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03 17:22최종 업데이트 19.04.05 09:32
시모노세키와 부산을 오가는 관부연락선을 타고 귀국하는 양두량의 가슴은 터질 듯이 기뻤다. 지긋지긋한 징용 생활을 마치고 고향으로 간다니 이보다 기쁠 수가 있는가. 배 안에 있는 수백 명의 동료들도 같은 심정일 것이다. 일제강점기 말 일제군국주의자들은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눈알이 빨개졌다. 소위 '총알받이'와 전쟁터의 '일꾼'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묻지 마라 갑자생'이라던 양두량(1924년생)도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다가, 해방과 동시에 귀국길에 올랐다. 갑판 위에 선 그는 더 이상 스스로 원하지 않는 삶을 살지는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경찰 시험에 합격했으나...
 

1947년 3.1절 기념식에서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는 경찰 ⓒ 강요배

 
2년 전 관부연락선의 갑판 위에서의 결심은 양두량을 제주경찰서에 들어가느냐, 마느냐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지난 2년간 그에게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우선 이호리 오도룡 마을 처녀 김열을 만나 결혼했고, 그 사이에서 아들 성홍을 낳았다.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보배였다. 그러다 보니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한다는 부담감이 그의 가슴을 압박해 왔다. 하지만 그 생각도 잠시였다. 1947년 3월 1일 있었던 사건과 이후 몇 개월 사이 제주의 모습을 보면 생각이 180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지난 3월 1일 그는 제주북국민학교에 있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연동리 사람 모두 참석했다. 이 집회는 '제28주년 3·1절 기념 제주도대회'였다. 1919년 만세운동을 기념하자는 취지였지만, 그보다는 1년 6개월 동안 실시된 미군정의 실정(失政)을 성토하는 자리였다.

제주도민을 포함한 조선인들이 해방의 기쁨을 만끽한 것은 불과 한두 달이었다. 일장기가 있던 자리에 성조기가 꽂이더니 일제강점기 때 '공출'보다 심한 '미곡수집'이 실시되었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무엇보다 도민들의 가장 큰 원성을 산 것은 친일 경찰의 재등용이었다.

불만이 극에 달한 제주도민들이 북국민학교에서 집회를 마치고 관덕정 앞에 도착했을 때 사건은 터졌다. 말에 탄 경관의 말발굽에 치여 한 아이가 쓰러졌는데, 기마경찰이 그냥 가 버리려 한 것이다. 항의하는 군중들이 경찰서로 향하자 경찰은 사격을 가했다. 이날 사격으로 6명이 사망했다.

이날 이후 제주도에는 시위 주도자 검거령이 내려졌고, 여기에 양두량의 큰 처남 김민하도 체포돼 구류를 살았다. 제주도에는 육지 경찰들이 소위 '응원 경찰'이라는 명분하에 모여들었다. 이들은 제주도를 '빨갱이 섬'으로 규정했고, 제주도민을 섬멸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경찰시험에 합격한 양두량은 당황스럽기만 했다. 애초에 그가 경찰시험에 응시한 것은 건국 과정에서 뭔가 작은 힘이나마 보태겠다는 소박한 뜻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정국이 급속하게 변했고, 민중이 원하는 경찰은 제주도 어느 곳에도 없었다. 아니 식민지 시절보다 더 무서운 경찰들이 득시글했다.

잠시 처자식의 생계 때문에 고민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양두량은 경찰 합격통지서를 미련 없이 확 찢어버렸다. 1947년 여름이었다.
 
무차별적 사살... 가족을 잃은 사람들

'흑'하며 아내가 울음을 터뜨렸다. "여보 왜 그래?"하며 양두량이 아내를 부축했지만, 아내는 이내 기절했다. 옆에 서 있는 사내는 어쩔 줄 몰라 얼굴이 빨개졌다. "이보시오. 무슨 소리를 했길래 내 아내가 이런 거요?" 사내는 마치 자기가 죽을 죄를 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는 "예. 큰 서방님(양두량에게는 큰 처남)이 경찰들한테 총에 맞아 돌아가셨답니다" 했다.

