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24 11:09최종 업데이트 20.03.16 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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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 저자이자 가산탕진형 와인애호가 임승수입니다. 맨땅에 헤딩하며 습득한 와인 즐기는 노하우를 창고대방출하겠습니다.[기자말]
바야흐로 연말연시다. 와인이 생각나는 시즌. 포도 주스에 소주 섞어 마시면 대충 와인 아니냐고 조롱하는 소주파 및 맥주파조차 이때면 은근슬쩍 와인을 떠올린다.

돈이 넘친다면야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초특급 호텔 레스토랑을 예약해 투뿔 한우 안창살을 잘근잘근 씹으며 프랑스 그랑 크뤼 급 와인으로 혓바닥을 우아하게 세척할 텐데. 현실은 찰싹 붙은 옆집 콘크리트 벽을 보며 동네 마트에서 사온 호주산 소고기 치마살을 굽는다.

그래도 괜찮다. 21세기 대한민국 서민층의 연말연시 잔칫상은 중세 유럽 귀족의 그것 못지않으니까. SK브로드밴드 Btv 채널 311번을 틀면 위대한 재즈 가수 엘라 피츠제럴드가 나를 위해 노래 부르고, 호주의 드넓은 초원을 뛰놀던 와규의 탱글탱글한 치마살이 비행기를 타고 물 건너와 가스레인지 불판 위에서 최상의 미디움 웰던으로 나를 기다린다.

동네 마트에서는 캐나다산 랍스터 큰 놈을 이만 원대에 판매하는데, 심지어 천 원만 더 주면 먹기 좋게 쪄서 레몬과 칠리소스까지 곁들여 포장해 준다. 이제 삼만 원대 와인만 준비되면 태양왕 루이 14세 부럽지 않은데, 도대체 와인에 대해 뭘 알아야 고를 것 아닌가. 그래서 이 글을 쓴다.

아무런 협찬 없이 내 돈 내고 구매해서 내 혓바닥으로 검증한, 연말연시 가성비 최강 와인 다섯 가지를 추천한다. 

5위, 시데랄(Sideral)

1865 와인으로 유명한 산 페드로San Pedro 사의 와인이다. 1865는 국민 와인이라 불릴 만큼 베스트셀러이지만 마셔보니 내 취향이 아니었다. 1865와 같은 와인 회사의 제품이라 시데랄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우연히 구입해서 마시고 의외로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마트에서 종종 할인가 35,000원에 나온다. 와인서쳐로 확인한 해외 평균 거래가가 34,668원(12월 22일 기준, 세금 제외)이니 세금 포함 35,000원이면 매우 좋은 가격이다.
 

시데랄 1865 와인으로 유명한 산 페드로San Pedro 사의 와인이다. ⓒ 임승수

 
시데랄은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을 기본으로 해서 몇몇 품종을 섞은 칠레산 레드 와인이다. 일반적으로 칠레 와인은 특유의 풀맛 느낌이 있다. 이 맛이 자칫 거칠고 투박한 느낌을 주기 쉬운데, 시데랄은 예상과 달리 세련되고 우아한 맛이 꽤 만족스러웠다.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20대 중후반의 순박하고 정직한 남성이 양복을 차려입고 힘찬 걸음으로 첫 출근을 하는 느낌이랄까. 호주산 와규 치마살 한 점을 흡입한 후 다소 느끼한 입안을 이 와인으로 헹구면 대략 1+1=2.6 정도의 시너지를 경험할 수 있다.

4위, 투 핸즈 엔젤스 쉐어 쉬라즈(Two Hands Angels' Share Shiraz)

투 핸즈Two Hands는 호주 와인 회사명, Angels' Share는 제품명, 쉬라즈Shiraz는 포도 품종이다. 한식은 양념이 강해 와인과 맞추기 쉽지 않은데, 쉬라즈(쉬라)는 불고기 같은 음식과도 잘 어울린다. 쉬라즈(쉬라)가 여타 품종보다 맛과 향이 강해 양념 맛을 뚫고 존재감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김치와 어울리는 것은 아니니 오해 없기를. 전반적으로 육류와 잘 어울린다.
 

투 핸즈 엔젤스 쉐어 쉬라즈 호주 쉬라즈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다. ⓒ 임승수

 
와인서쳐 해외 평균 거래가는 33,161원(12월 22일 기준, 세금 제외)이니 마트에서 삼만 원대로 살 수 있다면 상당히 훌륭한 가격이다. 사만 원에 사도 그렇게 나쁜 가격은 아니다(사실 내가 사만 원에 샀다). 페이스북 친구 중에는 이만 원대에 샀다고 자랑하는 분도 있던데 무척 드문 경우다(사실은 배가 아프다).

돼지고기 항정살을 노릇하게 구워서 베어 문 후, 준비된 파채를 오뚜기 양파절임 소스에 담갔다가 입에 넣고 저작운동에 들어간다. 양파절임 소스와 파채가 항정살의 느끼함을 웬만큼 잡아주지만 뭔가 아쉽다 싶을 때 이 와인을 한 모금 마신다. '맛있다'를 연발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3위, 뱅상 르구 오뜨 꼬뜨 드 뉘 루즈 레 보 몽 뤼소(Vincent Legou Hautes Cotes de Nuits Rouge Les Beaux Monts Lussots)

아따! 와인 이름 한 번 길다. 뱅상 르구Vincent Legou는 와인 회사명, 오뜨 꼬뜨 드 뉘Hautes Cotes de Nuits는 프랑스 부르고뉴의 와인 생산지, 루즈Rouge는 레드 와인이라는 의미, 레 보 몽 뤼소Les Beaux Monts Lussots는 포도밭 이름이다.

