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15 10:56최종 업데이트 20.04.15 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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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대 국회의원을 뽑는 4.15 총선 투표일인 15일 부산의 한 선거구 투표소에서 유권자들이 한 표를 행사하고 있다. ⓒ 김보성

 
3월을 하루 남긴 지난 3월 30일 아침,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로 이메일 하나가 날아왔다. 
 
2020. 4. 15. 실시하는 제21대 국회의원선거에서 41개 재외공관에 대하여 재외선거사무 중지 결정을 하였기에 그 내용과 투표방법(귀국투표 포함)을 첨부와 같이 안내하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올게 왔다 싶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투표는 할 수 있다 했다. 내가 사는 미국 뉴저지를 비롯한 임시 투표소는 폐쇄하지만 맨해튼 뉴욕 총영사관에선 투표 업무를 한다고 했다. 아침 일찍 서두를 생각으로 동선도 다 짜 놨다. 설마 그곳마저 닫는다는 말이 아니길 빌며 조심스레 첨부 파일을 열었다. 

파일명: 재외선거사무 중지 결정 공관

파일엔 선거가 취소된 공관이 나열되어 있었다. 빽빽이 그려진 표의 중간엔 12개의 공관을 거느린 '미국'이 있었다. 내가 가려 했던 '주 뉴욕 대한민국 총영사관'을 포함한 12개 미국 재외공관들 모두 투표 업무를 하지 않는단다. 사회적 재난(감염병)에 해당하는 부득이한 사유로... 중지를 결정했단다. 

투표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다. 메일에 의하면, 시차를 감안해 편지를 받은 당일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귀국하면 된다. 그래서 관할 선관위를 방문, 귀국 사실 증명서를 첨부한 귀국 투표 신고서를 제출하면 선거 당일 주소지 투표소에서 투표할 수 있다.

하지만 뉴욕과 서울이 광주 부산 거리도 아닌 이상, 나는 결코 투표할 수 없다는 잔인한 알림이었다. 

한 번도 거르지 않았던 투표

내가 첫 투표를 한 건 1992년 14대 총선 때였다. 당시 나는 장충동에 있는 한 회사의 고졸 직원이었다. 588번 버스를 타면 화곡동에서 회사까지 빠르면 1시간 반, 막히는 날은 2시간 정도 걸리는 긴 통근을 했다.

꽃샘추위가 매서웠던 이른 아침, 버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뛰고 있는 내게 누가 쭈뼛하며 명함 하나를 건넸다. 버스에 올라 자세히 보니 일주일 뒤 있을 국회의원 선거 후보자 명함이었다. 내 생애 첫 선거였던지라 나름 뉴스며 신문을 열심히 읽고 있던 참이었다.

이 사람이면 괜찮겠다 생각했던 이라 반가웠다. 버스 안에서 손바닥만 한 명함의 앞 뒷면을 꼼꼼히 읽었다. 그런데 회사에 도착해서 생각이 좀 바뀌었다. 투표만 하는 건 너무 심심하다 싶었다. 그래서 나는 그 명함에 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강서구 화곡동 주민인데요... 휴가 내고 하루 정도 자원봉사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언제가 제일 바쁘신가요?"

전화를 받은 사람이 우물쭈물한다. 내 말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그 사무실에서 제일 바쁜 날이 언제냐고요. 제가 직장인인데 미리 휴가를 내야 되거든요."

이런 전화는 처음인 듯 수화기를 막고 몇 사람과 한참을 얘기를 하더니 '토요일'이라고 한다. 주 6일 근무하던 당시에 토요일 휴가는 좀 눈치 보이는 일이었지만 나는 용감히 휴가계를 냈다. 사유는 '선거 자원봉사'. 

토요일 이른 새벽, 정류장 건너편 건물 꼭대기 층에 있는 선거 사무실을 향했다. 창문에 커다랗게 붙여진 이름은 오다가다 보았지만 내 발로 찾아가는 게 영 어색했다. 

"저 자원봉사인데요." 
"네?" 
"자원봉사자요, 오늘 제일 바쁜 날이라고 하셔서..." 


서로서로 친해 보이는 사람들 사이에 나도 그들도 매우 어색했지만 도로 나갈 수도 없었다. 뻘쭘하니 한참 동안을 구석에 앉아 있으니 초등학교 동창도 지나가고 중학교 선배도 보였다. 별로 친하진 않았지만 덕분에 일정에 합류할 수 있었다.

오전엔 명함 돌리기, 오후엔 선거 유세장, 그리고 밤엔 집집마다 공보물 꽂아놓는다. 동네 학교 운동장에서 하는 후보 유세에 포스터를 들고 연호하는 일은 매우 민망했다. 옆 집 아줌마, 세탁소 아저씨가 아는 체하며 지나갔다. 후보에 대해 물어보는 이도 있었고 티 나게 불쾌해하는 사람도 있었다.

밤 10시가 넘어 마지막 전단지를 다 돌리고 집에 가려는데, 누가 나를 부른다. 일당을 받아가란다. 5000원이란 말에 맘이 동했지만 나름 시크하게 대답했다. 

