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19 10:20최종 업데이트 19.02.19 10:20

광화문 안에 경복궁이 있고, 경복궁 동쪽에 삼청동이 있다. ⓒ 막걸리학교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을 나와 경복궁을 지나왔다. 경복궁 그 이름 속에도 술이 들어있다.
 
旣醉以酒 旣飽以德
이미 술로 취했고 이미 큰 덕으로 풍족하네
君子萬年 介爾景福
군자여 만년토록 큰 복을 누리소서

유교의 경전인 <시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마지막 두 글자인 경복(景福)을 따서 한양을 설계한 정도전이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지었다. 덕이 정치와 문화의 풍족함을, 술이 육신의 풍족함을 대변하고 있다. 그런데 술로는 쉽게 취하게 할 수 있지만, 덕으로는 쉽게 풍족하게 만들 수가 없으니, 정치하기 어려움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술은 국세청에서 전적으로 관리하다가, 지금은 세 부처로 역할을 나눴다. 국세청에서는 면허와 주세 관리를, 농림축산식품부에서는 진흥 업무를, 식약처에서는 안전 관리를 담당한다. 현장에서는 '시어머니가 늘었다'고 푸념하지만, 미국의 경우도 세원 관리는 주류담배과세무역국(TTB)이, 주류안전관리는 식품의약품청(FDA)이 담당하는 등 기능별로 관리한다고 한다.

우리의 술판을 바꿔야 한다
 

국내에서 최첨단 술 분석 장비를 갖추고 있는 국세청 주류면허지원센터. 이 장비들은 연구용이 아니라 검사용이다. ⓒ 막걸리학교

 
농림축산식품부가 술의 진흥을 담당하면서 2010년에는 '전통주 등의 산업진흥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고, 2016년에는 소규모 제조 면허의 시설 요건이 완화되고, 2017년에는 인터넷 쇼핑몰의 전통주 판매가 허용됐다. 이로 인해 전통주 제조면허 건수가 2010년에 469개에서 2016년에 872개로 2배 정도 늘었다. 온라인 쇼핑몰의 전통주 매출은 2016년에 6억 원에서 2017년에 21억1000만 원으로 251.7%가 늘었다고 총리실은 밝히고 있다.

예전에는 양조 면허내기가 제한되거나 까다로워서, 권력과 자본과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이들이 면허를 내고, 그것을 통해서 이윤을 축적하는 쪽으로 흘러갔다. 그러다 보니 양조 산업은 음식이나 문화 산업이 아니라 자본을 키우는 투자처 정도로 머물러 있었다.


지금도 9조 원(출고액 기준) 정도 되는 술 시장에서, 동일한 맛을 추구하는 희석식 소주회사 열 군데가 3조 원의 소주 시장을 휘어잡고 있고, 탄산감이 강한 가벼운 라거형 맥주를 제조하는 회사 세 군데가 4조 원의 맥주 시장을 분할하고 있다. 이들 회사의 기조는 술 문화의 다양성 또는 풍성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통한 가격 경쟁력을 앞세운 마케팅에 주력하는 모습이다.

술 문화가 바뀌려면 생산자 집단이 다양해지고, 소비자의 기호도를 겨냥한 신상품의 시장 진입이 쉬워져야 한다. 음식이 그러한 것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만들고, 만들어서 즐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만들어야 한다.

불행히도 우리 술판은 식민지 지배와 전쟁을 겪으면서 그렇게 나아가지 못했다. 이제 다행히 제도의 변화가 생겨 그게 가능해졌다. 지역 특산주 면허와 소규모 주류제조 면허가 생겼기 때문이다.

지역 특산주는 300평 이상의 농사를 짓는 농부가 10㎡ 공간에 시설을 설치하면, 소규모 주류제조는 2종근린생활시설에 1000ℓ 이상의 발효통을 갖추면 면허를 낼 수 있다. 그래서 도심에서, 음식점 안에서 3~4평의 공간으로 양조면허를 내는 사람이 생겨났다.

도심에 양조 자영업자가 등장하고, 지역 특산주인 한산소곡주 제조장이 서천군에 67개나 생겼지만, 이들이 가야 할 길은 아득하고 막막하다. 양조 미생물 연구 기술과 홍보 마케팅 능력은 철저히 개인의 능력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보르도 와이너리는 포도밭을 가지고 있는 과수원지기가 곧 양조인이지만,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고 있다. 포도 품종, 술 품질, 공용병과 공동브랜드 등의 관리가 공동체 차원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게 단기간에 이뤄진 일이 아니기에, 그들의 술 산업에서 문화와 국가의 힘이 느껴진다.

술로 치국평천하 하려면
 

2018년 국가대표 전통주 소믈리에 대회 장면. 방송인 정준하도 본선에 올라 경합을 했다. ⓒ 막걸리학교

 
그래서 총리실에 질문을 던졌다. 술로 치국평천하를 어떻게 할 것인지.