피노 누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인데, 프랑스 부르고뉴 지역에서는 대부분 피노 누아를 재배한다. 피노 누아는 잘 만들면 아찔할 정도로 우아하고 세련된 와인이 된다. 섬세한 품종이라 토양, 기후, 양조자의 기술에 따라 맛이 천양지차다.

예민하고 재배하기 까다로워 여타 품종의 와인보다 고가인데, 세계에서 제일 비싼 와인인 로마네 꽁띠가 피노 누아로 만든 와인이다. 부르고뉴에 맛들이면 패가망신한다는 얘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뱅상 르구 오뜨 꼬뜨 드 뉘 루즈 레 보 몽 뤼소 프랑스 부르고뉴 피노 누아 품종으로 만든 와인이다. ⓒ 임승수

 
이 뱅상 르구 어쩌구 저쩌구 와인을 마트에서 35,000원에 파는데 와인서쳐로 확인한 해외 평균 거래가는 42,204원(12월 22일 기준, 세금 제외)이다. (이 와인의 경우 평균 가격 계산에 사용된 표본이 좀 적은 느낌은 있지만 어쨌든) 국내 판매가가 무려 해외 평균 거래가 미만이다.

나는 그동안 이 와인을 여러 병 마셨다. 왜일까? 너무나 뛰어난 가성비 때문이다. 이 정도로 가성비 뛰어난 부르고뉴 와인은 찾기 어렵다. 피노 누아 와인은 소고기뿐만 아니라 기름기 많은 닭고기와도 잘 어울린다. 특유의 신맛이 기름기 가득한 맛을 잘 잡아준다.

의외로 버섯과도 궁합도 좋은데, 양송이에 소금을 뿌리고 프라이팬에 잘 구워서 이 와인과 함께 먹으면 버섯 특유의 흙냄새와 와인이 만들어내는 하모니에 취해 만화 <신의 물방울> 주인공처럼 '오!'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된다.

2위, 앙드레 클루에 브륏 나뛰르 실버(André Clouet Brut Nature Silver)

연말연시 분위기라면 기포가 뽀글뽀글 올라오는 스파클링 와인이 멋들어진다. 기왕이면 프랑스 샹파뉴 지방의 스파클링 와인인 '샴페인'이 맛도 뛰어나고 제격이다. 하지만 샴페인은 비싸다. 그것도 많이 비싸다. 그런 이유로 여타 스파클링 와인을 대체재로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앙드레 클루에 브륏 나뛰르 실버 샴페인이 마트에서 35,000원에 보인다면 냉큼 여러 병 구매해도 좋다. 와인서쳐 해외 평균 거래가는 52,756원(12월 22일 기준, 세금 제외)인데, 국내에서 간간이 세금 포함 35,000원에 판매하니 이 무슨 김혜자도 울고 갈 가격이란 말인가.
 

앙드레 클루에 브륏 나뛰르 실버 프랑스 상파뉴 지방의 스파클링 와인을 '샴페인'이라 부른다. ⓒ 임승수

 
앙드레 클루에André Clouet는 회사명, 브륏 나뛰르Brut Nature는 달지 않은 샴페인이라는 의미, 실버Silver는 제품명이다. 샴페인은 여러 음식과 두루 잘 어울리지만 그중 어패류와 함께 마시면 특히 궁합이 좋다.

연말연시인 만큼 마트에서 이만 원대의 캐나다산 랍스터를 쪄 와서 샴페인과 곁들이면 1+1=3 이상의 놀라운 시너지를 경험할 수 있다. 랍스터 꼬릿살을 요만큼 잘라내어 스위트 칠리소스에 찍어 입에 넣은 후, 적당한 시점에 샴페인을 주입하면 최소 극락행 보장이다. 일 년에 한 번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재벌이 안 부럽다.

1위, 쉐이퍼 원 포인트 파이브 카베르네 소비뇽(Shafer One Point Five Cabernet Sauvignon)

쉐이퍼Shafer는 와인 회사명, 원 포인트 파이브One Point Five는 제품명,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은 포도 품종이다. 이 와인은 삼만 원대가 아니다. 와인서쳐 해외 평균 거래가가 114,555원(12월 22일 기준, 세금 제외)이며 국내에서는 장터 할인가 150,000원 내외로 판매된다.

왜 뜬금없이 이런 비싼 와인이 1위로 등장했느냐? 너무 맛있기 때문이다.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으로는 프랑스 보르도와 어깨를 견주는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거기서도 손꼽히는 스택스 립 지구Stags Leap District의 와인이다. 와인으로 가산 탕진하는 나도 비싸서 몇 번 못 마셔봤지만, 처음 마셨을 때 깜짝 놀랐던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쉐이퍼 원 포인트 파이브 카베르네 소비뇽 카베르네 소비뇽 와인으로는 프랑스 보르도와 어깨를 견주는 미국 캘리포니아 나파밸리. 거기서도 손꼽히는 스택스 립 지구Stags Leap District의 와인이다. ⓒ 임승수

 
미국 나파밸리 와인 특유의 커피향과 연유향, 그리고 폭발적인 과실향이 마시는 사람의 뇌 속을 와인의 맛과 향으로 가득 채운다. 어떻게 나를 마시는데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호통치는 것 같다.

기억에 남을 연말연시를 보내고 싶다면, 특별한 와인을 특별한 사람과 마시고 싶다면, 이 와인을 추천한다. 이 정도의 와인이라면 가벼운 치즈만 곁들이며 와인의 맛과 향 그 자체에 집중하는 것도 좋다(하지만 나는 역시 스테이크를 흡입하련다).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인데, 하루쯤 부자들 마시는 것 마셔본다고 인생 어떻게 되겠는가. 원래 연말연시는 그렇게 보낼 의무가 있다. 나도 조만간 올해 마지막 의무를 사랑하는 가족과 성실하게 수행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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