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20 14:39최종 업데이트 20.04.24 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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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하는 요즘입니다. 코로나19의 기세가 한풀 꺾였다곤 하지만, 그래도 아직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합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이중고를 겪는 이들도 무수합니다.

새 학기 책을 받아가라는 연락이 와, 엊그제 딸아이 초등학교에 다녀왔습니다. 서로 마스크를 쓰고 있어 얼굴을 알 수 없는 담임 선생님과 눈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시끌벅적 어린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넘쳐나야 할 교실은 대낮인데도 어둠이 내린 듯 그저 적막하기만 했습니다. 아직 안심할 단계가 아님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니 처음엔 자고, 먹고, TV 보는 데 시간을 썼는데, 그것도 길어지니 뭔가 찾게 되더라, 그러다 책을 펼치게 되고, 또 그러다 보니 뭔가 끄적거리게 되더라는 사람들이 늘고 있습니다.

나이와 성별, 하는 일과 상관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자면 누구나 매일 속을 끓이게 됩니다. 마치 얇은 돌판 한 장 한 장을 가장 깊은 곳부터 쌓아 올리는 것만 같습니다. 얼마나 수시로 잘 비워내느냐는 전적으로 각자의 몫입니다. 얇아서 처음엔 있는지조차 몰랐던 그것이 켜켜이 쌓이면, 유연해야 할 사고가 점점 뻣뻣해지다 이내 무거워집니다. 낯빛도 같이 어두워져, 금세 주변 모두가 알아채게 됩니다.

돌판 무게에 짓눌려 나를 잃어버리지 않으려면,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스트레스 해소법이 있어야 합니다. 운동도 좋고 독서도 좋습니다. 아무 쓸 것이나 손에 쥐고 종이에 낙서라도 해보세요. 그것도 좋습니다.

뭔가 다른 필기감... "제가 예민한 걸까요?"

"제가 지나치게 예민한 걸까요? 어딘가 분명 아니다 싶은데 원인을 모르겠어요. 쓰면 잉크가 나오긴 하지만 너무 거칠어요. 갖고 있는 다른 펜들은 이런 느낌이 아니거든요. 그냥 계속 쓰다 보면 나아질까 싶다가도, 어쩐지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서요. 제가 이상한 걸까요?"

필기감이 매끄럽지 않다고 느낀 어느 분께서 제게 문의하신 내용입니다. 그분은 혹시 너무 예민해서 그런 게 아닐까 하고 걱정하시는 듯했습니다. 저는 아니라고, 잘 연락 주셨다고 답을 드렸습니다.

"아니에요. 이상한 게 아니에요. 답답하겠지만 만년필이란 도구가 원래 그래요. 분명 함부로 다룬 적 없는데, 갑자기 잘 안 나오거나, 어제와 달리 종이를 긁거나, 심지어 뚝뚝 끊기기도 하지요? 갑자기 거칠어졌다면 닙(펜촉) 밸런스가 살짝 틀어졌을 확률이 높아요. 정말 문제가 있으면 아예 안 나와요. 그런데 조금이라도 불편하다 싶으면 안 쓰게 되는 게 또 만년필이에요. 연락 잘하셨어요."

그분께 답이 왔습니다.
 
"만년필이 볼펜, 수성펜보다 관리가 필요하단 건 알지만, 갑자기 이러니 당황스러워요. 업무 특성상 스트레스받는 일이 많은데, 남들처럼 여가생활 즐길 시간도, 그럴 마음의 여유도 없어요. 가끔 좋아하는 펜 들여다보는 거로 기분전환 하는데, 이렇게 말썽부리니 되려 펜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일 판이에요."

그 기분을 저도 잘 알기에, 펜을 한번 직접 살펴보기로 했습니다.

"만년필이 좀 까다로운 구석이 있는 건 맞지만, 수천만 원 하는 차도, 수억 넘어가는 집도 하자 있기도 하고 그러잖아요. 아무리 잘 만든 펜이더라도, 사람의 손을 타는 도구니 문제 있을 수 있다 생각하는 게 속 편해요. 혼자 애태우지 말고 보내세요. 일이 밀려있지만 시간 쪼개볼게요."
 
며칠 뒤, 의뢰인의 펜이 도착했습니다. 단종되어 더 이상 구할 수도 없는 모델입니다. 비스콘티 이스토스 아라크니스(Visconti Istos Aracnis) F촉. 이 만년필은 그렇게 제게 왔습니다. 

비스콘티, 펜으로 빚어낸 예술
 

비스콘티 ⓒ 김덕래

 
1988년 10월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탄생한 비스콘티는 오로라(Aurora)와 함께 이탈리아 필기구계 양대 산맥으로 우뚝 섰습니다. 오로라가 이탈리아 북부 토리노(Torino) 태생이라면, 비스콘티는 중부 토스카나(Toscana) 주도인 피렌체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이탈리아어 피렌체(Firenze)를 영어로 표기하면 플로렌스(Florence)입니다. 
 
