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극만이 가진 미덕이 있다. 지난 시대 역사 가운데 한 대목을 끌어올려 오늘의 관객 앞에 보이는 것, 그 만남이 오늘의 세상 안에 새로운 깨달음을 피워내곤 한다. 때로는 나라사랑의 싹틈일 수 있겠고, 때로는 지나간 옛 가치의 재발견일 수 있으며, 또 때로는 오늘의 우리 모습을 낯설게 돌아보는 시야일 수 있는 것들. 동 시대의 이야기로는 좀처럼 꺼내기 어려운 미덕을 사극이 이뤄내고는 한다.
 
그러나 오늘날 사극은 위기를 겪고 있다. 다른 많은 것이 그렇듯, 이윤 문제다. 사극은 그 특성상 어쩔 수 없이 세트와 의상, 소품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이 많다. 분장 등에 필요한 촬영소요 시간은 물론 호흡이 긴 극 전개 상 제작기간 또한 길다. 각종 간접광고가 불가능하다는 점 또한 단점으로 꼽힌다. 요컨대 돈은 많이 들고 뽑아내기는 어렵다는 이야기다. 그나마도 풋풋한 감성을 자극하는 퓨전사극이 자리를 지켜왔으나 최근엔 그마저 줄줄이 실패하며 매 계절에 사극 한 편을 만나기가 어렵게 되었다.
 
<용의 눈물>과 <태조 왕건> <불멸의 이순신>부터 <허준> <대장금> <대조영> <주몽> 등 한국 방송사에 제 존재감을 새겨온 사극이란 장르는 어느새 그 명맥이 끊긴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가 됐다. 과거 사극 전성시대를 열었던 KBS가 50주년 특별기획을 표방하며 제작한 <고려거란전쟁>이 커다란 우려와 관심을 받은 배경이다.
 
고려거란전쟁 포스터

▲ 고려거란전쟁 포스터 ⓒ KBS

 
누가 해도 해야 했을 이야기
 
누가 만들어도 만들었어야 할 이야기라는 게 중론이었다. 귀주대첩 이야기다. 왜 아니겠나. 한국사람치고 귀주대첩을 모르는 이는 없다. 한국의 역사교육은 한반도가 외침에 저항하고 한반도 내 국가와 민족의 정체성을 지킨 사건을 중요하게 가르친다. 이를테면 고구려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고려시대 원나라에 대항한 삼별초의 항쟁,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승리,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 같은 일들 말이다. 그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사건이 바로 귀주대첩인데, 당대 세계사 가운데 두드러진 강국의 대대적 침입을 맞이하여 이를 격퇴한 자랑스런 전투인 때문이다.
 
비록 고려의 역사가 조선에 비해 그 기록이 박약하다고는 하지만, 사극 창작의 측면으로 보자면 이 또한 장점일 수 있다. 창작자는 자유롭게 상상을 펼치고 역사를 바탕으로 당대 사건과 인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풀어낼 수 있는 것이다. 정사나 비사가 모두 풍부한 조선조 역사에 비한다면 고려시대를 다룬 사극은 작가의 창작력을 본격 시험하는 장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고려거란전쟁>은 2023년 말부터 2024년 3월까지, 모두 32부작에 걸친 사극이었다. 100부작쯤은 거뜬히 넘겼던 왕년의 대하사극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른 민족과의 갈등을 다루며 큰 규모의 전쟁을 묘사했다는 점에서 큰 기대를 모았다. 270억 원에 이르는 제작비는 편당 8억 원이 넘는 금액으로 한국 사극 사상 최고치에 해당한다. 그간 한국 사극이 약점을 드러냈던 전투장면, 또 고증의 측면에서 보다 순도 높은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으리란 기대가 인 것도 당연하다.
 
고려거란전쟁 스틸컷

▲ 고려거란전쟁 스틸컷 ⓒ KBS

 
기대감 증폭시킨 독보적 전투묘사
 
주인공은 귀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영웅 강감찬(최수종 분)이다. 유동근과 함께, 또는 그 이상으로 KBS 사극의 얼굴이라 불려온 최수종이 능숙한 솜씨로 또 한 명의 일대 영웅을 연기했다. 과거를 통해 출사하였으나 특유의 강직한 성품으로 번번이 출세길에 오르진 못한 그다. 속에 든 말은 죄다 쏟아야 하고, 정도에서 벗어난 것은 취할 수 없는 성품이 주변에 좌악 소문이 나 있을 정도다. 한직을 전전하면서도 그가 놓지 못하는 것이 그러나 꼭 하나 있다. 바로 거란이다.
 
