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20 08:36최종 업데이트 19.12.21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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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 제주 4.3사건으로 인해 징역 7년을 선고받아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이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전 산내에서 불법 처형되었습니다. 이들의 사연을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편집자말]
고성지서(제주 서귀포시) 앞마당은 굉장히 넓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일제강점기에는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이용된 곳이기 때문이다. "모두 모였습니다. 지서장님." 최 순경이 보고하자 지서장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당에는 30여 명의 여성들이 부동자세로 서 있었다. "오늘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군사훈련을 하겠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성실히 훈련에 임하여 주길 바라오. 그렇지 않으면 오후까지 훈련은 계속될 것이오." 지서장의 훈화에 참석자들은 입을 삐죽거렸다. 하지만 소리 내서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앞으로 갓!" "지금부터는 낮은 포복을 해서 저기 철조망을 지나간다. 실시!" 군사훈련이라고는 구경도 해보지 못한 여성들에게는 낯설기만 했고, 그러다 보니 동작이 틀릴 수밖에 없었다. "거기 용수 할머니 똑바로 하쇼!" 용수 할머니는 얼굴이 빨개지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자꾸 틀리면 단체 기합 받을 줄 알아." 군사훈련을 총 지휘하는 지서장은 아예 반말지거리를 했다. 훈련을 받는 여성 중에는 자기 어머니 뻘 되는 이가 있었는데도 말이다.

지서장의 호통과 반말지거리가 통했는지, 참석 여성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자, 오늘 훈련은 이것으로 마치겠소. 내일도 아침 9시까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오시오." 지서장의 훈련 종료선언에 참석자들은 모두 '휴우' 하는 한숨을 쉬었다. 해가 중천에 떠 자식들 손주들 점심을 챙겨 줄 시간이라, 다들 집으로 돌아가기 바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동시 매타작

고성지서 앞마당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이 여성들은 누구인가? 1948년 4.3사건이 터지면서 살기 위해 한라산에 입산한 이들의 가족이다. 대부분 남성들이 한라산에 입산하자, 경찰은 그 가족들, 특히 여성들을 '군사훈련'이라는 명목으로 매일 훈련에 강제 동원했다. 소위 '빨갱이 가족'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이 훈련에 며느리 문남하와 그녀의 시어머니도 참가했다.

문남하의 남편 강태훈이 아직 한라산에 있을 때인 1949년 초의 일이다. 고성지서에서는 강태훈을 아직 검거하지 못하자 그의 아내와 어머니를 지서로 연행했다. "남편이 지금 어디 있어?" "몰라요." "사실대로 말해!" "할망구 당신 아들 집에 왔었지?" "그런 일 없어요." 취조는 제자리를 맴돌았다. "이것들 조용히 말로 해서는 안 되겠구먼. 야! 이것들 정신 차리게 해 줘." 지서장의 지시에 순경들은 몽둥이를 들었다. "아이고 사람 죽네." 경찰들은 여성들이라고 사정을 봐 주지 않았다. 몽둥이 찜질은 계속되었다. 두 여성의 비명은 지서의 창문을 넘어 담 밖까지 전해졌다.

지서 바로 옆집에 살던 문남하의 딸 강송춘(당시 6세)은 귀를 막았다. 할머니와 어머니가 지서에 가서 곤욕을 치른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지서 안에서 고초를 겪는 이도 죽을 맛이지만 그녀들의 비명을 듣는 어린 소녀는 더 죽을 맛이었다.

강태훈이 한라산에서 하산해 주정공장을 경유해 목포형무소에 수감된 후에도, 그의 아내와 어머니의 고통은 멈추지 않았다. 지서에서 툭하면 호출을 하고, 온갖 부역을 강요했다. 심지어 겨울철에는 "나무 해갖고 와라"며 땔감을 해 올 것을 강요하기도 했다. 지서의 동네북이 된 건 비단 강태훈 집의 여성들만이 아니었다. 한라산에 입산한 남성이 있는 집은 모두가 겪어야 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강태훈은 왜 한라산으로 입산했을까?

