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0.30 10:20최종 업데이트 18.10.30 10:20
음력 9월 9일 중양절을 지나 해창주조장엘 왔다. 담장 멀리 개가 컹컹 짖고 발 밑에서 고양이가 야옹댄다. 동네 길고양이들이 해창 정원의 주인처럼 돌아다닌다. 은목서 꽃향기가 향수를 쏟아놓은 듯하고, 흰 차꽃잎 속에 노란 꽃술이 총채처럼 무성하다. 돌 틈에서 흘러나온 물이 마당 연못에 차오르고, 초록 이끼가 담요처럼 괴석 발치를 두르고 있다. 마로니에 잎이 갈색으로 사위어가고, 매끈한 배롱나무는 벌써 옷을 벗고 겨울 앞에 섰다.
 

해창양조장 정문과 길가의 방풍림과 비석들 ⓒ 허시명


여덟아홉 해 전 해창에 처음 왔을 때 눈에 띄었던 것은 문앞 길가의 훤칠한 방풍림 소나무들 아래의 비석 세 개였다. 비석들은 삐뚜름하게 기울어져 있어 누구도 관심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주조장과 비석 사이로 포장도로가 나면서, 주조장도 깎이고 비석도 길가에 나앉게 되었다. 비석 언덕 아래로 기계음이 멈춘 정미소가 있고, 들판이 펼쳐지고, 고천암으로 이어지는 물길이 흘러간다. 세월이 그냥 멈춰 있을 것 같은 고즈넉한 가을 들판이 푸른 하늘 아래로 멀어진다.


비석 세 기 중에서 직육면체 기둥처럼 생긴 투박한 비석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정으로 거칠게 쪼은 돌홈이 살갗처럼 느껴지는데, 앞면에 '申先生白坡逍遙臺'(신선생백파소요대)라고 새겨 있었다. 처음엔 백파가 누구인지 몰랐고, 선운사에서 출가한 백파선사로 착각하기도 했는데, 그의 후손들이 주조장을 찾아오고 <해남군지>를 보면서 지금의 서울시장격인 한성부 판윤을 지낸 백파거사 신헌구(1823~1902)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파거사 신헌구는 1862년 40세 늦은 나이에 정시(庭試) 병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1864년 사헌부 지평을 거쳐, 1869년에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냈다. 순탄하던 그의 벼슬길은 흥선대원군에 의해 단절되었다. 1875년 봄, 대원군이 그에게 반드시 성밖에 나가서 열어보라는 명과 함께, 비밀스러운 봉함 편지를 내렸다. 성밖에서 열어본 편지에는 먼 변방으로 내려가 한동안 세상과 절연한 채 한가롭게 살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백파거사가 내려온 곳이 해남 해창마을이었다. 그가 쓴 <추당잡고(秋堂襍稿)> 1, 2권의 표제 아래에는 '남정록(南征錄)' 상하라고 적혀 있다. 해남 시절의 기록을 모은 문집인데, 이를 통해 볼 때 그는 어성촌(漁城村) 어귀 부서만(扶胥灣) 동쪽 기슭에 자리한 해창촌사(海倉村舍)에 소요원(逍遙園)을 열고 꽃과 대나무를 가꾸며 은거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해창촌사가 바로 비석이 서 있던 자리를 꼭짓점으로 하여 펼쳐진 땅이다.

해창마을에 전하는 말에 따르면 서울 선비인 백파거사 신헌구가 이곳에 은거하다가 그의 집 두 채와 논 서너 마지기를 동네에 주고 떠나자, 이를 기려 비석을 세웠다고 한다. 비석은 그가 해남을 떠난 1880년 3월에 세워졌고, 비석을 세운 마을 동장 김치욱과 비석 일을 한 감역 장인석의 이름이 비석 뒷면에 새겨져 있다.
 