기절초풍할 일이지만 오빠의 사망소식을 들은 아내가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자신까지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작년 3.1절 기념식 사건으로 경찰서 유치장에서 며칠 고생을 한 큰 처남이 경찰 총에 맞아 죽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기절초풍할 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처남 사망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돼 4.3사건이 터지고, 제주도 곳곳은 살육의 현장이 되었다.

"탕탕탕"하는 총소리와 비명이 이어졌다. "악" "컥" 경찰과 군인들의 토벌작전이 본격화되면서 여러 마을에서 있었던 일이, 양두량이 사는 제주읍 연동리에서도 벌어졌다. 캄캄한 밤에 군경은 마을의 집에 불을 질렀고, 뛰어나오는 주민들을 무차별적으로 사살했다.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움직이는 물체에는 모두 총질을 해댔다. 송요찬 9연대장이 지난 1948년 10월 17일 내린 "해안선에서 5km 이상 지역에 허가 없이 출입하는 자는 무조건 사살한다"는 포고령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포고령을 충실히 이행하는 군인들의 총에 맞아 죽는 이의 절대 다수는 여성과 어린아이였다.

양천종의 용기

연동리 마을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양두량 아내 김열은 마을이 불타는 상황에서 가재도구와 옷가지를 챙긴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아기 성홍을 건사하는 것만이 관심사였다. 마을의 젊은 남자는 경찰과 군대를 피해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고 노인과 여성, 어린아이들은 따로 움직였다. 그 피난 와중에 양두량은 아내 김열과 헤어져 산속으로 들어갔다.

며느리와 손자와 함께 몸을 피한 시아버지 양천종(1898년생)은 그 상황에서도 양식을 챙겨 왔다. 서로의 안부를 묻고는 이윽고 잠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움직였다. 산에 노숙할 수는 없었다. 추위가 문제가 아니라 군인에게 발각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젊은 사람들이 인근에 굴이 있는지 찾아다녀, 몇 시간만에 굴 하나를 발견했다. 연동리 사람 모두가 그 굴로 이동했다. 굴 안에 누운 김열은 '여기서 얼마나 보내야 하나?'고 생각을 하자 한숨부터 나왔다.

다음날 해는 여지 없이 뜨고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하지만 무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는 만무다. 우선은 먹을 양식을 구하는 것이 문제였다. 군인과 경찰들의 방화에 갑자기 집에서 뛰어 나오느라 양식을 챙긴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며칠이 될지 모르는 피난길에 손가락만 빨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더군다나 한겨울이 시작되는 시기에 한라산에 산과일이나 채소도 전무했다. 결국 방법은 하나다. 다시 마을에 내려가서 양식을 가져오는 것이다. 물론 대부분 양식을 군인과 경찰이 불 지르거나 탈취해 갔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대비해서 집 뒤곁에 양식을 숨겨놓은 비상식량이 있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고양이 목에 방울을 채울 사람이 누구냐'였다. "내가 하겠소"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이는 양천종이었다.

"안 돼요, 아버님"하며 김열이 시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그러면 우리 모두 굶어 죽을 때까지 그냥 있냐? 성홍이를 생각해서라도 내가 갔다 와야지 누가 가겠냐?"

양천종은 당시 연동리에서 노인 축에 끼였다. 하지만 젊은 남자들은 일찌감치 토벌대의 눈을 피해 입산했기에, 이곳에는 노인들과 여성, 어린이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이니 양천종이 자원했을 때 누구도 만류할 수 없었다. 

어둠이 산자락을 모두 집어삼키고도 한참이 지난 후 양천종은 산을 등지고 마을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가 동굴로 다시 온 것은 새벽이 다 되었을 때였다. 찬 바람이 쌩쌩 불었지만 그의 얼굴은 땀이 비 오 듯했다. 양천종은 서 있을 힘도 없었지만 며느리에게 "아가, 이거 얼른 죽 쒀서 성홍이 멕여라"고 말했다.

그는 가져온 양식을 마을 사람들에게도 조금씩 나눠주었다. 받는 이들은 면목이 없었지만 달리 양식을 구할 길이 없어, '고맙다'며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그 이후에도 양천종은 고양이 목에 방울 다는 일을 몇 차례 더 자원했다.
 
