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1.01 11:49최종 업데이트 19.01.01 11:51

손님을 기다리는 술 한 단지 ⓒ 막걸리학교

 
새해 첫날이다. 어제는 2018년이었는데 오늘은 2019년이다. 하루 만에 한 해가 가고, 아침 따라 한 해가 왔다. 세월이 흘러가고, 생이 흘러가는 게 안타깝지 않는 이가 누가 있겠는가? 이규보(1168~1241)는 평생 슬퍼하는 것을 오늘이 가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평생에 슬퍼하는 것은 / 平生我所悲
오늘이 가면 어제가 되는 것이네 / 今日逝成昨
어제가 쌓이면 곧 옛날이 되어 / 昨積便成昔
응당 오늘의 즐거움을 그리워하리 / 應戀今日樂
뒷날 오늘을 잊지 않으려거든 / 欲爲後日忘
오늘 한껏 즐기자꾸나 / 今日極歡謔

오늘 하루를 즐겨라! 오늘 하루를 잘 보내는 것이 현명한 일이고, 가장 충실하게 삶을 사는 것일 터이다. 이규보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즐겼을까? 그는 시와 술과 거문고를 좋아해 호를 삼혹호라 하였다. 술이 없으면 시를 짓지 못했다. 그는 평생 8천 수의 시를 지었으니, 8천 번도 넘게 술을 마셨을 것이다.

이규보는 술을 좋아하다 보니, 세월의 빠름을 술로 멈춰 세워보려고도 했다. 그가 친구 전이지에게 준 취가행(醉歌行)이라는 시다.
 
해는 다리도 날개도 없이 / 日無脛又無翼
나는 듯 달리면서 조금도 쉬지 않고 / 胡爲劫劫飛走不少息
날이 가고 날이 오고 저물면 다시 아침 되어 / 日來日去暮復朝
나의 귀밑털 희게 하고 나의 얼굴 검게 하나 / 使我鬢髮如銀顔如墨
나는 동쪽 부상으로 달려가 뜨는 해 구경하고 / 吾欲東走扶桑看日上
서쪽 몽사로 가서 해지는 것도 볼 참이네 / 西入濛汜觀日匿
해 뜰 때에 금오를 잡아 땅바닥에 떨어뜨리고 / 日上時遮擁金烏拉翼墜
해질 때도 희화를 술에 잔뜩 취하도록 만들 참이네 / 日匿處牽挽羲和使沈醉
이렇게 하면 해도 그만 멈추고서 / 是時日未行
희화가 술에 깨고 금오가 날개가 나도록 기다리겠지 / 留待羲和醒酒烏生翅
삼백육십일을 삼천일로 일백 년을 일천 년으로 만들어서 / 三百六十日三千一百年作一千年
내 두 볼 다시 붉고 귀밑머리 다시 검어지면 / 使我兩頰更赤雙鬢玄
날마다 좋은 술 취하도록 마시고 싶네 / 日換美酒醉倒放顚狂
그대에게 묻네 그런데 우리 술 마실 돈이 있던가 / 問君能有許多錢

여기에서 부상(扶桑)은 동쪽 바닷속에 해가 뜨는 곳에 있다는 나무로, 동쪽 바다를 뜻한다. 몽사(濛汜)는 큰물 웅덩이라는 뜻을 지녔고, 해가 넘어가는 곳을 뜻한다. 금오(金烏)는 금까마귀로 태양을 뜻한다. 희화(羲和)는 중국 신화 속의 인물로, 해를 싣고 마차를 달리는 남자다.

희화에게 술을 먹여 마차를 멈추게 해 시간을 잡아두고, 길어진 세월을 술로 즐기려는데, 문제는 술 마실 돈이 있느냐는 것이다. 태양도 멈추게 할 허황한 배포에 견주면, 호주머니 돈을 헤아리는 것은 아주 현실적인 정서인데, 이는 친구 사이에나 나눌 수 있는 웃음 쏟아지는 대화 내용이다.

