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12 11:50최종 업데이트 18.04.12 11:50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던 자신의 과거를 들려주는 사람들-국가폭력피해자들이 있다. 그들의 억울함을 듣고 조사하는 과거사 위원회가 사라진 뒤에도 나는 여전히 그들을 만나는 일을 해왔다. 나는 국가폭력피해자를 음식으로 기억한다. 그 이야기를 풀어보려 한다. [편집자말]

김영권과 막걸리 ⓒ 고정미


5호선 종로3가역을 나오는 동안 거리에서는 젊은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 특히나 검은 가방을 어깨에 둘러멘 어른들이 눈에 많이 띄었다. 그들 가방에는 무엇이 들어있을까 궁금했다. 나이든 어른들의 뒤를 따라 천천히 계단을 오르려니 역 출구까지 나오는 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역 밖으로 나오니 한 남자가 다가왔다.

"조사관님?"
"네, 김영권씨 되시나요?"


이렇게 인사를 나눴다.

"어디 가서 차라도 하면서 얘기하죠."

모자를 눌러쓴 그의 어깨에도 좀 전에 역에서 보았던 검은 가방이 걸려 있었다. 그와 함께 들어간 곳은 낙원상가 건너편 2층의 오래된 다방이었다. 그가 쌍화차를 주문했다.

"식사는 했어요?"
"아직 안 했습니다. 선생님 만나 이야기 나누고 먹으려고 했어요."
"그럼, 밥을 먼저 먹으러 갈 걸 그랬네."
"아닙니다. 이야기 좀 나누다가 천천히 가시죠. 어떠세요?"
"예, 그럽시다. 그럼."

전북 고창에서 태어난 그는 농림고를 졸업한 당대의 엘리트였다. 1960년대 고창 인근 지역에서 소나 돼지의 출산이 있는 곳이라면 늘 그가 달려갔다. 그리고 가축의 예방 접종 역시 그가 도맡아 하는 일 중 하나였다. 수고비는 막걸리 한 사발과 두부김치면 족했다.

"그때는 막걸리하고 복분자 무지하게 받아 줬어요. 시골에 돈이 없으니 돈 대신 막걸리를 받아 주는 거죠. 동네에서 막걸리 무지하게 얻어먹고 다녔네요."

그렇게 그는 마을에서 전도유망했던 청년으로 인정받으며 생활하던 중, 1965년경 전북지역의 농촌청년으로 선발되어 일본 선진농법을 연수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전북지역 20여 명의 청년들은 1년여 동안 일본 각지에 있는 농장에 배치되어 선진축산을 경험한다는 취지였다.

"아, 그때만 해도 일본의 축산기술은 우리보다 몇십 년 앞섰다고요. 그래서 연수에 선발되어 일본에 간다고 하니 무지하게 기뻤지요."

북해도 아닌 북한에 도착한 배 

모두가 가난하던 그 시절, 일본의 재일교포들의 환송식을 받고 난 다음 날부터 그들은 전국 각지의 농가로 분산되었다. 그러나 막상 도착한 그곳의 처우는 엉망이었다.

"우리를 연수하러 온 사람으로 대우를 해주는 것이 아니라 일용직 잡부로 부려먹기만 했어요.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고, 사료 주는 것과 축사 청소하는 것만 시킨단 말이에요. 접종이나 출산, 위생, 축사 관리 등에 대한 정보는 하나도 알려주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생각했죠. 여기서 있다가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고 돌아가겠구나."

그는 주말마다 함께 온 연수동기생들과 만나 이런 어려움을 토로했다. 사정은 대부분 비슷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일하는 농장으로 한 사람이 찾아왔다. 자신이 재일교포인데 여기서 동포를 만나니 반갑다는 것이다. 그는 농장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살고 있었다. 그래서 주말에는 그의 집에 놀러 가서 밥도 먹고 고국의 이야기를 나누다가 돌아오곤 하였다.

그러던 중 재일교포는 북해도 축산대학교에서 공부를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다. 너무나도 반가웠다. 그렇게 원하던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기쁜 마음에 흔쾌히 승낙했고, 그가 요구하는 절차대로 원서를 제출했다. 그리고 입학을 위한 면접을 보기 위해 그와 함께 동경에서 만나 북해도에 가기로 했다.