자식은 대전형무소로, 아버지는 광주형무소로
 

행방불명자 묘역 제주 4.3당시 행방불명된 이들의 집단묘역 ⓒ 박만순


길고 긴 겨울이 지나고 49년 초 산으로 갔던 젊은 남자들도, 피난을 갔던 마을 사람들도 마을로 내려왔다. 경찰의 선무 방송만 믿고 자수를 한 것이다.  

이후 양두량은 주정공장에 구금됐다가 대전형무소에 정식 수감됐다. 그는 주정공장에서 '손가락(손가락 가리키는 대로 이뤄진) 재판'을 통해 받은 7년형을 선고받았는데, 혐의는 1948년 이후 좌익 활동에 적극 참여했다는 것이었다.

제주농업학교를 나온 양두량은 항상 지식에 목말라 했다. 수감 생활 중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고 고향에 있는 아내에게 편지를 쓸 때면 '아버님은 어떻게 지내시는지'로 시작해 아들 성홍의 건강을 묻고는 이내 '책 좀 보내주시오'로 이어졌다.

아내 김열은 반가움과 동시에 서운함이 몰려 왔다. 그렇게 기다렸던 남편의 소식이었건만, 책을 보내 달라니, 너무나 무정한 이였다.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철창 안에서 책을 읽을 엄두도 못 낼 텐데'라는 생각을 하니 존경의 마음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김열은 책과 옷가지, 그리고 꿀을 대전형무소로 보냈다.

수감 상태에서 한국전쟁을 맞은 그는 1950년 7월 초 대전 산내 골령골에서 동료들과 함께 대한민국 군경에게 처형 당했다.

골령골에서 화약 냄새가 채 가시기 전 빛고을 광주에서는 아버지 양천종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양천종이 광주로 가게 된 경위는 파악되지 않는다). 죄명은 '양식을 나누어 주었다는 것'. 군경의 토벌을 피해 한라산에 피신했을 때 목숨을 걸고 집에서 양식을 가져와 마을 사람들에게 나눠 준 것이 죄가 된 것이다. 이른바 '폭도에게 음식을 제공한 죄'였다. 굶는 이웃을 보고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게 정상이지, 그게 죄가 될 것이라고는 양천종은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그렇게 아들은 대전에서 학살되고, 아버지는 광주에서 학살됐다.
 
4.3은 끝났는가?

상처에는 경중(輕重)이 없다. 죽음도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상처는 받을 때마다 고통스럽다. 김열의 경우가 그렇다. 남편과 시아버지는 한국전쟁 초기에 대전과 광주에서 죽었다. 그런데 친정식구들은 4.3때 어른부터 어린이까지 초토화되었다.

큰오빠 김민하는 4.3 전에 학살되었고, 작은오빠 김순하도 학살되었다. 큰 오빠의 딸은 4.3 당시 행방불명되었고, 조카 김상훈(김민하의 아들)는 제주읍 해안동에서 머리에 총을 맞아 죽었다. 친정아버지는 경찰의 고문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한국전쟁 전에 자살했다. 4.3 사건으로 김열은 친정에서 5명이 학살되거나 행방불명되고, 시댁에서는 2명이 학살된 것이다.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조카들의 죽음과 행방불명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큰 오빠 김순하의 유해가 제주국제공항 유해 발굴시 DNA 조사로 확인된 것이다. 유해는 찾았지만 오빠가 되살아오지는 못했다.

양두량의 아들이자 양천종의 손자인 양성홍(1947년생. 제주시)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집안이 4.3의 상처로 얼룩진 것을 정확히는 몰랐다. 제주중학교를 나온 그는 오현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군인이 되는 것을 생각했던 그에게 '빨갱이 자식'이라는 딱지가 그의 꿈을 산산조각 냈다. 고2 때 친척이 "너는 아버지가 4.3때 죽어서 육사에 못 가니 일찌감치 다른 길을 선택하라"고 조언했던 것이다.
 

양두량 묘석 아버지 양두량 묘석 옆에 앉아 있는 양성홍 ⓒ 박만순

 
그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학업을 일절 포기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 선생이 "성홍아, 상업학교 가라"고 했던 말이 번쩍 떠올랐다. 생각해 보니 그 담임 선생은 양성홍의 집안 사정을 알고 상업학교 진학을 권유했던 것이다.

