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26 09:30최종 업데이트 19.02.26 09:30
신년회를 가려고 전철을 탔다.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바라본다. 문자 몇 개를 보내고 열린 문밖을 바라본다. 내려야 하는 역을 바로 앞서 지나쳤다. 다음 역에서 내려 되돌아간다. 그래도 전철역은 되돌아갈 수 있어서 좋다. 빨리 달려가버리는 세월은 되돌아갈 수 없다.

고개 한번 숙이고, 잠시 내 일에 몰입했더니 세월이 흘러가버렸다. 1년이 삼백예순다섯 날이라지만, 어둠이 왔다 빛이 드는 찰나처럼 지나가버린다. 이 안타까운 마음을 1666년 전에 살았던, 한문 서체의 기틀을 잡은 서성(書聖) 왕희지(303~361)도 글로 남겨두었다.

난정에 가다
 

소흥 계주사에 있는 유상곡수연 그림 ⓒ 막걸리학교

 
왕희지는 353년 동진 왕조에 살며 산음현 회계내사(會稽內史)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해 음력 3월 3일 삼짇날에 회계산 북쪽 난정(蘭亭)에서 당대 문인들을 초대해 액운을 떨쳐버리기 위한 계사(禊事)를 열었는데, 자신까지 42명이 모였다. 이날 유상곡수처(流觴曲水處)에 앉아 술을 마시고 시를 지었는데, 그 시를 알뜰하게 문집 <난정집>에 남겼다. 그 문집의 서문, '난정기(蘭亭記)'를 왕희지가 썼는데, 다시없는 명문이란다. 그 한 대목이다.
 
暫得於己 快然自得 曾不知老之將至
(잠시 자기 뜻을 얻어서 유쾌하게 스스로 만족하여 지내다보니,
장차 늙음이 다가오는 것을 알지 못하였네.)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그리고 만족스럽게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세월 가는 줄 모르다가 문득 늙음이 다가온 것을 알고 소스라친다. 지난해 뵌 은사님은, 연로한 아버님의 병수발을 하고 났더니, 벌써 자신도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몸이 성한데 없다고 했다. 세월은 그렇게 전철 창밖으로 정류장 지나듯이 달아난다. 혹여 늙음을 동정하는 젊은이가 있을까봐 왕희지는 난정기에서 이런 말까지 해두고 갔다.
 
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 悲夫
(후세 사람이 지금 우리를 보는 것 또한 지금 우리가 옛사람을 보는 것과 같으니, 슬프도다.)
 

소흥 난정에 있는 아지 표지석, 아자는 왕희지가 지자는 왕희지의 아들이 썼다고 전한다. ⓒ 막걸리학교

 
중국 절강성 항주 공항에 내려 왕희지의 난정이 있는 소흥을 찾아간 적이 있다. 소흥은 정치가 주은래, 소설가 노신,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 월나라 서시가 세월을 달리해 살았고, 이백도 자신에게 '적선(謫仙, 귀양 온 신선)'이라는 별명을 지어준 술 친구 하지장을 찾아 이 고장을 찾아왔었다.

난정에 들어서니 연못 아지(鵝池)가 있다. 글자를 풀면 나(我)의 새(鳥)라는 멋진 호칭인데, 거위가 아악아악 우는 소리를 따서 이름지었을 것이다. 아지에는 거위 몇 마리 떠 있다.

왕희지가 거위를 좋아했다고 한다. 거위가 시끄러웠을 텐데, 누군가 다가오는 것을 알려주는 호신용이었을까? 거위의 덩치가 커서 고기를 많이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일까? 이런 현실적인 의문이 드는데, 왕희지가 거위를 좋아하는 것은 서법과 관련이 있다고 전한다. 거위의 긴 목이 붓을 잡은 손가락의 구부린 모습과 닮았다고 한다.

한번은 스님이 찾아왔는데 왕희지가 손에 쥐며 악력을 키우는 구슬이 사라졌다. 스님을 의심했고, 그 의심을 의식한 스님은 마음앓이를 하다 죽고 말았다. 마침 시름시름 앓던 거위 한 마리도 죽었다. 죽은 거위의 배를 가르고 보니 구슬이 나왔다. 왕희지는 스스로를 탓하고 살던 집을 불가에 받쳤다. 그곳이 소흥 시내에 있는, 구슬을 경계한다는 계주사(戒珠寺)다.

유상곡수에 앉아 난정기를
 

난정의 유상곡수처에 앉아 난정기를 읽다. ⓒ 막걸리학교

 
거위의 소리를 들으며 아지를 지나자 청나라 황제 강희제가 쓴 '난정' 비석과 비각이 있다. 비석은 문화혁명 때 홍위병에 의해 파손된 것을 다시 붙여두어 글씨가 흐려져 있다. 난정비를 지나자 굽이 흐르는 물길, 유상곡수처가 나온다.

난정기에 나오는 유상곡수다.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워놓고 제 앞에 술잔이 오면 그 술을 마시며 시를 한 수 읊고, 시를 못 지으면 따로 준비된 벌주를 마셔야 한다. 난정기의 그날은 42명 중에서 16명이 시를 짓지 못해서 벌주를 3잔씩 마셨다고 한다. 난정의 유상곡수에 앉아, 한문학자 송재소 교수의 제안으로 함께 온 사람들과 난정기를 돌아가면서 읽었다.
 