동경에서 북해도로 가기 전날 그는 함께 연수에 참여한 동기생의 형이 있는 집에서 하룻밤을 자고  다음 날 아오모리에서 배를 탔다. 그러나 그가 탄 배는 북해도가 아닌 북한에 도착했다. 그는 속았던 것이다. 그곳에서 10여 일 감금된 채 지냈다. 그곳에서 매일같이 한국으로 보내달라고 요구했지만 쉽게 보내주지 않았다.

10여 일 지난 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를 데리고 갔던 재일교포를 죽이고 싶을 만큼 원망스러웠지만 방법이 없었다. 북한에 다녀왔다는 점은 이미 그에게 약점이었기에 그의 말대로 행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1966년 11월 그는 일본을 도망치듯 빠져나와 귀국했다. 그의 미래는 이렇게 산산이 부서졌다. 그리고 친척의 신고로 1974년 중정에 체포되어,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기나긴 수형생활을 시작했다.

"아, 진짜 억울하더라고요. 난 속아서 갔다고 중정 수사관들에게 수없이 하소연해봤지만 듣지를 않더라고요. 오히려 제가 무지하게 무서운 간첩이 되어 있더란 말입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제출했던 북해도의 축산대학에 넣으려고 작성했던 원서는 북한노동당가입서로 둔갑했다. 법정에서 고문을 받았다는 사실을 이야기했지만 판사는 듣지도 않았다. 그는 속아서 북한에 갔다고 항변했지만 증거나 증인이 없다는 이유로 모두 기각되었다.

속아서 갔다고 수없이 하소연해봤지만

이야기를 마치고 다방에서 나와 근처 식당으로 이동했다.

"이 동네는 죄다 노인들밖에 없어서 밥값 싼 곳이 많아요. 오늘은 밥값 생각 않고 비싼 걸로 먹을라니."

그와 들어간 곳은 쌈밥집이었다. 쌈밥을 시키고 막걸리를 주문했다.

"막걸리 즐겨하시네요."

나는 웃으며 물었다.

"어릴 적이나 지금이나 이놈 하나면 속이 든든하더라고요. 예전에는 돼지 새끼 받아주고 얻어먹었는데 요즘은 벌이도 안 좋은데 내 돈 주고 사 먹을라니 비싸서...."

밥이 나오는 동안 그가 어깨에 메고 있던 검은 가방이 너무도 궁금했다.

"아까 오면서 보니까 어깨에 선생님 같은 가방을 메고 다니시는 분들이 많던데요?"
"아, 이거요. 다 치기공소에서 배달 다니는 사람들이에요."
"치기공소요?"
"치과에서 틀니니 임플란트니 하지 않아요? 그거 보형물 떠다가 치과에 배달하는 노인들이란 말이에요. 노인들은 지하철이 공짜잖아요. 그러니 치기공소에서 노인들을 데려다가 배달원으로 쓴다 이 말이에요. 하루에 4, 5군데 배달하면 하루가 가는데 한 달에 한 20만 원 받네요."
"아니 20만 원이면 너무 적은 돈 아니에요?"
"그래도 우리 같은 늙은이들 써 주는 데가 어디 있나요? 운동 삼아 평택에서 나와서 살살 다니면서 20만 원 벌어가는 게 어디에요. 옛날에 돼지 새끼 받아가며 막걸리 받아먹는 셈 치면 이것도 할 만한 거인디."

우린 막걸리를 한 잔씩 들이켰다. 입가는 시원했지만 속이 알싸름 했다. 몇 개월 후 나는 일본으로 날아갔다. 도쿄 신주쿠의 호텔에서 나는 북한에 끌려가기 전 만났다는 연수생의 친형을 만났다. 어렵게 찾아낸 그는 90세 가까운 나이임에도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었다.