오로라에 비해 70년가량 늦게 시작했지만, 펜 한 자루에 예술적 감성을 녹여내 어느 브랜드에도 밀리지 않는 그들만의 영역을 구축했습니다. 필기구를 단순히 쓰는 도구로서만이 아닌 예술과 문화를 담아내는 작품으로 승화시킨 거지요. 누룩 종류에 따라 막걸리 맛이 달라지는 것처럼, 펜을 빚을 때 그들만의 독창성을 가미해 매번 새롭고 놀라운 걸작들이 탄생했습니다.

이 펜에는 그리스 신화 한 편이 온전히 담겨 있습니다. 인간인 아라크네(Arachne)는 베를 짜는 능력이 탁월해 제우스와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난 여신 아테나(Athena)와 실력을 겨루게 됩니다(아테나는 지혜, 전쟁, 요리와 더불어 직물의 신으로 불립니다). 자만심이 극에 달한 아라크네는 자수로 신을 조롱하는 장면을 새겼고, 이로 인해 아테나의 노여움을 사 영원히 베를 짜는 거미가 됩니다. 비스콘티는 거미가 된 아라크네를 펜에 담았습니다. 
 

이스토스 아라크니스 캡 ⓒ 김덕래

  

이탈리아 피렌체 아르노 강 위 베키오 다리 ⓒ Ali Nuredini

 
클립에 이탈리아 피렌체 아르노 강 위에 놓인 베키오 다리(Ponte Vecchio)를 옮겨놓은 건 비스콘티의 오래된 디자인 철학입니다. 만년필의 꽃은 누가 뭐래도 펜촉입니다. 하지만 캡이 닫혀있을 때는 클립이 바통을 넘겨받습니다.

파카의 화살클립, 펠리칸의 부리클립처럼 비스콘티의 클립은 독창적입니다.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은 옛것을 익혀 그걸 바탕으로 새것을 안다는 말입니다. 역사와 전통을 과거에 두지 않고, 현실로 가져와 스포트라이트를 비췄습니다. 고루한 먼지를 털어내니 밝은 속이 드러납니다. 거미로 변한 아라크네를 양각으로 입체감 있게 표현했고, 캡과 배럴 전체를 감싸고 있는 거미줄은 거미와 마찬가지로 92.5% 순은으로 장식돼 있습니다. 
 

이스토스 아라크니스 펜촉 ⓒ 김덕래

 
맨눈으로 봐선 어디에 이상이 있는지 쉽게 알아채기 힘듭니다. 정면에서 보면 살짝 틀어진 게 보입니다만, 경미한 단차입니다. 펜촉 한가운데 갈라진 슬릿(Slit)을 기준으로 좌우 타인(Tines)이 밀착되어, 다소 흐름이 박합니다. 최적의 필기감을 맛보기엔 어딘가 아쉬운, 딱 그 정도입니다. 액셀을 밟으면 달리는 덴 문제 없지만, 살짝 핸들이 떨리고 아주 약간 한쪽으로 쏠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비스콘티의 장점은 여럿입니다만, 만년필의 기본은 누가 뭐래도 필기감이지요. 몽블랑, 펠리칸, 그라폰 등 어느 유명 브랜드와 견줘도 밀리지 않는 비스콘티만의 부드러움이 있습니다. 게다가 이 펜엔 드림터치라 불리는 23K 950 팔라듐닙이 장착되어 있습니다. 부드러운 연성 펜촉의 끝을 맛봐야 하는 게 당연한데, 이러면 고개를 갸웃하게 됩니다. 

작은 차이로 큰 기쁨을 주는 만년필
 

펜촉 교정 후 ⓒ 김덕래

 
큰 문제가 아니기에, 손본 후에도 맨눈으론 표가 안 납니다. 하지만 한 줄이라도 쓰면 달라진 걸 대번 알 수 있지요. 만년필이란 도구가 원래 그렇습니다. 일반 가방과 명품이라 부르는 가방의 기능적인 부분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무언가 담는 건 동일하니까요. 하지만 바느질 한 땀 한 땀의 균일함이나, 작은 부자재의 내구성이 명품을 만들어 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펜촉 밸런스의 미세한 차이가 최고의 만년필을 만듭니다. 
     
조정 전과 후의 비교입니다. 보다 균일하고, 긁힘이 없으며, 부드럽습니다. 필기 자체가 가능하면 별문제 없는 펜이라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최적화된 만년필을 쓰면 생각이 바뀝니다. 원래 이 정도의 필기감을 가진 펜이었구나, 달리 보게 됩니다. 그러면 자주 쓰게 되고, 펜은 점점 더 좋아집니다. 선순환이 이루어집니다. 묘한 게 아니라 정해진 수순입니다. 
 

교정 전&후 흐름 비교 ⓒ 김덕래

 
음에 대한 감수성의 정도를 음감(音感)이라 하고, 소리를 구분해 잘 알아듣는 능력을 청음력이라 합니다. 둔한 사람은 자동차에 기본으로 달린 순정오디오도 정말 좋다 느끼지만, 태어날 때부터 듣는 감각기관이 잘 발달된 사람은 자동차 값보다 더 비싼 오디오로 튜닝해놔도 고음이나 저음 어딘가가 자꾸 거슬려 만족하지 못하곤 합니다.