한껏 즐기자꾸나, 오늘을 잊지 않으려거든
 

세월 가는 것을 위로해줄 술 한 병 ⓒ 막걸리학교

 
이규보가 시를 얼마나 잘 짓고, 술을 얼마나 잘 마셨는지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1213년 12월 어느 날, 그의 나이 46살 때의 일이다. 최우가 저녁 연회를 베풀어 참석한 이들에게 시를 짓게 했는데, 이규보의 글 짓는 솜씨에 놀라, 다음날 당대의 최고 권력가이자 아버지인 최충헌에게 이규보를 데려올 테니 만나보시라고 했다.

이때 최우가 "이 사람은 술을 마시지 않으면 시를 제대로 짓지 못한답니다"라고 말하고 또 "이 사람은 취한 다음이라야 시를 짓습니다"고 말하며 술을 취하도록 마시게 한 뒤에 최충헌 앞에 이규보를 데려갔다고 한다.

오늘이 지나고 나면 오늘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덧없음을 노래하는 것밖에 없다. 이규보가 술 취해 이청경에게 준 시다.
 
지난해 동산에 피었다 떨어진 꽃떨기는 / 去年園上落花叢
올해도 그 동산에 예처럼 붉건마는 / 今年園上依舊紅
지난해 꽃 아래서 놀던 사람은 / 唯有去年花下人
올해는 그 꽃 아래 백발 늙은이로세 / 今年花下白髮翁
해마다 줄지 않는 좋은 꽃가지라 / 花枝不減年年好
해마다 늙어 가는 사람을 응당 비웃으리 / 應笑年年人漸老
봄바람도 저물고 꽃 역시 가버릴 테니 / 春風且暮又卷歸
부디 꽃을 대하고 망설이지 말길 / 愼勿對花還草草
내 노래에 그대의 춤이면 실컷 즐기리 / 我歌君舞足爲歡
인생 행락을 왜 때맞춰 아니할 건고 / 人生行樂苦不早
남이야 우리를 미치광이라 하든 말든 / 顚狂不顧旁人欺
천 잔 술을 어서 빨리 마셔나 보세 / 要使千鍾如電釂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유랑이 술 마실 때면 꽃향기 찾는 것을 / 君不見劉郞飮酒趁芳菲
알건대 그 풍정이 소년에 맞선다오 / 解道風情敵年少
또 보지 못했는가 동파 거사가 늙어서도 꽃 꽂고 부끄러워 않았다는 말을 / 又不見東坡居士簪花老不羞
취한 걸음 지팡이에 의지해 사람들이 웃었다오 / 醉行扶路從人笑
예부터 흥이 나면 술잔이 최고니 / 古來得意只酒杯
달 보고 금항아리 기울이길 사양 말게 / 莫辭對月傾金罍
허무하여라 부귀영화가 하나의 웃음거리 / 榮華富貴一笑空
위무제 조조의 동작대 노래를 보게나 / 請看魏虎銅雀臺

유랑은 당나라 시인 유우석으로 여겨지고, 동파거사는 송나라 소식이다. 소식의 길상사 상모란(吉祥寺賞牧丹)이란 시에서 "늙은이는 머리 위에 꽃 꽂고 부끄러워하지 않건만, 꽃이야 응당 늙은이 머리에 있기 부끄러우리(人老簪花不自羞 花應羞上老人頭)"라고 노래했다. 위무제는 조조이며, 악부가 동작대에는 조조가 죽을 무렵 기첩(妓妾)들을 애틋하게 여기고, 기첩들이 죽은 무제의 은총을 추모하는 내용이 담겼다.
 

어느 추운 겨울날 중국집 홍합짬뽕에 탁배기 한 잔으로 위로받다. ⓒ 막걸리학교

 
8백 년 전에 73년 동안 살다간 이규보의 시 세 편을 빌어, 새해 아침을 맞이한다. 이규보는 가는 세월을 술로 붙잡으려 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조금도 쉬지 않고 나는 듯이 달리는 세월을 잡을 리 없다. 인생은 무상하고 세월은 덧없이 간다. 새해 아침이 됐지만 변하지 않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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