학살 위협에 달아났을 뿐인데
 

4.3사건으로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산내에서 학살된 이들의 묘역 ⓒ 박만순


"태호야, 뛰어" 하면서 형 강태훈은 대나무 숲으로 달렸다. 형의 목소리를 들은 동생 강태호도 무작정 뛰었다. 1948년 4.3사건이 일어난 후 토벌대는 제주도 전 지역을 휩쓸고 다니며 청·장년 남성들을 사냥하기에 바빴다. 소위 '빨갱이 사냥'이었지만, 실은 제주도민을 희생양으로 삼아 극우반공 정권을 수립하려는 미군정과 이승만을 위한 정치적 사냥이었다.

특히 제주 중산간마을(해안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마을)은 방화와 학살의 타깃이 되었다. 강태훈 형제도 정치적 사냥의 제물이 되었다. 강태훈이 집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경찰들의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그는 경찰들이 올 걸 짐작하고 무작정 도피했다.

그렇게 시작한 입산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토벌대의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말만 믿고 하산을 했다. 형제는 주정공장에 구금되었다. 강태훈의 아내와 어머니가 면회를 했다.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한 달 후면 나갈 겁니다." 장남의 안심하라는 말에 어머니는 가벼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런데 얼마 후에 동생은 대전형무소에, 형은 목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강태훈-강태호의 어머니는 장남이 있는 목포형무소로 면회를 갔다. 대전은 너무 멀어 엄두를 내지 못했다. 목포에서 강태훈의 핼쑥한 얼굴을 보고 돌아온 어머니는 몸져누웠다. 아들들이 언제나 석방되나 하고 목을 빼며 기다리고 있는데 한국전쟁이 터졌다.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동생 강태호는 대전 산내에서 후퇴하는 대한민국 군경에 의해 불법 처형되었고, 형 강태훈도 목포지역에서 학살되었다.

귀한 자식 둘을 졸지에 잃어버린 시어머니는 화병이 생겼고, 비난의 화살은 아무런 죄도 없는 며느리에게 돌아갔다. 며느리 문남하는 죽을 맛이었지만 참을 수밖에 없었다. 어린 아이들 때문에라도 참아야 했다. 하지만 시어머니의 구박은 시간이 갈수록 극성을 부렸고, 며느리는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며느리는 개가를 했고, 어린 아이들은 할머니의 손에 맡겨졌다. 처음에는 원래 있던 밭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 하지만 야금야금 빼먹는 곳간이 오래 갈 수는 없는 법이다. 팔 땅도 없어진 상황에서는 거지 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하루 식사는 한 끼 죽이 전부였다.

혼자 남겨진 아이
 

증언자 강송춘 ⓒ 박만순

 
이런 상황에서 강태훈과 문남하의 딸 강송춘의 여동생은 5세 때 영양실조로 세상의 연을 끊었다. 엄마가 개가하자 할머니의 원망은 손녀 강송춘에게 돌려졌다. 그런데 그 할머니도 화병으로 오래 살지 못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강송춘은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렇게 살기 위해 나선 것이 아기를 봐주는 '애기업개'였다.

그때가 그녀 나이 아홉 살 때였다. 지금으로 치자면 부모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을 나이지만 1950년대 제주도는 그렇지 못했다. 제주비행장 앞 다호마을에서 2년을 애기업개로 보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육지에 가면 공부도 할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부산으로 향했다. 애기업개로 시작한 부산 보수동 생활은 화장품 공장 종업원으로 이어졌다. 종업원이라고 해봐야 심부름 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다가 대구 삼호방직에 취직했다. 열여섯에 가서 5년간 공장생활을 했다. 그녀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글을 깨우쳤다. 그녀가 학업의 세례를 받은 것은 겨우 초등학교 1학년, 2개월에 불과했다. 학교를 더 다닌다는 것은 언감생심이었다. 할머니가 자신보다 2살 위인 고모는 학교에 보내 주면서 자신은 보내 주지 않았다. "너 때문에 애비가 죽었다"는 황당한 원망이 그 이유였다.

고아처럼 살아온 강송춘(76세, 제주도 서귀포시 강정동)은 60년 만에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했다. 2010년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확인' 결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전 산내에서 학살된 숙부의 재판은 완료가 되어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 강태훈의 재판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강송춘은 요즘 손주들 보는 재미로 노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가슴 한켠에는 아버지와 작은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이 늘 자리하고 있다. 비록 진실화해위원회의 결정으로 명예는 회복되었다지만, 그녀의 아버지와 작은아버지가 살아 돌아올 수는 없다. 더군다나 그녀의 청춘은 결코 돌아올 수 없는 일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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