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의 헬기가 전일빌딩 앞에서 선회하는 모습. 현재도 광주 금남로에 위치한 전일빌딩에는 헬기사격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탄흔이 남아 있다.
나경택 촬영, 5.18기념재단 제공
광주역 인근에서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되며 시민들의 투쟁 의지는 더욱 불타올랐다. 분노한 시민들은 5월 21일 이른 아침부터 금남로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오전 10시경에는 그 수가 10만여 명에 달할 정도였다. 당시 광주 전체 인구가 72만~73만 명 정도였던 것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시민들은 정오까지 계엄군의 완전한 철수를 요구했으나, 계엄군은 물러서지 않았다. 시민들은 아침 일찍 아세아자동차 공장에서 끌고 나온 장갑차와 차량을 몰아 공수부대를 향해 돌진했다. 그 과정에서 11공수여단 군인 한 명이 장갑차에 치여 사망했다. 이를 기점으로 오후 1시경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가 시작됐다. 그것은 단순 위협 사격이 아닌 조준 사격이었다.
군은 저지선을 설정한 뒤 그 선을 넘는 사람에게 무조건 발포했다. 금남로는 총탄을 피하는 사람과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 뒤엉키며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이날 광주 시내 병원은 총상자로 가득했다. 군의 발표와 1988년 이후 피해자 신고서 내용을 종합해볼 때 이날 최소 54명 이상이 숨지고 500명 이상이 총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광주 봉쇄 그리고 항쟁
5월 21일 윤상원을 포함한 민주화 운동세력의 청년들은 녹두서점에 모여 광주의 현 상황과 향후 투쟁 방향 등을 토의했다. 이들은 조직적 역량의 부족 등 현재 광주의 운동에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해 운동이 더 심화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에 앞으로 행동 방향은 개인의 소신에 맡기기로 했다. 이날 이후 그나마 남아있던 운동권의 많은 이들이 광주를 빠져나갔다.
상원은 광주에 남아 항쟁을 계속하기로 마음먹었다. 상원은 시민들에게 현 광주 실태와 투쟁에 관한 올바른 방향, 행동지침 등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계엄 당국의 언론 통제로 신문과 방송이 제 역할을 못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상원은 들불야학팀을 비롯한 남은 세력과 함께 '투사 회보'라는 민중언론을 발간하기로 했다. 이들은 물자조달조·문안작성조·필경등사조·배포조 등으로 역할을 분담하여 회보 제작에 착수했다. 상원이 초안을 작성하면 나머지 사람들은 등사하여 배포하는 식이었다.
투사 회보는 21일부터 26일까지 총 9호, 매회 1만~2만 장씩 간행됐다. 16절 갱지의 양면에 등사된 투사 회보는 비록 많은 내용이 담겨 있지는 않았지만, 시민들이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소식지였다. 투사 회보에는 피해 상황, 집회 일시, 시민 행동강령 등의 내용이 게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