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20 19:36최종 업데이트 20.02.20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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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3월 15일 프랑스에선 지방자치단체장 선거가 있다. 우리에게 4월 총선이 현정권에 대한 중간 평가의 의미를 갖는다면, 프랑스에선 지자체장 선거가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가장 격렬한 격전지는 당연히 파리다. 현 시장인 사회당의 안 이달고가 선두를 달리고 있고, 당선은 유력해 보인다. 지난 2014년 당선 이후, 녹색 파리 만들기에 주력해 왔던 안 이달고 시장은 여전히 에콜로지 파리와, 전체 주거의 25% 사회임대주택화라는 비전을 제시하며 일관된 목표를 향해 매진중이다. 지난 대선 이후 사회당은 존재감을 잃은 군소 정당으로 몰락했지만, 파리만큼은 2001년 이후 지금까지 20년째 사회당의 아성이다.

선거 전에는 종종 극적인 드라마가 펼쳐지곤 한다. 2012년 프랑스 대선의 가장 극적인 장면이 대선 1년전 뉴욕 소피텔호텔에서 벌인 추행으로 유력한 대권 후보에서 나락으로 떨어진 도모니크 스트로스 칸 사건이었다면, 이번 선거에선 마크롱 정당 LREM의 파리시장 후보 벤자민 그리보(Benjamin Griveaux)가 그 계보를 잇고 있다. 칸 전 총재가 대권주자이던 무렵, 그리보가 그의 최측근이었던 사실은 기묘한 우연이기도 하다.
 

지난 2017년 11월 25일 프랑스 정부 대변인으로 새로 임명될 당시의 벤자민 그리보. ⓒ 연합뉴스/EPA

 
2015년부터는 마크롱 측근이 되어, 하원의원, 정부 대변인, 정무차관 등의 경력을 밟아온 벤자민 그리보는 2월초 자신의 섹스비디오가 인터넷 상에 유출된 이후, SNS를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가족을 보호하기 위한 선택"이라며 2월 14일 파리시장 후보를 사퇴했다.

그는 인스타그램을 통해 소통하게 된 여성에게 2018년 자신의 섹스비디오를 보냈고, 이후 여성의 남자친구인 러시아 행위예술가 피오트로 파블렌스키가 그 영상을 인터넷에 퍼뜨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치학과 학생이기도 한 그녀는 파리2대학에서 라디오 방송국을 운영하며, 방송 프로그램을 위해 여러 정치인들에게 인터뷰를 청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2017년 프랑스로 정치적 망명한 러시아 행위예술가-활동가 피요트르 파블렌스키(Piotr Pavlenski, 35세)는 비디오를 인터넷에 유포한 사람이 자신이며 "좋은 아빠, 충실한 남편을 가장하는 정치인의 위선을 폭로하기 위해 비디오를 유포했다"고 자신의 동기를 설명했다.

문제적 행위예술가, 피요트르 파블렌스키
 

러시아 행위예술가 피요트르 파블렌스키의 행위예술 Suture(봉합), 2012 러시아의 페미니스트 펑크락 그룹을 구속한 러시아 정부의 행위에 항의하며 벌인 퍼포먼스 ⓒ piotre pavlensky

 
선거철 흔히 준동하는 정치인의 섹스 스캔들인가 싶었던 이번 사건은, 평범하지 않은 인상의 러시아 행위예술가의 등장으로 지금까지 보아왔던 스토리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새 장르를 열었다. 이른바 정적들이 선거판에서 벌이는 막전막후의 혈투를 통해서 유력후보가 제거된 케이스가 아니라, "정치인의 위선의 가면을 벗기겠다"는 아나키스트 활동가이자 행위예술가의 사명감이 사건의 동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러시아의 행위예술가 피요트르 파블렌스키는 이미 러시아에서도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퍼포먼스들로 유명세를 떨쳐왔다. 그의 행위예술은 공공장소에서 자신의 벗은 몸을 자해하는 방식을 이용한다. 그렇게 정치 권력의 메커니즘을 폭로하는 것이 주를 이룬다.

그가 처음으로 대중 앞에 자신을 알린 행위예술은 2012년 진행한 <suture(봉합)> 이란 퍼포먼스였다. 러시아의 페미니스트 펑크 락 그룹(Pussy Riot)이 금지된 공연을 교회 안에서 강행한 뒤, 2년형을 선고받은 것에 항의하고,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러시아 사회를 폭로하면서 자신의 입술을 꿰매는 충격적 행위예술을 행한 바 있다.

