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09 20:03최종 업데이트 20.02.09 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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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대전 산내 골령골 민간인 학살 기록 사진. ⓒ 미국립문서보관소


칠흑같이 어두운 밤, 앞장선 이들은 구구식 장총을 든 공격조 10명의 무리였다. 공격조는 망원경까지 갖고 있어 제법 무장대의 꼴을 갖추었다. 30여 발자국 뒤처져 공격조를 뒤따르는 이들은 비무장대원들로 20여 명이었다. 비무장대원들은 가슴이 콩당거려, 내딛는 발걸음이 허공을 향해 둥둥 떠가는 듯했다.

지서 후문으로 다가간 공격조 대장의 "공격" 소리와 함께 구구식 장총의 총구에서 불이 뿜어져 나갔다. 비무장대원인 응원조는 "와와"하는 고함소리로 분위기를 돋궜다. 순간 보초를 서던 경찰 1명이 공격조의 총탄에 쓰러졌다. 신탄진지서를 습격한 이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고 경찰들의 기세는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지난 1차 습격사건으로 곤욕을 치른 경찰의 대응은 완강했다. 경찰관 5명과 의용소방대원 5명이 전부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방어는 만만치 않았다. 결국 두 시간여의 공방 끝에 남로당 무장대는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무장대원 4명이 생포되고, 구구식 장총 1정, 망원경 한 개를 노획했다. 이 과정에 입초를 섰던 경찰관 한 명이 사망했다.(충청남도경찰국 <충남경찰사 上> 참고)

충남 대덕군 북면 신탄진지서 습격사건은 돌출적인 사건이 아니었다. 남로당이 그 해 있을 5.10 단독선거(제헌의회 선거)를 저지하기 위해, '3.1절 봉기투쟁'을 전국적으로 진행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8년 3월 7일과 15일 두 차례 신탄진지서 습격사건이 발생했다.

이 습격사건에 충남 대덕군 북면 갈전리 사람들이 비무장대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들 중 갈전 1구 음짓말 고연수는 사건 직후 검거되어 대전형무소에 수감되었고, 움짓말 고광선, 고태준, 변판성과 양짓말 김상술, 고영근은 후일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되어, 6.25 직후 대전 산내에서 학살되었다.

'교회야 무너져라!'
 

중학교 시절의 고정열 ⓒ 박만순

 교회 흙 담벼락에 약간 홈이 났다. 그도 그럴 것이 한 소녀가 몇 시간째 나무꼬챙이로 흙을 긁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회 담벼락은 끄덕도 안했다. 13세 소녀가 나무꼬챙이로 흙 담벼락을 긁어댄다고 해서, 그곳에 얼마나 흠이 나겠는가.

"엄마 나 중학교 보내 줘" "니 오빠 중학교 가르치는 것도 심들어 죽겄는디, 뭔 소리하구 있어!" 소녀는 오빠만 되고 나는 왜 안 된다는 건지 분하기만 했다. 그런데 왜 13세 소녀 고정열(1950년생)은 죄 없는 교회 담벼락에 분풀이를 하고 있는가? 엄마가 자신에게 시내 중학교 대신 교회 안의 고등공민학교를 다니라고 했기 때문이다.

고등공민학교는 해방 후에 정규 교육기관의 부족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만든 준 교육기관이다. 즉,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중학교 교육과정을 실시하는 학교를 말한다. 교회에서 운영하는 고등공민학교는 전교생 이래봐야 20명에 불과했다. 그러다 보니 고정열 눈에 교회 안에 있는 공민학교가 눈에 차지 않았다.

'에이 이 놈의 교회가 없었으면 시내로 중학교를 갈 수 있었을 텐데'라며 교회 담벼락에 분풀이를 한 것이다. 사실 고정열(1950년생)은 삼호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똑똑이'로 소문이 났었다. 자신보다 공부를 못했던 친구도 중학교에 진급했다는 사실을 들었을 때 자존심 센 소녀 고정열 마음이 어땠을지 능히 짐작이 간다.

고정열은 방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침묵시위'를 벌였다. 그렇다고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교회에 갔다. 성경, 영어, 국어, 수학을 공부했는데, 시간이 가장 많이 배정된 성경공부시간이 죽을 맛이었다. 다니기 싫은 학교에 다니다 보니까 공부가 절로 싫어졌다. 공민학교 수업시간 대부분은 눈을 감고 있다. 

고정열은 신탄진지서 습격사건으로 한국전쟁 직후 대전 산내에서 학살된 고광선의 유복녀이다. 그러다 보니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어려운 소녀시절을 보내야 했다.