此地有崇山峻嶺 茂林修竹
(이 곳은 높은 산과 가파른 고개가 있고, 무성한 숲과 길게 자란 대나무가 있고)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또 맑은 물과 격동치는 여울이 좌우를 죽 비추고 있다.)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물을 끌고 와 굽이치는 물에 잔을 흘려 보내게 만들어 차례대로 둘러앉으니,)

雖無絲竹管絃之盛 一觴一詠
(비록 거문고와 피리는 없지만 술 한 잔 마시고 시 한 수를 읊으니,)

亦足以暢敍幽情
(그윽한 마음 활짝 펴기에 충분하도다.)

소흥 난정의 유상곡수처를 닮은 게 우리에게도 있다. 신라인 최치원이 전라도 태인에 유상곡수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전해지진 않는다. 
 

난정의 유상곡수보다 훨씬 더 정교한 경주의 포석정 ⓒ 막걸리학교

 
경주 남산에 포석정(鮑石亭)이 있다. 포석정은 전복 모양의 돌 배치로 물이 둥글게 돌아오는 형태인데, 난정의 유상곡수는 물이 뱀처럼 휘돌아 빠져나가버린다. 난정 유상곡수처는 빠져나가는 물줄기 옆에 앉아 시를 읊어야 한다. 사람이 여럿이면, 앞에 앉은 사람은 뒤에 앉은 사람의 소리를 듣기 어렵다.

그런데 포석정은 둥글기에 모여앉아서 술을 마시고 시를 읊기에 알맞다. 다만 물이 되돌아오려면, 높낮이가 달라야 한다. 물은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흐르고, 한번 흘러간 물을 돌아오지 않으니 나선형으로 약간이라도 경사져야 물이 돌아올 수 있다. 포석정은 물길이 끊겨버려 술잔을 띄울 수가 없지만, 소흥의 유상곡수처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짜임새 있다.

아쉬운 것은 소흥의 유상곡수처는 난정기라는 명문이 있어서 기려지지만, 경주 포석정은 견훤으로부터 자결을 강요당한 경애왕의 슬픈 전설만이 남아 기려지지 못한다는 점이다.

생은 흘러간다

그런데 난정의 유상곡수처는 어딘지 거칠고 어설프다. 난정 주변에 높은 산이나 가파른 고개도 안 보인다. 교통이 편리해져서 너무 쉽게 찾아왔나 싶기도 했지만, 유상곡수처를 따라 놓인 바위가 1600년 전의 그것 같지가 않았다.

송재소 교수께 여쭸더니, 난정기를 썼던 난정은 원래 이곳이 아니란다. 1548년에 군수 심계가 현재의 장소에 난정을 조성했단다. 그리고 유상곡수처는 1698년에 복원됐고, 그 뒤로 여러 차례 없어지고 복원되기를 반복하다가 1980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단장됐다고 한다. 내가 앉았던 유상곡수처의 바위에서 세월의 흔적을 느끼기 어려웠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1693년에 이곳에 강희제가 와서 친필로 난정서를 써 비석에 새기게 하고, 그의 손자 건륭제가 1751년에 다시 와서 그 비석 뒷면에 직접 지은 시를 새겨 넣었다. 그 세월도 300년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니, 굳이 옛터가 어디냐고 묻는 게 부질없어 보인다.

유상곡수연이 열리고 1666년이 지난 오늘, 왕희지의 서체는 남아있지만 왕희지가 쓴 진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당 태종 이세민(599~649년)이 왕희지의 글씨를 좋아해 <난정집서>를 포함한 왕희지의 글을 죄다 모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죽으면서 왕희지의 글씨와 '천년만년 함께 있고 싶다'고 해서 함께 묻혔고, 그로 인해 왕희지의 진품 글씨가 세상에 하나도 남지 않게 됐다고 한다. 지금의 왕희지체는 왕희지 글씨의 무수한 모작들의 합성품인 셈이다.

전철은 서울의 땅을 유상곡수처럼 휘돌아다닌다. 1974년에 개통된 1호선부터 9호선까지 있다. 나는 간혹 이런 전철놀이를 한다. 집 앞의 땅속으로 6호선 전철이 지나간다. 아무 목적지도 없이 6호선 전철을 타고, 환승역이 나오면 무작정 갈아타고, 집의 반대 방향으로 간다. 사람들을 관찰하는 시간이다.

그렇게 서울 지하철 노선 아홉 개를, 아홉 생을 사는 것처럼 갈아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온다. 서울을 다 돌아본 듯하지만 허전하긴 마찬가지다. 몇 생을 살아야 생의 미련이 사라질까? 또 다른 삶을 살려고 떠나지만, 세월만 버리고 다니는 것 같다.

난정의 유상곡수처에 앉았던 시간이 떠오른다. 물길 따라 잔이 돌아 내 앞에 멈춘다. 시를 지으라 한다. 소흥의 명주 소흥주를 흠씬 기울이면서 짧은 소회를 담아낸다.

생은 흘러간다, 나를 잊은 채로
유상곡수에 앉아 왕희지가 되어보고
내게 아닌 생을 꿈꾸다가, 다시 술에 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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