2013년엔 러시아 정부의 억압적인 법체계에 신음하는 인간을 표현하기 위해, 오색 철조망으로 만든 둥지 안에 벗은 몸으로 들어가 몸을 웅크리고 있는 퍼포먼스를 의회 앞에서 진행하기도 했다. 모스크바 붉은 광장에 나신으로 앉아 자신의 고환을 못으로 길 바닥에 박고 앉아 있는 행위로 러시아 사회의 정치적 무관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프랑스은행에서 행한 파블렌스키의 행위예술 조명(Eclairage), 2017, 파리 그는 바스티유 광장 한켠에 있는 프랑스은행(Banque de France)에 불을 지르는 행위를 통해 <조명>이라는 이름의 퍼포먼스를 진행했고, 이 행동으로 1년간 투옥되었던 바 있다. ⓒ piotre pavlensky

 
2017년 여러 가지 혐의로 수사를 받던 그는 잠시 석방된 틈을 이용, 프랑스로 망명하여 정치적 난민 지위를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난민이 되었던 바로 그해 10월, 파리 바스티유 광장에 있는 프랑스은행 건물에 방화를 저지른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가 2018년 말 석방되었다. 그의 방화 또한 <조명>이라 명명된 행위 예술의 하나였다.

그의 애인이자 긴밀한 협력자가 된 여대생 알렉산드라와의 만남은 그의 출소 직후 이뤄진다. 러시아에 관심 많은 정치학도이자 여유로운 부르주아 집안의 자녀인 알렉산드라는 자신이 그리보로부터 섹스 비디오를 받아 저장해 두었던 것은 맞지만, 비디오 유포에는 가담하지 않았다고 진술했다. 이틀간 조사를 받고 풀려난 파블렌스키는 언론을 향해 자신의 폭로 행위에 만족하며, 자신이 개설한 pornopolitique.com 사이트를 폐쇄한 프랑스 정부를 비난하는 목소리를 높였다. "프랑스는 자유의 나라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포르노폴리틱 프로젝트를 계속 이어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기도 했다.
 
"한 러시아 활동가의 미친 뇌에서 튀어나온 악몽."

<르몽드>는 이번 섹스 비디오 사건을 이렇게 표현했다. 대부분의 프랑스 언론들이 이번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은 지극히 부정적이다. 언론들은 프랑스 정치판을 미국식으로 더럽히는 추악한 행위라며 러시아 예술가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다. 강제적 성행위에 대한 사법적 고발이 아니라, 개인간에 오고간 섹스 비디오가 정치에 개입될 이유가 전혀 없으며 누구에게나 지켜야 할 사생활이 있다는 것이다. 이는 사건을 바라보는 전반적 여론이기도 하다.

사건 직전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 사회당의 이달고는 23%, 공화당의 다티는 20% 마크롱 정당의 그리보는 16%의 지지율을 보이고 있었고, 그의 동역 이전 공약은 유권자의 관심보다는 비웃음을 더 많이 사고 있었다. 굳이 이런 사건이 아니어도 당선될 가능성이 거의 없던 그에게, 오히려 괴이한 잡범에게 희생된 정치인의 이미지를 만들어주었다는 비난도 들려온다.

그런가하면 대중 위에 군림하는 정치인들의 추잡한 모습을 폭로해줘서 고맙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정부 대변인이자 마크롱의 최측근이었던 그에 대한 공격은 마크롱과 현집권 세력에 대한 공격으로도 간주되기 때문에 악재로 뒤덮인 집권당 LREM에게 또 하나의 펀치를 날렸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LREM은 현 보건부 장관 뷔장으로 즉각 파리 시장 후보를 교체하였으나, 그녀의 초고속 선거캠페인이 선거전을 승리로 이끌 것으로 믿는 사람은 없다.

존엄한 선거를 치를 권리
 
선거철은 정치인들이 유일하게 유권자의 눈치를 보는 계절이며 유권자가 정치인들 앞에서 큰 소리로 꾸짖고 요구할 수 있는 시간이다. 벤자민 그리보는 파리시장 후보 사퇴 연설에서 "파리 시민들은 존엄한 선거를 치를 권리가 있다"는 말로 자신이 택한 사퇴의 의미를 포장했다. 진흙탕의 인신 공격도, 무차별 폭로전도, 겉과 속이 판이한 모습을 한 위선의 가면도 존엄한 선거를 방해하는 요소다.

파리시민들이 가져야 할 존엄한 선거의 권리를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는 조금 더 일찍 그 사실을 고려했어야 했다. 정당정치의 결정적 순간인 선거 자체가 권력을 향한 욕망의 포르노그라피이며 바로 그자들이 주인공이 되는 포르노그라피 동영상으로 그들을 조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파블렌스키의 작전은 일단 성공한 셈이다.

"사람들이 얼마나 알량한 인물들이 자신들을 통치하고 있는지 안다면, 그들은 좀 더 빨리 봉기할 것이다."

프랑스의 정치가 탈레랑의 말처럼, 군림하는 자들의 민낯은 일찍 벗겨질수록 판단이 쉬워진다. 위선의 가면 벗기기와 모략과 정보의 조작 사이 그 어딘가에 '선거'와 '존엄'이 만날 수 있는 지대는 존재하는 걸까? 적어도 그 불가능한 목표에 도전하는 정치인, 정치집단을 유권자는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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