성홍의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선거관리위원회에 취직했는데 3개월 만에 해고되었다. 역시 신원 조회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1980년까지 제대로 된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살다가 1981년에야 건설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다보니 1987년 민주화 이후 제주사회에 불붙은 4.3 진상규명운동을 알았지만 동참할 수 없었다.

1992년부터 건설업을 시작했지만, 그때도 4.3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없었다. 입찰에 불이익을 받지는 않을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그의 인생이 바뀐 것은 1999년 '제주 4.3 특별법'이 생긴 이후였다.
 
4.3 유족들이 막은 송요찬 선양 사업
 

청양군이 진행한 송요찬 선양사업 반대시위 ⓒ 오마이뉴스 심규상

 
"제주교육청인데요."

기자에게 '4.3 평화공원'을 안내하기 위해 운전대를 잡은 양성홍에게 전화벨이 울렸다. "제주교육청 ○○○장학사인데요"로 시작된 통화의 골자는 올해 진행되는 인권교육의 교육 일정에 관한 협의였다.

제주교육청에서는 제주도내 초·중·고생들에게 '4.3'을 올바로 알리기 위해 '4.3유족회' 회원 중 36명을 '명예인권강사'로 선정해 인권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 양성홍도 참여하고 있다. 2017년부터 진행하고 있는 이 프로그램은 이석문 교육감에 의해 4.3이 일어난 지 69년 만에 진행되는 것이다. 양성홍은 대기고등학교, 오름중학교, 한라중학교, 한라초등학교에서 인권강좌를 진행했다.

그는 2013년부터 2016년까지 '4.3유족회 대전위원회' 회장을 맡았다. 진실화해위원회 진실규명 결정을 받은 이후 민사소송이 진행되는 중요한 시기였다.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진실규명 결정 받은 114명 중 72명이 재판에 참여해 전원 승소했다. 이때 양성홍은 회장으로서 회원들을 설득해 재판에 참여시켰다.

하지만 적지 않은 회원들이 인지대라는 경제적 부담과 승소에 대한 불안감으로 재판에 참여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회원들이 재판에 참여하지 않은 가장 큰 이유는 완전히 씻기지 않은 '피해 의식'이었다. 진실화해위원회로부터 불법적인 학살을 당했다는 도장을 받고서도 여전히 그들은 불안했던 것이다.

그는 유족회 활동 중 기억에 남는 일로 '송요찬 선양사업 반대 운동'을 꼽았다. 2017년 충남 청양군은 10억원을 들여 이 지역 출신인 송요찬의 생가와 동상, 기념관을 재정비하는 사업을 추진했다. 이미 보훈처에서 3억이 내려왔고, 충청남도에서도 예산 3억이 확정되었다. 나머지 4억은 청양군이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하지만 송요찬이 어떤 인물인가? 송요찬은 일본군 출신인데다가, 제주 4.3민간인학살, 1950년 보도연맹원 및 형무소재소자 학살을 지시 또는 실행한 인물로 꼽힌 이였다.(관련 기사: 4.3유족회 "학살자 송요찬을?" 청양군수 "먹고 살려고...")

4.3 때 평화협상을 이끌었던 김익렬이 해임되고, 후임 박진경이 부하들에게 사살된 후 제주도민을 무차별 학살하는 데 진두지휘를 한 9연대장이 송요찬이었다. 송요찬이 자신의 삶에서 공(功)이 있다면 4.3은 용서할 수 없는 과(過)인 것이다. 그런 이에게 지방자치단체가 공적인 예산을 들여 선양사업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양성홍은 유족회 임원들과 함께 충남 청양군을 찾아 군수를 면담하고 항의했다. 결국 충청남도와 보훈처, 청양군이 사업을 철회했다.

70세를 훌쩍 넘긴 양성홍은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인권교육을 하는 것을 생의 기쁨으로 삼고 있다. 그렇다 보니 제주교육청에서 실시하는 인권교육에 커다란 애정을 갖고 있다. 양성홍과 제주도민의 노력으로 제주도가 진정 평화의 섬으로 우뚝 서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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