"술 정책은 국가 산업의 경쟁력으로 이어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농산물을 이용한 지역 명주의 등장을 유도해야 하는데,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양조장들의 기술 발전과 연구 개발은 자본과 시스템의 한계 때문에 더 이상 전진하기 어려운 실정입니다.

그렇다고 자본력이 있는 양조장의 기술력이 선도할 것이라고 믿고 기다리다 보면, 소주나 맥주 산업에서 보듯이 독점화되고 외국 자본에 인수 합병돼 우리 것이 아니게 되고 맙니다. 지역 명주의 발전을 위한 국립술연구소가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에 대한 의견은 어떠합니까?"


독립된 술 연구소에 대해서는 최근에 경상북도 영양군, 충청남도 도청 등 지자체에서도 연구 용역을 발주해 필요성 논의를 진행하기도 했다. 2018년 5월 1일에 농림부가 후원하고 위성곤 국회의원이 주최한 국회 포럼에서, 여당 원내대표와 중견 국회의원들의 축사와 함께 한국술산업진흥원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기도 했다.

하지만 토론은 원만하지 않았다. 새로운 기관의 설립 취지가 충분히 설명되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양조 관계자들로부터 '새로운 기관이 또 다른 통제를 하는 것은 아니냐'는 의심을 사면서 의견이 모이지 못했고, 다음 토론을 언제 하자는 기약도 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내 질문에 총리실은 다음과 같이 답했다.

"지역별로 경쟁력 있는 명주가 등장할 수 있도록 국가 차원의 기반 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에 공감합니다. 주류산업 선진국인 프랑스에서는 직원 140명에 연간 예산 132억 원을 들여 포도와인연구소를 운영하고 있고, 일본은 직원 45명에 연간 예산 84억 원을 들여 주류총합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사케의 품질 향상을 도모하고 있는 줄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 비해 우리는 전통주를 육성하기보다는 세원 관리의 대상으로 규제해온 면이 크고, 국가 차원의 연구와 지원은 비교적 최근에 시작됐습니다. 전통주 관련 연구와 지원을 전략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전문기관이 있다면 전통주 활성화에 큰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입니다.

농림축산식품부에서 가칭 술산업진흥원 설립을 구상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전통주에서 와인 소믈리에나 청주 키키사케시 같은 전문 자격 제도가 갖춰진다면 지역 명주의 문화적 개성과 독창성을 만들어가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또한 총리실은 예산 증액의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과거 일제 강점기나 한국 전쟁이라는 어두운 역사의 터널을 지나면서 맥이 끊어진 우리 지역 명주를 문화적·역사적으로 되살린다는 차원에서 전통주 사업의 예산 규모를 한번 되짚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국립술연구소를 세워야 하는 이유
 

한 나라의 술맛을 언어로 표현하고 고정하는 것은 그 술을 낳은 공동체가 기꺼이 감당할 몫이다. ⓒ 막걸리학교

  
술 산업은 발효 과학과 디자인과 문화가 어우러진 산업이다. 그래서 앞서 총리실에서 밝혔듯이 프랑스는 포도와인 연구소에 공무원 140명이, 일본은 주류총합연구소에 공무원 45명이 몸담고 있다. 중국은 쓰촨성의 우량예는 직원이 3만 명, 구이저우성의 마오타이는 직원이 1만 명이라 국가 차원으로 양조를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술 연구에 전념하는 공무원 1명을 찾기 어렵다.

술은 이미 국경 없이 날아 들어와, 중국식당에는 이과두주가, 이자카야에는 일본 청주가, 와인레스토랑에는 보르도 와인이 주인처럼 자리하고 있다. 수제맥주의 바람이 불자, 4개 1만 원 하는 수입 캔맥주가 전국 편의점 냉장고를 장악했다.

한국 술에 한국 청년의 노동력과 한국 문화를 담아 팔려고 한다면 국립술연구소를 세워 경쟁력을 강화해야 한다. 그래서 원하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곳에서 발효 미생물과 양조용 농산물에 대한 정보와 양조 과학 기술을 제공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술로 치국이 되고 평천하가 될 수 있다.

1614년에 이수광이 집필한,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으로 평가받는 <지봉유설> 19권 식물부 술 이야기의 첫 줄은 이렇게 시작된다.
 
古人言. 一郡之政觀於酒 一家之政觀於虀 盖謂二物善 則基他可知.

옛사람이 말하기를, 한 고을의 정치는 술에서 보고, 한 집안의 일은 양념 맛에서 본다고 했다. 대개 이 두 가지가 좋으면 그 밖의 일은 자연 알 수가 있다.

술은 한 지역의 이름을 걸고 파는 특산품이고 문화상품이다. 문화 공동체의 힘으로 맞서지 않으면 이웃 나라의 침탈을 받고 만다. 제 땅에서 나는 농산물로 빚은 술로 노동을 위로하고 기쁨을 나눌 수 있다면, 평천하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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