"기억하고말고요. 우리가 어렵게 일본으로 초청한 연수생들이 간첩이라고 해서 사건이 크게 보도가 되었거든요. 그중에 우리 집에 왔던 그 젊은이도 기억하고말고요. 북해도에 있는 낙농대학에 들어가게 되었다며 얼마나 좋아했는지 몰라요."
"혹시 북해도 말고 다른 곳에 가려고 한다는 눈치는 전혀 없었나요?"
"그날 밤새도록 북해도 얘기만 했습니다. 다른 곳에 간다고 하는 사람이 밤새워 북해도 얘길 하겠습니까? 그의 눈빛은 북해도에 간다고 말하고 있었어요."

43년 만에 받은 '무죄' 선고, 그는 듣지 못했다

2017년 봄, 대법원에서는 그가 월북했던 것은 기망(欺罔)에 의해 저항할 수 없는 항거불능(抗拒不能) 상태였다는 사실을 인정하였고, 중정 수사에서의 고문 역시 인정받았다. 법원은 국가를 대신해 사죄하며 무죄를 선고하였다.

재심 재판정에서 피고인 자리에 서 있던 그는 판사의 '무죄'라는 선고가 제대로 들리지 않을 만큼 늙어버린 상태였다. 법원 직원이 그에게 무죄가 선고되었다는 설명을 하고서야 그는 눈물을 흘리며 피고인 자리에서 내려왔다. 43년 만에 그는 '피고인'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었던 것이다. 43년 만에 그는 일반인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평택성모병원에 입원해 누워있는 김영권 ⓒ 변상철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건 겨울이 다가오던 11월의 평택이었다. 건강해 보였던 그가 암 수술을 받았다는 것이다. 나이 드신 분들은 하루를 기약할 수 없는 '밤새 안녕'하는 경우가 많아 찾아뵙는 날을 미루지 않기로 했다. 곧바로 큰 딸을 데리고 평택의 성모병원을 찾았다. 병실 침대에서 곤히 잠든 그와 그 옆 보호자 간이침대에서 누워있는 그의 아내가 보였다.

잠시 지켜보며 문밖에 서성이다 보니 아내분이 잠에서 깨어 나왔다. 인사를 하고 경과를 물었다. 수술은 잘 끝났다고 했으나 경과는 지켜봐야 한다. 수술을 받아본 사람은 안다. 수술 후의 회복이 수술보다 더 힘들고 괴롭다는 것을. 특히 나이 들어서의 수술과 회복은 참으로 간단한 것이 없다.

"중정에 있을 때 대변을 못 봐서 교도소에서 생활할 때 치질을 달고 살았어요. 교도소에서는 아무것도 치료를 해주지 않아서 고생하고 있었던 차에 보일러 담당인 재일교포들이 밤마다 따뜻한 물을 가져다줘서 그 물로 좌욕을 했더니 치질이 쏙 들어갑디다. 그 뒤로 40년 넘게 치질을 달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게 드디어 탈이 났네요."

80 넘은 나이에 남편의 회복을 위해 병실 침대 옆에서 쪽잠을 자던 사모님은 힘들게 왜 왔냐며 미안해했다. 20년 넘게 옥바라지를 하며 아이들을 키워오고 남편과 함께 간첩 부부로 세상을 등지고 살다가 이제 살만하니 다시 남편의 병시중을 들어야 해서 어떻게 하느냐고 하자, "타고난 팔잔께 어쩌겄시유"라고 대답한다.

미용실에서 펌을 하다 말고 달려오셔서 밥상을 준비하시는 사모님. ⓒ 변상철


김영권씨 댁에서 차려진 음식. 바지락이 눈에 띈다. ⓒ 변상철


건강하시라는 말에 그는 말했다.

"교도소에서도 그 징그러운 세월을 보냈는데 이깟 거야 뭐, 걱정 말아요. 얼른 일어나서 교도소를 평정했던 땅 탁구 실력으로 동네 경로당 탁구를 평정해서 노인네들 코를 납작하게 해줄 테니까."

"막걸리도 한 사발 하셔야죠."
"그럼요. 나도 막걸리 생각이 얼마나 나는지 모르네요. 김치에 막걸리 한 잔 합시다. 아님 고창 동생한테 복분자라도 한 병 올리라고 할까? 하여간 뭐라도 한 잔합시다. 내 얼른 나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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