조금 더 그렇다. 한 해에도 50번이 넘게 배를 타고 일본을 오고 가며 가정을 위해 노력했음을 누구보다 더 잘 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따뜻할 것 같던 부부의 대화는 조금씩 어긋나기 시작한다.

오래 그렇다고 믿어왔던 상대에 대한 정보와 믿음은 단숨에 아닌 것이 되어버리고, 서로가 이해하지 못할 우리가 아닌 자신만의 언어를 뱉기 시작한다.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화면은 의도적으로 갈라놓음으로 각각의 화면 속에 격리시킨다. 그렇지 않아도 좁은 공간은 더욱 협소해진다. 대화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그리고 남자의 나지막한 대사와 함께 그의 시선이 다른 공간을 향하기 시작한다.

"난 속인 적도 없고 숨긴 적도 없어.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 거지."

하나의 테이블과 두 개의 의자로부터 카메라가 시선을 떼는 순간 영화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한다. 영화 속 유이한 인물이었던 두 사람 영길과 정희의 대화가 대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에만 몰두되어 있던 관객들의 집중이 일제히 환기되어 버린다. 강제된 환기를 원하는 감독의 의도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관객은 없다. 앞서 하나하나 설명했던 이 영화만의 독특한 장치, 철저히 계산된 손짓에 모든 감각을 빼앗겨 있었기에 영길의 시선이 머무는 화면, 그 너머에 마련된 장면에 대해서는 예상할 수 없다.

감각에 대한 절대적 의존과 상실, 그로 인한 인간의 한계를 유우일 감독은 화면 속 박영길 씨를 통해 적나라하게 경험하도록 만든다. 처음에 이야기했던 이 영화의 목적이자 다다르고자 했던 자리다. 우리는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경험했으며, 또 어떤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가. 그곳에는 아무런 의미도 놓여 있지 않을지 모르는 일이다.
 
 영화 <알은 척 아는 척> 스틸컷

영화 <알은 척 아는 척> 스틸컷 ⓒ 인디그라운드


02.
<알은 척 아는 척>
한국 / 2022 / 17분 29초
감독 : 이준우
출연 : 임경훈, 하준호, 정우진

어떤 영화는 조각난 여러 장면의 합으로 인물을 설명하거나 상황을 전달하기도 한다. 각각의 장면은 러닝타임 곳곳에 흩어져 있기도 하고 특정 지점에 무리 지어 놓이기도 한다. 반복되는 상황과 사건이 강조의 역할을 해내면서 서브텍스트에 숨겨져 있던 의미를 드러내는 식이다. 이렇게 표식화된 인물과 사건은 후반부에 이르러 자신을 부조리하게 만들었던 이전까지의 여러 동일한 상황 모두를 깨뜨리며 자신을 증명해 낸다. 영화 <알은 척 아는 척>은 이 구조에 정확히 부합하는 하나의 온전한 이야기에 해당된다.

시봉(임경훈 분)은 다른 학교를 다니다가 지금의 학교 영화과로 편입해 왔다. 학과도 전혀 연관이 없었기 때문에 다른 학생들에 비해 이해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상황. 수업 내용이나 판서의 속도를 따라가기는커녕 자신에게 주어지는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조차 제대로 파악하기가 힘들다. 그나마 조금 나은 것이라고는 프랑스에서 공부를 한 탓에 한국어 문법에 약한 교수(하준호 분)의 맞춤법을 지적할 수 있다는 정도다. 영화는 이 밀폐된 공간 내에서 그가 느끼는 묘한 이질감의 장면을 포착하기 시작한다.

"이게 가장 중요한 거거든요. 중간에 있는 거."

장면 하나. 교수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강의실 내 학생들이 키보드 소리를 투닥거리며 받아 적기 시작한다. 적어도 그들을 바라보는 교수의 시선에서는 그렇게 보였다. 곧 이들의 등 뒤에 놓인 카메라로 시점이 옮겨가고 학생들의 노트북 화면에는 게임 화면과 인터넷 검색창, 메신저 등의 수업과는 관계없는 프로그램들이 떠 있는 모습이 담긴다. 청각으로는 수업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지만 시각으로는 전혀 다른 행동을 하는 이들의 민낯이 드러나고 만 것이다.

장면 둘. 오래된 영화에 대한 설명이 끝나고 해당 작품을 본 적 있냐는 교수의 질문에 아무도 손을 들지 않는다. 영화과 학생이라면 꼭 봐야 하는 중요한 작품이라는 이야기에 이번에는 대부분의 학생이 손을 든다. 그중 한 학생에게 어땠냐고 묻는 교수. 마지못해 일어난 학생은 좋았다는 한 마디로 소감을 대신한다. 정말로 영화가 좋았던 걸까? 그 영화를 보기는 한 걸까?

장면 셋. 또 하나의 작품이 학생들에게 제시된다. 특정 사조를 대표하는 유명한 영화라는 소개와 함께 이번에도 학생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며 하나 둘 손을 들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시봉 역시 함께다. 물론 그는 이 영화에 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다. 교수의 눈이 그를 향하고 영화에 대한 소개와 소감을 발표하도록 요청한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시봉은 화장실을 핑계로 강의실을 도망치듯 나온다. 인터넷으로 검색한 영화, 교수 자신은 수 백번은 더 본 듯 으스대던 작품은 필름이 전소되어 확인할 수 없는 상태라고 한다.

세 장면뿐만이 아니다. 영화는 몇 번의 장면, 그 모든 레이어를 한 공간에 수직으로 쌓은 뒤에 발생하는 하나의 작은 균열 속에 시봉을 밀어 넣는다. 그 틈 사이에서 인물은 홀로 정직하고자 했지만, 결국 정직하지 못한 존재로 남는다. 이제 더 이상 영화는 어떤 선택이 옳은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단순한 옳고 그름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의 선택이 무엇에 기대어 현실 위에 교환되는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가만히 있으면 바뀌는 게 하나도 없다. 저는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시봉은 마지막 장면에서 자신이 하지 못했던 행동을 이어나간다. 그 모습은 어느 때보다 격정적이다. 영화는 그를 어느 자리로 옮겨다 놓고 싶었을까? 잘못된 것을 알지만 함께 '아는 척'할 수 있는 무대 위의 자리일까. 아니면 '알은 척' 혼자서라도 꼿꼿한 태도를 잃지 않을 수 있는 무대 아래의 자리일까. 결말은 그를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 위에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설립하고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운영 중인 인디그라운드(Indieground)는 2024년 2월 15일(목)부터 총 18개의 큐레이션을 통해 ‘2023 독립영화 라이브러리’ 선정작 92편(장편 22편, 단편 70편)을 소개/상영할 예정입니다. 첫 번째 큐레이션인 '인생은 편집이다'는 2월 15일부터 2월 29일까지 보름간 인디그라운드 홈페이지를 통해 회원 가입 후 무료로 시청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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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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