일부러 까다롭게 굴려는 게 아닌데, 튀는 음이 저절로 귓속을 파고드니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음악을 들을 때 남들보다 더 깊이 있고 입체감 있게 들을 수 있는 선천적 재능을 타고난 셈이니 분명 행복한 일이지만, 한편으론 피곤할 수도 있지요.

만년필도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에겐 펜에서 잉크가 나오느냐 안 나오느냐가 정상과 비정상을 가름하는 판단 기준입니다. 종이에 술술 써지면 써지는 대로, 또 긁으면 긁는 대로 그러려니 별생각 안 합니다. 미묘한 필기감의 차이를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게 어쩐지 손해 보는 일처럼 생각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내 펜에 별다른 불만이 없으니 편한 것도 사실이지요.

감각이 발달된 사람일수록 작은 차이를 크게 느낍니다. 그로 인해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지만, 예상 못 한 기쁨을 주기도 하는 게 만년필입니다. 작은 차이가 필기에 영향을 미치는, 생각보다 섬세한 도구가 또 만년필입니다.

이렇게 예민한 걸 어떻게 쓰나 싶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소소한 불편을 감수할 만큼의 매력이 있습니다. 내가 길들이는 대로 변해가는 '쓸 것'은, 무엇과도 맞바꿀 수 없는 즐거움을 줍니다.

당신은 만년필과 아주 잘 맞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무딘 사람이면 잘 못 느낄 정도의 수준이었습니다. 쓰지 못할 정도로 상태 나쁜 펜이 좋아진 게 아니라, 무던했던 펜이 더 좋아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입니다.

만년필의 필기감은 자동차의 승차감과 같습니다. 경차를 타다 중형차를 처음 타면 환상적인 승차감에 탄성이 납니다. 하지만 어쩌다 대형세단을 타고, 다음 날 다시 전의 중형차를 타면 내가 어제 왜 감동했었나 싶은 게 사람입니다. 몸이 먼저 알아챕니다. 자동차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차급이 있지만, 만년필은 약간 다릅니다. 금액이 낮은 펜이더라도 잘 세팅된 상태로 오래 써 길이 들면 어떤 펜에도 밀리지 않는 근사한 필기감을 맛볼 수 있습니다.
 
간혹 내가 너무 예민한 건가? 생각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 정도는 그냥 참고 써야 하는데 괜한 까탈을 부리는 건가 싶지요? 만년필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조용하고 차분합니다. 섬세하고 정서적으로 안정돼 있습니다. 큰 소리를 내는 것보다, 작은 음성으로 조근조근 얘기하는 걸 더 좋아합니다. 아차 하고 펜을 떨어뜨릴 수는 있지만, 떨어뜨린 펜을 발로 한 번 더 밟을 정도로 덤벙대진 않습니다.

가끔은 나도 좀 둔했으면 좋겠다, 덜 신경 쓰며 살면 좋겠다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스스로가 더 잘 압니다. 어쩌면 볼펜이 더 실용적이고, 또 어쩌면 수성펜이 보다 완벽한 필기구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약간만 필기 각도가 달라져도 손끝에 전해지는 느낌이 다르고, 또 조금만 눌러 써도 선의 굵기가 달라지는 만년필이란 도구에서만 느낄 수 있는 그것이 있지요.
 
사람은 다 다릅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면 그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사람이 있고, 자기 안에서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펜이 잘 안 나오는 이유를, 원래 불량인 게 운 나쁘게 내게 온 거라 생각하는 이가 있고, 쓰는 나의 문제일 수도 있다 생각하는 이도 있습니다.

당신은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만년필과 아주 잘 맞는 사람입니다. 주변 지인들보다 잘 발달된 감각으로 인해 본인이 피곤할 수는 있지만, 남들이 모르는 필기감의 영역을 혼자만 넘나들 수 있다는 건 또 다른 즐거움이 분명합니다.

복잡하고, 단조로운 일상에서 잠깐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면, 그저 손에 쥐는 것만으로, 고작 몇 줄 쓰는 것만으로 하루치의 시름을 날려버릴 수 있다면, 만년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게 아닐까요?

요즘 같은 디지털 시대, 마치 구시대 산물처럼 보이는 만년필의 생명력은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시필테스트 ⓒ 김덕래

 
* 비스콘티(Visconti)
1988년 10월 20일 예술과 문화의 도시 피렌체에서 첫발을 뗀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필기구 업체 중 하나. 한 모델을 계속 생산하기보단 소량생산 후 단종, 또 새로운 모델을 탄생시키는 데 힘을 쏟는 노력파. 오직 나만의 펜이란 기분을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영문 두 자를 캡 탑에 담는 독창적인 마이펜 시스템 적용. 전통의 가치에 신기술을 더해 필기구를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올리려 애쓰는 예술가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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