지옥같았던 삶

신탄진 갈전리 음짓말에 살던 고순례(1947년생)는 초등학교 동창인 고정열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았다. 마찬가지로 6.25 때 아버지 고연수를 잃은 그녀는 중·고등학교 진학은 고사하고, 초등학교도 4학년밖에 다니지 못했다. 아버지가 없었기에 월사금(수업료)을 감당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초등학교도 집안 형편이 어려워 친구들보다 3년이나 늦게 갔다. 그래서 세 살 어린 고정열과 동창이 됐다. 그런 학교도 결국 졸업을 못했다. 아빠가 6.25때 죽고, 엄마가 집에서 쫓겨나듯이 개가를 하면서 그렇게 됐다. 결국 할아버지·할머니와 살게 되었는데, 매 순간이 지옥이었다. 손녀를 늘 귀여워해 주는 할아버지와는 달리 할머니는 아들의 죽음을 손녀 탓으로 돌리며 끊임없이 구박했다.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애증관계였던 할아버지·할머니가 치매와 중풍으로 몸져 누웠다. 단 칸 방에서 할아버지는 아랫목에, 할머니는 윗목에 누워 지냈다. 부모가 없고, 도와주는 친인척도 없는 고순례에게 학교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는 고사하고 매일 끼니를 잇는 것이 고민거리의 전부였다.

그런데 먹을거리가 생겨도 걱정이었다. 누워 있는 할아버지·할머니가 변을 가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 겨울에 빨래감을 들고 개울가로 가면 꽁꽁 언 개울은 돌멩이를 던져도 쉽게 깨지지 않았다. 몇 차례 돌을 던져야 얼음이 깨졌다. 바지를 얼음물에 넣는 순간 바지가 얼어 뻣뻣해졌다. 동시에 손도 굳었다. 손은 전기충격을 가한 것처럼 마비가 되었다.

하지만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었다. 빨래를 하는 도중에 몇 차례나 손을 '호호' 불었지만 손등은 갈라지고 피가 나왔다. 눈물과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로 빨래를 하다보면 죽고 싶은 생각이 절로 났다. 그런데 할아버지·할머니를 두고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빨래감을 이고 집으로 돌아오면 전신에 힘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 몇 시간이 지나도 언 몸은 녹지 않았다. 더군다나 단칸방에 군불을 땐 것이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올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순례는 소녀 시절 내내 한겨울에도 군불 한 번 때지 못하고 찬 방에서 지내야 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
 

고정열이 운영하던 의상실 ⓒ 박만순

충남 홍성군의 삼륙중학교를 나와 대전에 있는 기술고를 졸업한 고정열은 서울에 올라가 식모생활을 했다. 그녀는 그 후 양장점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삼촌이 영등포 당산동에서 양장점을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몇 년 후 대전역 앞 중동에서 양장점 개업을 했다. 양장점이라 하지만 모습은 초라했다. 점포 한 칸에 의상실을 꾸미고, 구석에 침대 하나를 들여놨다. 점포 겸 신접살이 방이었다.

그런데 양장점 생활에 재미를 한창 들 무렵이었다. 침대에 누워 있는데, 커다란 쥐가 어슬렁거린 것이다. 기겁을 했다. 무섭다기보다 징그러웠던 것이다. 또 한 번은 집에 불이 났다. 남편이 상가집에 갔을 때, 집에 연기가 나 큰 일을 치를 뻔한 것이다. 모두 임신했을 때 벌어진 일이다. 이 일로 뱃속에 있던 아기가 놀란 것인지 아들은 청각장애를 안고 태어났다. 

하늘이 무너지는 아픔 속에서도 고정열은 정신을 차렸다. 아이가 6살 때 서울에 있는 구화학교를 보내, 언어치료를 하고, 초등학교부터는 일반학교에 갔다. 대학교까지 무사하게 졸업했다. 이 과정에서 아들은 엄청난 노력을 했다. 말은 어느 정도 했지만, 귀가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선생님이 칠판에 판서한 내용을 무작정 외웠다. 그렇게 성장한 아들은 현재 40대 후반의 어엿한 직장인이 되었다.

유전자 감식

아버지가 산내에서 학살당한 뒤 10대에 늘 죽음을 생각했던 고순례(74세, 대전광역시 서구 도마동)는 아버지의 죽음을 명예 회복했다. 그런데 피해배상소송을 하면서, 그녀는 마음의 상처를 또 한 번 입었다.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아버지 고연수의 학살을 진실규명했지만, 사법부는 고순례가 고연수의 딸이란 것을 입증할 수 없다며 기각 처리했다.

왜냐하면 고연수가 아내 배갑순과 혼인신고도 하기 전에 사망했기에, 딸 고순례는 할아버지의 딸로 호적에 등재되었다. 고순례는 유전자감식을 통해 배갑순의 딸임을 증명하고, 마을 사람들의 집단 보증을 통해 자신이 고연수의 딸임을 사법부에 증명해야 했다.

국가폭력으로 험난한 소녀시절을 보내야 했던 고정열과 고순례의 삶은 고통스럽고 외로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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