10세기 초 부족을 통합하고 요동 제일의 군세를 자랑하게 된 거란이다. 거란은 916년 요나라를 건국하고 10년 만에 발해를 멸망시켰으며 호시탐탐 남진할 기회를 노린다. 그로부터 시간이 흘러 979년 송나라가 중원을 통일하고 거란을 견제하기 시작한다. 송과 고려 사이에 낀 처지가 된 거란은 후환을 없애고자 993년 처음으로 고려를 침공한다. 그로부터 고려는 20여 년 동안 모두 세 차례에 걸친 거란의 침공을 격퇴한다.
 
<고려거란전쟁>의 가장 훌륭한 점은 역시 전투다. 그중에서도 시리즈 초반, 즉 993년 첫 침공 이후 이어진 전란을 흥미진진하게 그려낸다. 일찍이 나온 한국 사극 가운데 짝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화려한 CG와 전쟁소품을 적극 활용하고 개봉영화에 비하여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액션으로 시청자들의 눈을 사로잡는다. 특히 성을 공격하는 공성무기들과 고려만의 독자적인 무기들이 보이는 장면은 시리즈 후반을 장식할 귀주대첩을 절로 기대하게 한다.
 
고려거란전쟁 스틸컷

▲ 고려거란전쟁 스틸컷 ⓒ KBS

 
강조, 양규, 강감찬, 현종... 역사 속 인물에게 생명력을
 
특히 시리즈 꼭 절반인 16부까지의 이야기는 악평하는 이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잘 만들어졌다. 1차 침공에선 원치 않게 반역을 일으킨 충신 강조(이원종 분)가 조금씩 역적화되는 모습을, 또 그의 폭압 속에서도 군주로서 성장해나가는 현종(김동준 분)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그려냈다는 평이다.

2차 침공에 대한 묘사 또한 인상적인 대목이 적잖았는데, 이 드라마에서 가장 사랑받은 인물이라 해도 좋을 양규(지승현 분)가 목숨을 내놓고 활약하는 모습을 통하여 영웅이 사라진 시대의 갈증을 일거에 풀어냈다.
 
특히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나라를 위해 저를 던지는 현종과 강조, 강감찬과 양규 등의 모습은 오로지 제 앞의 이익만 살피는 이 시대 수많은 정치가며 공직자들에게 일침을 날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종은 시종일관 왕실이며 제 세력의 안위를 살피는 이들 사이에서 국가와 백성을 생각하는 군왕으로 그려진다.
 
고려거란전쟁 스틸컷

▲ 고려거란전쟁 스틸컷 ⓒ KBS

 
가치소멸 시대... 한국은 이들을 가졌는가

강조는 거듭되는 외침 앞에 어떻게든 나라를 구하려는 맹장으로, 강감찬은 피할 수 없는 전쟁을 내다보고 그를 현명히 극복하기 위해 일신을 내던지는 충신으로 다뤄진다. 또한 양규는 전쟁의 최일선에서 저를 돌보지 않고 백성을 위하는 장수로 그려지는데, 역사 가운데 주목받지 못했던 그에게 모든 시청자가 열광했단 건 한국사회가 어떠한 인물을 필요로 하고 있는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17화 이후 전과 달리 조잡한 전개며 아쉬운 연출이 이어진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천취소'란 오명을 뒤집어 쓴 귀주대첩은 차라리 묘사하지 않느니만 못하였고, 역사적 사실에서 한 발 벗어나 자유롭게 펼친 전개 또한 보는 이에게 특별한 감상을 일으킬 수 없는 수준에 머물렀던 탓이다. 전반부와 달리 시청자에게 언급되는 매력적인 인물이 없다시피 했다는 것, <고려거란전쟁>이란 제목과 달리 인상이 약한 내치의 이야기가 지루하게 이어졌다는 것, 가장 주요한 전쟁을 가장 조잡하게 다루었다는 것은 이 드라마의 패착이라 해도 별로 틀린 이야기는 아닐 테다.
 
그럼에도 이 드라마는 2024년 한국에 곱씹을 만한 질문을 던지고 사라졌다. 그것은 이 시대 한국이 현종을, 강감찬을, 양규를, 하다못해 강조 같은 인물이라도 보유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국가를 위해, 시민을 위해 저 하나 쯤 내던질 수 있는 이들을 가지고 있느냐는 질문이다. 또한 그에 호응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정반대의 질문 또한 던지고 있다. 사회와 이웃을 위하여 나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질문 말이다. 애국과 연민, 책임감과 희생 같은 덕목들을 한국사회는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역사 가운데 흔적 없이 사라진 거란족의 이야기가 결코 멀리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를 일이다.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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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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