해창양조장 정원에 있는 신선생백파소요대비 ⓒ 허시명

 비석의 생김새로 보아, 백파에 고마움을 표현하고자 했던 마을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이 읽힌다. 자연석을 격식없이 다듬고, 모자도 없고 기단도 없이, 간결하게 선생이라는 이름을 달고 백파소요대라고 새겨놓았다. 그 소박한 표지석 하나만으로도, 백파가 꽃과 대나무를 키우며 열었던 소요원과 그가 해창들을 바라보았을 소요대가 140년을 늦게 뒤따라온 내게도 선하게 보인다.

백파는 죄 짓고 내려온 것도 아니어서 해남에서 지방관들과 자유롭게 왕래했고, 대둔사(두륜산 대흥사)도 드나들며 승려들과도 사귀었다. 백파는 차를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도 주목받은 인물인데,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의 <일지암시고>에 초의의 제자인 월여상인(月如上人)의 요청으로 발문을 썼다. 1877년에는 초의선사의 제자들이 편찬한 <동다송> 끝에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초의선사 햇차의 초록 향기 맛보니 艸衣新試綠香煙
곡우 전 새 혀 같은 여린 잎이네 禽舌初纖穀雨前
단산의 운간월만 손꼽지 말게나 莫數丹山雲澗月
종지 가득한 뇌소차 수명을 늘려주네 滿鍾雷笑可延年


백파는 초의선사가 만든 차를 맛보고서 '신령한 마음과 지혜의 눈으로 풀 나무 가운데서 가려 캐어 오래 가는 훌륭한 맛을 얻었으니 물건도 만남이 있는 것인가?'라고 찬탄하면서 '초의 차는 홀로 절집에서만 이름났을 뿐, 세상에서는 일컫지 않는다. 이는 사대부들이 대단히 훌륭한 것을 놓쳤기 때문이니, 누가 자료를 수집하고 망라하여 육우(陸羽)의 <다경(茶經)>을 이으려 하겠는가? 아! 내가 이 설을 짓는 것은 다만 초의의 차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가만히 남쪽 땅의 인사들이 훌륭한 것을 지녔으면서도 흔히 세상과 만나지 못한 탄식이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서다'고 <추당잡고> 1권 '차설(茶說)'이라는 글에 남겨두었다.

백파는 해창촌사에서 5년을 머물다가 상경하여 벼슬길에 복귀했고, 성균관 대사성, 이조참판, 형조판서, 한성부 판윤을 거쳐 80세이던 1902년 4월에는 궁내부 특진관으로 일하다가 그해 세상을 마쳤다.

신선생백파소요대비는 길가에 위태롭게 서있는 것을 안타까워한 해창주조장 주인에 의해 지금은 주조장 정원으로 들어와 있다. 조만간 마을 안쪽의 아늑한 곳으로 옮겨가기로 마을회의를 마쳤다고 한다. 길가 위태로운 곳에서 안전한 곳으로 다시 옮겨가는 것도 한 방안이겠지만, 소요대 그 비가 원래 있던 곳에서 멀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원이 아름다운 해창주조장 가을 마당에 앉아 소요대비를 바라보고 있는데, 주조장 안주인이 담백한 무감미료 막걸리 한 동이와 함께 백파의 후손이 두고 간 <백파만고> 시문집을 내준다. 백파는 암행어사로 전국을 떠돌면서 많은 시문을 남겼다. 그 문집 안에 어느 해 가을 중양절에 강원도 오대산 부근을 지나며 쓴 시가 담겨있었다.

가마 타고 삐걱거리며 산루를 지나는데 嗚藍伊軋度山樓
단풍 국화는 이미 늦은 가을에 들었네 赤葉黃花已晩秋
적막한 중양절에 담백한 촌 막걸리라 寂寞重陽村酒薄
오대산서 부질없이 고향 바라며 시름젖네 五臺空作望鄕愁

 

해창양조장의 정원에 나온 고양이 ⓒ 허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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