"전 자원봉사자거든요. 돈은 됐어요~"

다음 날 일요일 밤까지 난 우리 동네 이런 곳이 있나 싶게 구석구석을 다녔다. 후보도 경험 없는 초선이라 좌충우돌 선거 캠프에서 주말을 보냈다. 월요일 출근 버스를 타러 뛰어가는데, 지난번 나에게 명함을 준 친구가 여전히 쭈뼛하니 서 있다. 몇 장을 받아 정류장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한 장씩 건넸다. 그중 누군가 나같이 선거 사무실에 전화를 할 것 같았다. 

며칠 후 난 내 생애 첫 투표를 했다. 기다린 종이 위 한편에 도장을 꾹 눌러 찍었다. 약간 울컥한 마음이 들었다. 촌스럽지만 비로소 대한민국 국민이 된 기분이었다. 같이 고생했던 사람들과 개표방송을 보고 싶었지만 연락처도 없었고 다음날 출근도 해야 했다. 엎치락 뒤치락하던 판세에서 내가 찍은 후보가 당선됐다는 소식을 듣고 잠이 들었다. 그날 꿈자리가 매우 달았던 기억이다. 

그 이후 난 한 번도 투표를 거른 적이 없다. 시간이 되면 자원봉사를 했고 그도 안되면 후원금이나 편지 쓰기 같은 걸로 힘을 보탰다. 최근엔 SNS로 응원을 했다. 그리고 아무리 멀어도 바빠도 꼭 투표했다.

그건 미국에 나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에 살던 미 중부의 시골 도시엔 영사관이 없어 차로 4시간을 가야 했지만 기꺼이 감내했다. 그리고 투표 날엔 평생 하지 않던 기도를 한다. 기표소에 들어가서 한번, 도장을 찍고 호호 불며 한번, 그리고 투표함에 내 소중한 표를 넣기 전에 큰 숨을 쉬면서 말이다.

내가 찍은 이 후보가 좋은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빈다. 그를 위해 귀한 시간을, 젊음을, 열정을 나누는 사람들을 실망시키지 말아 달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날 내게 투표소는 신성한 성당이고 교회고 사찰이다. 

코로나가 앗아간 나의 소중한 한 표
 

미국 뉴욕 주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자택대피령을 내림에 따라 평소 사람들로 붐비는 뉴욕 타임스스퀘어가 지난 3월 23일(현지시간) 아침 거의 텅 빈 채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 연합뉴스

 
해외에서 21대 총선 투표를 신청한 재외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75개국 17만1959명이다. 그중 나처럼 공관이 폐쇄돼 투표를 할 수 없게 된 이는 8만8087명으로 전체 신청자의 51.2%다. 미국은 3월 30일 폐쇄 결정문을 받았지만 튀니지, 과테말라, 멕시코의 경우 4월 4일에나 결정, 통보됐다. 뉴욕의 나보다 더 억울했을 것 같다. 이런 불가항력엔 우편 투표나 전자 투표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열심히 찾아봤지만 어디에도 좋은 소식은 없었다. 

그래서 오늘은 내 생애 첫 무투표 날이다. 해외에 살면서 그 어느 때보다 고맙고 자랑스러운 고국에 대한 투표여서 더 속상하다. 코로나로 1만2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나온 나라에 살면서 어떡하든 참가하고 싶었던 한 표라서 더 아쉽다. 정치가, 투표가, 지도자가 왜 중요한지 절절히 느끼는 와중이라 더 섭섭하다. 30~40년 객지 생활을 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은 처음이라는 얘기를 듣는 요즘이라 그 아쉬움은 더 크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구촌을 강타한 코로나바이러스라는 무서운 변수 앞에 말이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전국적 선거를 치르는 첫 번째 나라이기에 무사히 마치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나만의 투표 자원봉사를 하는 중이다. 한국의 지인들에게 안부 전화를 거는 중이다.  

"네 저희는 집에만 있어요. 너무 걱정은 마세요. 뉴욕은 아무도 못 나가요. 여기 뉴스에 맨날 한국 소식 나와요. 저희 대신 꼭 좋은 분 찍어 주세요."

외국에서 보면 더 잘 보인다. 어느 나라 유권자보다 수준 높고 현명한 이들은 분명 더 안전하고 당당한 나라를 만들어 낼 것이다. 그래서 현대사에 거대한 전환점을 만들어 낼 것이다. 역사를 후퇴시키지 않고 느리지만 꿋꿋이 앞으로 전진시킬 것이다. 그 거대한 전환점에 내 한 표를 보태지 못해 아쉽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파고를 멀리서 지켜보는 마음은 더 떨리고 흥분된다. 부디 오늘 함께 못하는 8만8087명의 재외 유권자를 대신해 한 표를 행사해 주시기 바란다. 지금처럼 자랑스럽고 당당한 좋은 일꾼, 참된 정치인을 뽑아 주시길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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